SF 생태주의
<아노 2205>와 모스라, 영혼의 쉴드 본문
위 사진은 초코 케이크를 보여줍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초코 케이크를 묘사한다면, 소설 독자는 이게 비(非)현실 설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서 초코 케이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 설정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성탄절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근사한 까페에서 우리는 말차 라떼와 초코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왼손 오른손> 같은 달달한 노래를 듣고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먹을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은 초코 케이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초코 케이크와 달리,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은영 작가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주류 문학에 속합니다. 주류 문학은 비현실 설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생체 우주선보다 용산 참사를 이야기합니다. 용산 참사는 비현실 설정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폭력적인 재개발 사례들을 겪습니다. 최은영 작가는 비현실 설정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단편 소설과 달리, 어떤 이야기들은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어떤 이야기들은 비현실을 중시합니다. 인류 문화들은 온갖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비현실 설정에게 기반합니다.
성탄절 초코 케이크와 용산 참사는 현실 소재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초코 케이크를 먹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신문을 읽고 재개발 비극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용산 참사가 나타났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썼습니다. 용산 참사와 달리, 생체 우주선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생체 우주선을 구경하지 못하고 생체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묘사한다면, 소설 독자는 이 묘사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분류할 겁니다. 초코 케이크와 생체 우주선은 대조적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성탄절 초코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기 때문에, 초코 케이크 그 자체는 SF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만약 소설 등장인물이 생체 우주선에 탑승한다면,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일 겁니다. 만약 생체 우주선에서 소설 등장인물이 초코 케이크를 먹는다면, 비록 초코 케이크가 비현실 소재가 아니라고 해도, 생체 우주선이 비현실 설정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노 2205>는 건설/경영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미래 비행 자동차를 보여줍니다. 현실에서 비행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비행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행 자동차는 미래 기술입니다. 미래 기술은 SF 설정입니다. <아노 2205>는 위성 도시를 보여줍니다. 아직 달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성 도시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비행 자동차와 위성 도시 같은 비현실 소재들 때문에, <아노 2205>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다른 여러 건설/경영 비디오 게임들과 달리, <아노 2205>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납니까? 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들고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나요? 왜 사람들이 비현실 설정을 이야기하고 좋아하나요?
현실에서 성탄절 초코 케이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초코 케이크를 묘사합니다. 이야기가 초코 케이크를 묘사할 때,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에서 우리와 초코 케이크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용산 참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재개발 비극을 묘사합니다. 이야기가 재개발 비극을 묘사할 때,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에서 우리와 재개발 비극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현실을 필연적으로 반영합니다.
이건 이야기가 현실을 100% 완전히 반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현실을 100% 반영하지 않습니다. 최은영 작가는 현실을 '전략적으로' 가공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현실을 '전략적으로' 반영합니다. 특정한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최은영 작가는 현실을 가공했고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최은영 작가가 현실을 가공했다고 해도, 최은영 작가는 비현실 소재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최은영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집어넣었다고 해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용산 참사를 묘사하고, 현실에서 우리와 용산 참사는 함께 존재합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생체 우주선과 비행 자동차와 위성 도시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용산 참사, <아노 2205>와 위성 도시는 다릅니다. 현실에서 우리와 위성 도시는 함께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우리가 달에 간다고 해도, 달에서 우리는 도시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노 2205>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아노 2205>를 만드나요? 현실에서 우리와 위성 도시는 함께 존재하지 않으나, 왜 사람들이 위성 도시를 이야기 속에 집어넣나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아노 2205>를 만들고 이것을 좋아하나요?
현실이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비현실 설정을 좋아하나요? <아노 2205>가 현실 도피 게임인가요? 현실에서 위성 도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노 2205>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발판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주장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현실 도피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현실 도피는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하기 위한 가장 흔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우주 개척을 진지하게 논의합니다. 진지한 논의는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우주 개척이 진지한 논의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황당무계한 도피가 아닙니다.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우주 개척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처럼, 언젠가 위성 도시는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몇 십 년 전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스마트폰은 황당무계한 공상이었습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전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지? 어떻게 전세계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기계들을 들고 소통하지? 이건 엉터리 헛소리야! 푸하하!" 몇 십 년 전에, 이렇게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비웃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마트폰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스마트폰을 비웃지 못합니다. 위성 도시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몇 십 년 전에,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비웃을 수 있었으나, 이제 스마트폰이 일상이기 때문에, 아무도 스마트폰을 비웃지 못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뀝니다.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언젠가 위성 도시는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언젠가 위성 도시가 현실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노 2205>는 엉터리 도피가 아닙니다. 이건 미래 문명이 위성 도시를 100% 건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노 2205>와 달리, 어쩌면 미래 문명은 위성 도시를 건설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미래 문명이 위성 도시를 건설하지 못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노 2205>는 미래 문명을 예측하지 않습니다. <아노 2205>는 예측이 아닙니다. 비단 <아노 2205>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예측이 아닙니다. 비행 자동차는 예측이 아니고, 미래 메트로폴리스는 예측이 아니고, 생체 우주선은 예측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아노 2205>는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고정 관념을 타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합니다.
<아노 2205>는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묘사합니다.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 관념을 타파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린 사고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열린 사고 방식은 SF 미덕입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아노 2205>는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열린 사고 방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아노 2205>는 사이언스 픽션이 진지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아노 2205>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위성 도시는 하드 SF 소재입니다. SF 장르에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SF 장르에서 스페이스 오페라와 사이언스 판타지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고지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노 2205>가 사이언스 픽션인 것처럼, <고지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아노 2205>와 달리, <고지라>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이 게임에서 모스라와 가이강은 투닥투닥 싸웁니다. 과학자들은 거대 괴수들이 싸운다고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습니다. 위성 도시와 우주 개척은 진지한 논의이나, 엄마 나방 괴수와 외계 침략자 괴수는 진지한 논의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모스라와 가이강을 비롯해 거대 괴수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술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위성 도시를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술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엄마 나방 괴수가 독가루들을 뿌린다고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습니다. 위성 도시와 달리, 모스라와 가이강은 진지한 논의가 되지 못합니다. 모스라와 가이강이 진지한 논의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아노 2205>와 달리, 모스라와 가이강은 조롱을 피하지 못합니다. 모스라가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아노 2205>가 SF 정수에 가깝다고 분류하고 모스라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깝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비현실을 논의하기 때문에, 오직 이것 때문에, 비현실에게 가치가 있나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영혼을 운운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내 영혼을 걸고 너를 사랑해." 우리는 이 문구가 현실 도피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문구가 진지하다고 느낍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영혼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과학자들은 영혼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습니다. 학술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토론하지 않습니다. 만약 과학 논문이 영혼을 주장한다면, 다른 과학자들은 이 논문이 사기와 허풍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모스라처럼, 영혼은 엄중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엄중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영혼을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영혼이 진지한 표현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내 영혼을 걸 수 있어." 이 문구에서 영혼은 진지합니다. 과학자들은 영혼을 논의하지 않으나, 영혼이 비현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구는 진지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영혼의 쉴드'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영혼의 쉴드는 어떤 사람이 뭔가를 아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영혼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혼의 쉴드라고 표현하나요? 사람들이 영혼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표현을 사용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혼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을 믿지 않으나, 사람들은 영혼의 쉴드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에서 영혼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영혼이 비현실 소재이기 때문에, 비현실 소재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건 진심이야!"와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내 영혼을 걸 수 있어!"는 다릅니다. 전자는 밋밋하고 단순한 표현이나, 후자는 사랑을 훨씬 강조합니다. 비현실 소재(영혼)는 주제(사랑)를 강조합니다. 비현실 소재가 주제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록 과학자들이 비현실 소재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은 비현실 소재를 표현합니다. 비현실 소재는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닙니다.
어떻게 비현실 소재가 주제를 부각할 수 있나요? 영혼은 종교 개념입니다. 종교는 영혼을 말하나, 과학은 영혼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과학보다 종교에 속합니다. 과학보다 종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학보다 종교는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학은 감히 종교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은 발달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이후, 근대 과학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근대 과학은 그저 200년을 넘었을 뿐입니다. 반면, 1,000년 이상, 종교는 인류 문화에 깊게 스몄습니다. 200년 과학은 1,000년 종교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과학은 꼬꼬마입니다.
꼬꼬마 과학과 달리, 종교는 노인입니다. 꼬꼬마가 노인에게 까불지 못하는 것처럼, 과학은 종교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종교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종교가 인류 문화에 깊게 스몄고, 영혼이 종교에 속하기 때문에, 영혼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영혼은 인류 문화에 깊게 스몄습니다. 영혼이 인류 문화에 깊게 스몄기 때문에, 영혼은 특별합니다. 꼬꼬마 과학은 특별하지 않으나, 유구한 영혼은 특별합니다. 영혼이 특별하기 때문에, 영혼은 사랑을 강조합니다. "나는 내 영혼을 걸고 너를 사랑해." 이 문구에서 특별한 영혼은 영원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비현실 소재는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모스라와 가이강은 거대 괴수입니다. 거대 괴수 역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근대 과학이 나타나기 전에, 계몽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거대 괴수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습니다. 모스라가 열대 밀림 부족민들을 보호하고, 모스라가 알을 낳기 때문에,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 대지모신과 비슷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자연의 여신, 대지모신을 이야기했습니다.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자연의 여신, 대지모신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습니다.
모스라와 가이강은 유구한 신화들을 계승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슈트 액션이 너무 조잡하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모스라와 가이강은 유구하고 특별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과학이 진지하다고 해도, 과학이 그저 200년 꼬꼬마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은 감히 모스라와 가이강을 비웃지 못합니다. 비록 근대 과학이 모스라를 비웃는다고 해도, 근대 과학보다 대지모신이 훨씬 유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근대 과학은 모스라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아무리 21세기 초반이 과학 시대라고 해도, 신화와 종교가 인류 문화에 깊게 스몄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이언스 판타지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아노 2205>와 모스라가 대조적이라고 해도, 과학보다 신화가 특별하기 때문에, <아노 2205>보다 모스라에게는 훨씬 커다란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에게는 훨씬 커다란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근대 과학이 모스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어쩌면 <아노 2205>는 모스라에게 머리를 조아릴지 모릅니다. 과학보다 신화와 종교는 우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21세기 초반이 과학 시대라고 해도, 과학보다 신화와 종교가 우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전히 신화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화를 과학이라고 포장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과학은 신화인지 모릅니다. 종교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가 과학을 믿기 때문에, 과학은 과학이 되는지 모릅니다. 빌리 홀리데이가 <이상한 열매>를 부른 것처럼, 인종 차별론자들은 흑인 차별이 과학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종 차별론자들이 흑인 차별을 과학이라고 믿은 것처럼, 합리성에서 과학은 비롯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믿기 때문에, 믿음에서 과학은 비롯하는지 모릅니다. 이 지점에서 신화와 종교는 과학을 포섭합니다.
과학은 합리성이 아닙니다. 합리성을 포장하기 위해 우리는 그저 과학을 말할 뿐입니다. 과학은 또 다른 신화, 또 다른 종교입니다. 이건 과학이 허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4세기 문학 작가들은 생체 우주선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유전 공학과 진화 이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초반 SF 작가들은 생체 우주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유전 공학과 진화 이론을 알기 때문입니다. 14세기 문학과 21세기 초반 SF 소설에게 유전 공학과 진화 이론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유전 공학과 진화 이론처럼, 과학은 존재합니다. 분명히 과학은 존재합니다. 과학은 허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종 차별론처럼, 종종 과학은 과학이 아닌지 모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과학이 힘을 얻었기 때문에, 많고 많은 것들은 과학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과학이 아닌지 모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는 자신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상대가 광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진짜 과학이고, 무엇이 광신인가요? 종종 과학이 과학이 아닐지 모르기 때문에, 합리성을 포장하기 위해 어떤 것이 그저 과학을 말할 뿐이기 때문에, 과학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신화와 종교가 과학을 포섭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과학을 떠든다고 해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그저 또 다른 신화, 또 다른 종교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합리성을 포장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그저 과학을 운운할 뿐인지 모릅니다. 만약 사회주의가 과학이 아니라면, 사회주의가 전형적인 신화라면, 사회주의에게 무슨 가치가 있나요? 가난한 사람들은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었습니다. 사회주의는 가장 대표적인 가난 사상입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 할배들조차 사회주의가 가난 사상이라고 인정합니다.
사회주의가 과학이든, 종교이든, 사회주의는 가난 사상을 대표합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들조차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 사회주의가 소중한가요? 사회주의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뛰어난 과학이기 때문에? 슬라보예 지젝 같은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좌파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 사상은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입니다. 가난 사상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소중할 수 있습니다.
※ 사진 <Chocolate cake decorated …> 출처: KamranAydinov, 링크
※ 게임 <고지라> 스크린샷 출처: Gojira 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