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팀펑크가 동화풍이라는 오해 본문
[스팀펑크가 동화풍일까요? 아니, 세상에. 정말 이런 스팀펑크가 동화풍으로 보입니까?]
종종 저는 '스팀펑크가 동화풍'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의 여러 사람들은 스팀펑크가 동화풍이라고 말합니다. 의외로 이런 믿음이 꽤나 널리 퍼졌나 봅니다. 하지만 스팀펑크 소설들은 항상 밝거나 유쾌하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허버트 웰즈의 소설부터 팀 파워스의 소설들을 거쳐 뉴 위어드에 이르기까지, 스팀펑크는 우울함과 기괴함을 선보이곤 했습니다. 스팀펑크가 현대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 본인은 <해저 2만리>와 <타임 머신>이 스팀펑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저런 소설들은 고전적인 스팀펑크에 속합니다.
그리고 <타임 머신>과 <해저 2만리>는 결코 유쾌한 동화풍 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추악하고 암울한 소설입니다. 아동판 소설 때문에 많은 성인들은 <해저 2만리>를 신나는 바다 소풍이라고 생각하지만, 네모 선장의 행위와 사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죠. 네모 선장은 상당히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이고, 유럽 강대국들의 함선에게 무시무시한 응징을 가합니다. <타임 머신>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죠. 모든 것이 멸망한 미래. 인종은 둘로 나뉘고, 그 둘의 관계는 참혹합니다. 지구의 종말은 정말 까마득하고 눈 앞이 캄캄해집니다. (크으, 역시 허버트 웰즈는 천재가 아닐지.)
팀 파워스의 소설들도 마찬가지죠. <아누비스의 문>을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사무엘 콜리지의 그 애절하고 어두운 시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아누비스의 문>은 19세기 런던 뒷골목의 어두운 풍경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그 지하 미궁을 방황할 때, 마치 기괴한 던전 탐험을 보는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힌 던전 탐험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아누비스의 문>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21세기 초반의 위어드 테일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들은 몽환적이고 퇴폐적인 도시 풍경을 선보였고, 이 도시는 결코 행복하거나 아기자기한 장소가 아닙니다.
뉴크로부존 같은 도시는 뉴 위어드 스팀펑크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추레한지 보여줍니다. 사방에 쓰레기들이 널렸고, 강물은 오물로 가득하고, 공장은 매연을 내뿜고, 온갖 산업들은 지저분한 부산물을 남기고…. 누구도 이런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필립 리브의 소설들도 그리 탐탁하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아니, 애초에 바다가 증발하고 기괴한 도시가 약한 도시를 잡아먹기 위해 쫓아다니죠. 여기에서 어떻게 유쾌한 감성이나 동화풍 감성을 찾을 수 있겠어요. 이건 잔혹 동화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스팀펑크를 동화풍이라고 오해하는 이유는….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애니메이션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예전에 웹진 alt.SF도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애니메이션을 스팀펑크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팀펑크가 동화풍이라고 여기는 듯해요. 결국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소설 이외에 대중적인 다른 매체들도 스팀펑크를 어둡게 묘사합니다.
만화 <젠틀맨 리그> 같은 경우는 별로 밝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추악하고 곳곳에서 썩은 냄새를 풍깁니다. 네모 선장이나 거인 하이드가 사람들을 도륙하는 장면을 보면, 이게 유쾌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워해머> 같은 판타지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워해머>는 오직 전쟁을 묘사하기 위해 각 종족들을 음험하게 이야기하고, 특히 스케이븐 같은 종족은 스팀펑크의 기괴한 면모를 반영합니다. 지하 미궁에서 온갖 무시무시한 무기들과 독극물과 생체 개조를 연구하기 때문이죠. 음, 물론 <젠틀맨 리그>나 <워해머>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유명한 창작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설이든 보드 게임이든) 스팀펑크 창작물을 제한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저런 오해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 추측이 틀릴 수 있지만, 그리 잘못된 생각이 아닐 겁니다. 사실 이런 오해는 비단 스팀펑크 장르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나 사이버펑크를 비롯해 우리나라 대중의 오해는 정말 아득한 수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무조건 유치하다거나 사이버펑크는 무조건 가상 공간을 이야기해야 한다거나 뭐, 그런 오해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SF 소설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사이언스 픽션을 오해하나 봅니다.
희한한 점은…. SF 소설은 별로 인기가 없지만, 사이언스 픽션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점입니다. 음, 어쩌면 블록버스터의 영향이 클 수 있겠군요. SF 소설은 잘 안 팔리지만, (그래서 불새 같은 출판사는 없어졌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는 잘만 팔리기 때문이죠. 사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물론 그냥 영화 쪽만을 이야기한다면 모르겠지만, SF 전반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