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타타이드 라이징>이 상상으로서만 남는다면… 본문
[이런 개조 동물이 현실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때 윤리 철학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소설 <소년과 개>는 제목 그대로 소년과 개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블러드는 평범한 개가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동물이죠. 사람처럼 블러드는 똑똑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비단 <소년과 개>만 아니라 수많은 SF 소설들은 개조 동물들을 이야기해요. 사실 허버트 웰즈가 <모로 박사의 섬>에서 반인반수를 만든 이후, 이런 똑똑한 개조 동물들은 여러 SF 소설들 속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어떤 개조 동물은 사람만큼 똑똑하지 않으나, 적어도 일반적인 야생 동물이나 가축보다 훨씬 영리하고, 그래서 인간과 함께 어려운 작업들을 수행하죠.
만약 유전 공학이 동물들을 개량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개조 동물들을 다양한 분야들에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우리는 산악 구조견이나 야생 동물 탐지견이나 장애인 안내견 같은 특별한 동물들을 개량할 수 있겠죠. 이런 구조견들이나 탐지견들이나 안내견들은 소중한 목숨들을 보호할 겁니다. 야생 탐지견들은 호랑이처럼 희귀한 동물을 보호할 수 있어요. 지진이나 태풍이 도시를 덮쳤을 때, 구조견들은 생존자들을 찾고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일반적인 가축이 어려운 수색이나 탐지 훈련을 받는 것은 스트레스가 가득한 과정입니다.
<시리우스>나 <소년과 개>나 <스타십 트루퍼스>, <스타타이드 라이징>, (클리포드 시맥의) <도시>처럼 만약 유전 공학이 똑똑한 개조 동물을 만든다면, 수색 임무나 수색 훈련은 훨씬 쉬워질 겁니다. 탐지견들이 사람처럼 똑똑하지 않고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똑똑해진다면, 임무나 훈련은 좀 더 쉬워질 테죠. 게다가 유전 공학이 개를 개량할 수 있다면, 다른 동물들 역시 개량할 수 있을 겁니다. 새들을 개량하고 무인기처럼 이용할 수 있겠죠. 아니면 물고기를 개량하고 수중 로봇처럼 이용할 수 있겠죠.
미래에 우리는 정말 개조 조류나 개조 어류를 이용할 수 있을까요. 시리우스만큼 똑똑한 동물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그보다 좀 덜 똑똑한 동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정말 개조 탐지견이나 개조 물고기가 현실적인 상상력일까요. 언젠가 기술적 특이점이 오는 것처럼 인류가 개조 탐지견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무도 그걸 확신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술적 특이점이 여러 논란들을 부르는 것처럼 개조 탐지견은 분명하지 않은 예측입니다. 누군가는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게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어느 책에서 왜 생명 공학이 옳지 않은지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철학적 기반이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양반들은 기득권들이 피지배 계급을 통치해야 한다는 우파적인 관점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지나 분배를 외쳐도 기본적으로 마이클 샌델 같은 사람은 기득권들을 인정하죠. 샌델 같은 철학자들은 좋은 소리들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나, 이런 양반들은 결정적인 문제(자본주의와 생산 수단)를 회피합니다. 그들은 그저 착한 소리들만 떠들 뿐이고,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야기를 회피해요. 어쨌든 마이클 샌델이 그 책을 쓴 이유는 그만큼 유전 공학이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일 겁니다.
유전 공학이 정말 문제를 일으킨 이후, 대책을 구상한다고 해도, 때는 이미 늦을지 모릅니다. 유전 공학이 정말 문제를 터뜨리기 전에 우리는 미리 대책을 구상해야 하겠죠. 이런 논의들을 살펴본다면, 언젠가 사람들이 개조 탐지견을 이용할 것 같습니다. 똑똑하고 뛰어난 개조 동물은 별로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고, 언젠가 우리의 눈 앞에서 돌아다닐 것 같습니다. 100년이나 200년 안에 그런 개조 동물들이 돌아다닐지 모르죠. 어쩌면 100년이 아니라 당장 50년 안에 개조 동물들이 등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그런 개조 동물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유전자 조작 작물이나 신체 개조가 현실적인 문제라고 해도 똑똑한 개조 동물은 그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해박한 미래 학자들 역시 미래를 쉽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겠죠. 어쩌면 <시리우스>나 <스타타이드 라이징>이나 <도시>의 상상력은 그저 상상으로서 남을지 모릅니다. 클리포드 시맥이 쓴 <도시>는 절반만 옳을지 모릅니다. 똑똑한 인공 지능이 나타난다고 해도 똑똑한 개조 동물은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개조 동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스마트폰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나, 스마트폰을 예측한 미래학자들은 드뭅니다. 그것처럼 개조 동물은 SF 작가들이 생각하는 상황과 전혀 다를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들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과연 SF 작가가 개조 동물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개조 동물은 등장하지 않을지 모르고, 개조 동물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은 그저 가능성만 상상하는지 모르죠. 누군가는 그게 헛다리를 짚는 행위라고 말할지 몰라요. 하지만 왜 가능성을 상상하는 행위가 헛다리를 짚은 행위로 이어져야 할까요. SF 작가는 미래학자가 아닙니다. 만약 SF 작가들이 현실적인 개조 동물을 예측한다면 좋겠으나, SF 소설의 목적은 그게 아니죠. SF 소설의 목적은 자연 과학에서 비롯한 상상력과 그것을 둘러싼 관념이나 철학, 사회 구조입니다.
솔직히 저는 똑똑한 개조 탐지견들이 보고 싶습니다. 개조 물고기들이 심해 생태계를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개조 탐지견들이나 개조 물고기들이 없다고 해도 <시리우스>나 <소년과 개>나 <도시>가 가치를 잃지 않을 겁니다. 그 소설들이 개조 동물을 둘러싼 관념이나 사회 구조를 이야기한다면, SF 소설로서 계속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