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쉘터>와 풍요로운 먹거리, 공유 사회 본문
[사이버펑크 거대 도시는 아주 화려하나, 이런 기계 도시와 생명력을 연결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도입부 장면은 태양 농장입니다. 태양 농장은 압도적인 면적을 차지합니다. 태양 농장은 식량들을 생산하나, 여기는 풍요로운 분위기를 별로 풍기지 않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풍요로운 농장이 먹거리들을 생산하고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예찬합니다. 만약 과수원에서 나무들이 탐스러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단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이 풍요로운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느낄 겁니다. 영화 속의 태양 농장과 풍요로운 과수원 생명력은 다릅니다. 태양 농장은 생명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양 농장은 삭막하고, 기이하고, 기계적이고, 획일적입니다.
영화 도입부 장면에서 태양 농장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태양 농장을 건설했나요? 왜 그들이 풍요로운 농장들과 과수원들을 외면하나요? 자연 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첫째 장면에서 영화 해설은 이미 자연 환경이 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자연 생태계가 멸종했기 때문에, 풍요로운 농장들과 과수원들은 함께 사라졌을 테고,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삭막하고 기이하고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태양 농장에 의지해야 합니다. 웅장한 자연 환경과 풍요로운 과수원은 긍정적이나, 삭막하고 기이하고 기계적인 태양 농장은 부정적입니다. 양쪽은 대립합니다.
자연 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에, 풍요로운 과수원과 기계적인 태양 농장이 대립하는 것처럼, 자연과 먹거리는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자연'이라는 용어는 많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만약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의 힘이라고 부를 겁니다. 이 상황에서 자연의 힘은 먹거리와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연의 힘(천둥과 번개)은 압도적이고 웅장하고 원초적인 파괴력입니다. 만약 관광객들이 거대한 사막 골짜기를 구경한다면, 관광객들은 사막 골짜기가 자연의 힘이라고 부를 겁니다. 이 상황에서 자연의 힘은 생명력보다 거대한 장관을 가리킵니다.
번쩍이는 벼락과 거대한 사막 골짜기가 자연의 힘이 되는 것처럼, '자연'은 많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오직 풍요로운 생명력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자연이라는 용어처럼, '자연'은 먹거리와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 없이, 풍요로운 과수원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과 먹거리는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멸종한 자연 생태계와 기이하고 삭막한 태양 농장을 함께 보여줍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사이버펑크입니다.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첨단 거대 도시들은 전형(典型)입니다. 미래 첨단 거대 도시는 풍요롭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클라우드펑크>는 이른바 오픈 월드 택배 게임입니다. 게임 주인공 라니아는 배달 기사입니다. 라니아는 자동차를 타고, 거대 도시를 돌아다니고, 물품들을 배달합니다. 배달 물품들 중에는 식료품이 있습니다. 어떤 업무에서 라니아는 동물 고기를 배달합니다. 현실에서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육류들을 배달합니다. 명절이 다가올 때, 육류/어류/패류는 인기 선물이 되고, 택배 기사들은 이런 선물들을 바쁘게 배달합니다. 그 자체로서 육류 배달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택배 게임 <클라우드펑크>는 사이버펑크 장르에 속합니다.
사이버펑크로서 <클라우드펑크>는 야생 자연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묘사합니다. 다행히 아직 야생 자연은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도 거대 도시에서 풍요로운 생명력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픈 월드 게임으로서 <클라우드펑크>는 공간적인 배경을 연이어 강조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무궁무진한 사이버펑크 거대 도시를 누빕니다. 다른 많은 사이버펑크들이 그러는 것처럼, 거대 도시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자연 생태계가 멸종했고 풍요로운 먹거리들이 사라진 것처럼, 어쩌면 <클라우드펑크>에서도 신선하고 안전한 고기는 희귀한지 모릅니다.
라니아가 육류를 배달한 이후, 라니아는 이게 무슨 동물 고기인지 묻습니다. 택배 고객은 라니아가 이상한 것을 묻는다고 조롱합니다. 택배 고객은 이게 무슨 동물 고기인지 대답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연 환경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시민들은 신선하고 안전한 고기를 접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작고 누추한 아파트에서 라니아는 거대 도시에게 생명력, 야생이 부족하다고 한탄합니다. 거대 도시에서 생명력, 야생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풍요롭고 신선한 먹거리들을 구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가 해석한다면, 이 해석이 타당한가요, 아니면 과잉 해석인가요?
야생 자연과 상관없이, 어쩌면 사이버펑크 시민들은 풍요롭고 신선한 먹거리들을 얻는지 모릅니다. 요리사들은 풍요로운 재료들을 이용하고, 라멘들을 끓이고, 교자들을 굽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멸종한 자연 생태계와 기계적인 태양 농장을 함께 제시하는 것처럼, <클라우드펑크>에서도 야생 자연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선한 먹거리들은 부족한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클라우드펑크>를 연결하고 사이버펑크 전형을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민들이 풍요로운 먹거리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사이버펑크 도시와 생명력을 연결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는 신 게임(god game)입니다. 동시에 <레우스>는 테라포밍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네 거인들을 조종하고, 식물들을 심고, 동물들을 풀어놓습니다. 나무 거인과 늪지 거인이 식물들을 심은 이후, 식물들은 자연력을 생성합니다. 자연력은 다른 동물들, 광물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식물들이 기초적인 영양분 생산자이기 때문에, 식물들은 자연력을 생성할 겁니다. <레우스>에서 식물들이 자연력을 생성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식물들이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간주합니다. 종종 '식물'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나, 동시에 '식물'은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패트리스 머피는 <식물 아내>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식물 아내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아무리 플랜테이션 농부 남편이 식물 아내를 학대하고 폭행한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저항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농부를 몰아내고 외계 식생들을 돌보는 것 같습니다. 단편 소설 초반부~중반부에서 식물 아내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단편 소설 후반부에서 식물 아내가 플랜테이션 농부를 몰아낸 이후, 식물 아내(와 외계 식생들)는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레우스>에서 식물들과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와 외계 식생들)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명력을 사랑합니다. 과수원에서 나무들이 탐스러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 때, 사람들은 이 장면이 사랑스럽다고 느낄 겁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인간 역시 동물이고,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화들은 다양하나, 다양한 인류 문화들에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게는 상대적인 문화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극지 이누이트 할머니부터 열대 아마존 소녀까지, 동아시아 이성애 여자부터 서유럽 동성애 남자까지, 모든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트랜스젠더 차별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편견입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역시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트랜스젠더는 먹어야 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모든 트랜스젠더가 굶어죽는다면, 더 이상 트랜스젠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트랜스젠더 차별은 사라질 겁니다. 트랜스젠더들이 먹고 살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성 차별은 트랜스젠더들을 조롱하고 비하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아주 근본적입니다. 근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에서 무엇이 자유로울 수 있나요?
[성장의 축복은 식물을 축복하고 식량 생산량과 자연력은 늘립니다. 풍요로운 자연은 먹거리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자연과 먹거리와 생명체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비디오 게임 <버드 워크>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고작 이런 아케이드 게임 따위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영문 위키피디아는 <버드 위크>가 초기 생태계 시뮬레이션이라고 분류합니다. <버드 위크>에서 (엄마) 새는 아기 새를 먹입니다. (엄마) 새는 벌레들을 부지런히 잡고 아기 새를 부지런히 먹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 핵심입니다. <버드 위크>는 1986년 게임이나, 2013년 게임 <쉘터>에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엄마 오소리는 아기들을 돌봅니다. 엄마 오소리는 먹거리들을 찾고 아기들을 먹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쉘터>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 핵심입니다. 심지어 게임 결말조차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핵심이라고 반영합니다. 1986년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2013년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 핵심입니다. 자연 생태계와 먹고 사는 문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태계 게임이 자연과 먹거리와 생명체를 강조하는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다나 시바는 여기에 동의할 겁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로서 반다나 시바가 생태계 게임 <쉘터>를 좋아할까요? 비록 반다나 시바가 생태계 게임 <쉩터>를 싫어한다고 해도, 에코 페미니스트로서 반다나 시바는 자연 생태계와 풍요로운 먹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연과 먹거리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만약 에코 페미니스트로서 반다나 시바가 <블레이드 러너 2049>와 <클라우드펑크>를 본다면, 반다나 시바는 자연과 먹거리가 비슷한 위상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아니면 반다나 시바는 먹거리가 자연에 속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연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삽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먹거리를 얻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공유 자산보다 민영화, 사유화를 선호합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자연 환경을 공유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사유화를 열심히 떠벌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다른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서구 문명에서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가 나타났을 때, 가장 첨예한 문제는 세금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와 세금 문제가 함께 나타난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소유 권리를 중시합니다. 개인적인 소유 권리가 민영화, 사유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땅부자를 인정합니다. 자본주의는 토지가 공유 자산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누군가는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무산자(無産者)는 땅부자에게 굽신거려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무산자는 땅부자에게 굽신거려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무산자 계급을 필연적으로 차별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빈부 격차는 필연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급 노동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노동자들은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비참한 인생은 필연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무산자가 땅부자에게 굽신거려야 하기 때문에, 무산자에게 비참한 인생은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유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유 사회에 반대합니다. 심지어 무산자들조차 공유 사회에 반대하고 땅부자를 두둔합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가리키고 공유 사회가 실패라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흔한 주장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실패했고, 그래서 공유 사회는 망상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과합니다. 20세기 동안, 자유 민주주의는 1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고,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고, 베트남을 비롯해 식민지들을 수탈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제3세계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고 제국주의 전쟁(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파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사회주의 진영보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파쇼주의는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 비난하나, 소비에트 연방이 불가침 조약을 맺기 전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 침략을 인정했습니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 침략을 인정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불가침 조약이 나쁘다고 해도,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보다 자유 민주주의 지역 유럽에서 파쇼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자유주의 유럽은 파쇼주의 본거지입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20세기 동안,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들을 참혹하게 수탈했고, 식민지들은 깊고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이 상처는 낫지 않았고, 그래서 제3세계 국가들은 사회 인프라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들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제3세계들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는 끔찍한 상처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는 제3세계들이 열등하고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조롱합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비단 무산자 차별만 아니라 인종 차별 역시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좋다고 떠받듭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파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은 자유주의 범죄입니다. 자유주의는 전쟁 범죄자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전쟁 피해자입니다. 자유주의는 이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유주의는 자신이 전쟁 범죄자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전쟁 피해자라고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유주의는 악이 평범하다고 주장합니다.
악이 평범하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은 자유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악이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나 악이 되고, 누구나 범죄를 저지릅니다.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보편적인 인간 본질에게 악이 있다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보편적인 인간 본질을 운운합니다.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합니다. 여기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또 다른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자유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만들고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을 합칩니다.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전쟁 피해자이나, 자유주의는 양쪽이 비슷하다고 거짓말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파쇼주의는 떨어지고, 자유주의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지역보다 자본주의 지역 유럽에서 파쇼주의는 나타났습니다. 파쇼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자유주의는 파쇼주의를 방치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끔찍하게 짓밟았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자유주의는 파쇼주의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파쇼주의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도, 자유 민주주의는 파쇼주의를 방치했습니다. 파쇼주의는 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파쇼주의는 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고, 소비에트 연방은 전쟁 피해자입니다. 이건 명명백백한 사실, 팩트입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명명백백한 사실, 팩트를 외면하고 피상적이고 단순한 측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지배 계급들은 공유 사회들을 짓밟았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유일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오랜 동안, 지배 계급들은 공유 사회들을 짓밟았고, 이런 학살들 속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존재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해 여러 공유 사회들)은 실패자보다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피해자가 실패자라고 말합니다.
[엄마 오소리는 여러 아기들을 먹여야 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피해자가 실패자라고 말하나, 이게 사실인가요? 만약 백인 남자가 원주민 여자를 강간한다면, 원주민 여자가 강간 피해자이기 때문에, 원주민 여자가 실패자가 되나요? 백인 남자가 강간했기 때문에, 백인 남자가 승리자가 되나요? 강간이 승리와 실패가 되나요? 만약 피해자가 실패자라면, 만약 이 논리가 옳다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성 폭행 피해자들은 실패자들이 될 겁니다. 성 폭행 피해자들이 실패자들이기 때문에, 실패자들로서 그들은 명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강간 피해자들은 입 닥치고 찌그러져야 합니다. 하지만 강간 피해자들이 정말 입 닥치고 찌그러져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1986년 <버드 위크>부터 2013년 <쉘터>까지,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와 먹고 사는 문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와 먹고 사는 문제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와 <클라우드펑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고 삽니다. 자연 환경이 사라진 이후, 먹고 살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획일화 농업을 비판하고 모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플랜테이션 같은 자본주의 농업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서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들이 보여준 것처럼, 모성 사회들은 민영화,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성 사회는 공유 사회입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한 대안은 공유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공유 사회에 반대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은 비참하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배달 업무들은 늘어났고, 배달 노동자들은 커다란 사고들에 부딪힙니다. 언론 매체들은 국가 정부가 코로나 19 사태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호평하나,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착취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착취를 막기 위한 대안은 공유 사회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공유 사회에 반대하고 민영화, 사유화를 떠받듭니다. 심지어 얄팍한 진보들과 자칭 페미니스트들조차 민영화, 사유화를 신주 단지처럼 떠받듭니다. 이미 20세기 초반 서구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진보 지식인이 서구 제국주의를 편들었기 때문에, 여전히 얄팍한 진보들은 서구 제국주의, 민영화, 사유화를 떠받듭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악의 평범성을 외치고 자유 민주주의 범죄를 은폐합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전체주의를 외치고 자유 민주주의 범죄를 은폐합니다. 이 상황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진보, 근대화, 문명, 좋은 것이 됩니다. 끔찍한 식민지 수탈은 좋은 것이 됩니다.
비록 제3세계가 대대적인 전염병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해도, 식민지 수탈과 서구 제국주의는 진보가 됩니다. 얄팍한 진보들이 오직 홍콩 민주화만 부르짖는 동안, 얄팍한 진보들은 얼마나 자유 민주주의가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렀는지 간과합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피해자가 실패자라고 주장합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강간 피해자들이 실패자들이고 강간 범죄자들이 승리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자들이 실패자이기 때문에, 얄팍한 진보들은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얄팍한 진보들은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너무 악랄한 독재, 너무 악랄한 세뇌입니다.
반면, <버드 위크>와 <쉘터>는 자유 민주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태계 시뮬레이션으로서 <버드 위크>와 <쉘터>는 자연 생태계와 먹고 사는 문제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줍니다. 자유 민주주의 타령보다 <버드 위크>와 <쉘터>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훨씬 낫습니다. 이 기준에서 <버드 위크>와 <쉘터>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클라우드펑크>와 <식물 아내>와 <레우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반다나 시바 역시 여기에 동의할지 모릅니다.
※ 게임 <쉘터> 스크린샷 출처: mari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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