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자연'이라는 아주 드넓은 범주 본문
위 동영상은 뉴질랜드 겨울 풍경을 보여줍니다. 아오라키 마운트 쿡부터 캔터베리 언덕까지, 동영상은 장대한 자연 풍경들을 선사합니다. '장대하다'는 감탄사는 이런 동영상과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하얗게 눈을 얹은 설산부터 물줄기들이 흘러내리는 산비탈, 하얗고 차갑고 드넓은 담수, 울창한 녹색 삼림, 높다란 벼랑과 시원하고 세찬 폭포, 파도들이 포말들을 일으키는 해안, 넓고 넓은 평원, 신비로운 베일 같은 안개, 대륙 너머 바다까지, 뉴질랜드 겨울 풍경들은 압도적인 장대함을 선사합니다. 이런 압도적인 감성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게 '大'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대자연을 말할 겁니다.
물론 우리가 '자연'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언제나 '자연'은 똑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무엇이 '자연'인가요? 위 뉴질랜드 겨울 동영상에는 산꼭대기와 산비탈과 높다란 벼랑과 해안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입니다.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은 산꼭대기와 산비탈과 높다란 벼랑과 해안이 자연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하지만 자연은 생명체를 낳습니다. 자연은 풍성하고 풍요롭니다. 풍성한 자연에는 먹거리가 있습니다. 나무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 때, 사람들은 자연이 풍성하다고 감탄합니다. 자연은 생명체를 낳고 먹입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겨울 동영상 속에 풍성한 먹거리가 있나요?
하얗게 눈을 얹은 설산이 생물 다양성인가요? 높다란 벼랑이 배부른 먹거리인가요? 신비로운 베일 같은 안개가 생명체를 낳나요? 아니, 설산은 생물 다양성이 아니고, 높다란 벼랑은 풍요로운 먹거리가 아닙니다. 신비로운 안개는 생명체를 낳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과 배부른 먹거리를 보기 원한다면, 위 동영상보다 주말 농장은 훨씬 나을 겁니다. 아무리 위 동영상이 장대한 풍경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주말 농장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작물들은 '풍성한 먹거리로서 자연'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겨울 동영상과 달리, 주말 농장은 장대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장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에 수식어 '大'를 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워크래프트 III>에서 드라이어드가 "아~, 그뤠잇 아웃도어!"를 외치는 것처럼, 자연은 그뤠잇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말 농장이 규모를 자랑한다고 해도, 주말 농장은 대자연, 그뤠잇 아웃도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농장은 아웃도어가 아닙니다. 물줄기들이 흘러내리는 산비탈은 단어 아웃도어에 어울리나, 주말 농장과 단어 아웃도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웃도어 의류 광고에서 주말 농장은 배경 무대가 되지 못합니다. 주말 농장과 달리, 물줄기들이 흘러내리는 산비탈은 훌륭한 광고 배경입니다.
뉴질랜드 겨울 동영상이 디스커버리 같은 아웃도어 의류 광고라고 해도, 이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종종 의류 광고들은 장대한 자연 풍경, 대자연을 보여줍니다. 대자연 속에서 아웃도어 의류는 탐험가를 보호합니다. 하얗게 눈을 얹은 산꼭대기에서 두툼하고 비싼 아웃도어 의류는 탐험가를 따뜻하게 보호합니다. 하얗게 눈을 얹은 산꼭대기는 장대한 자연 풍경, 대자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풍경이 대자연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대자연, 하얗게 눈을 얹은 산꼭대기는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 배부른 먹거리를 선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자연은 먹거리로서 자연이 아닙니다.
하얗게 눈을 얹은 산꼭대기가 풍성한 먹거리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산꼭대기를 대자연이라고 부릅니다. 산꼭대기는 그뤠잇 아웃도어가 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연이 풍성한 먹거리라고 말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처럼, 자연은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를 먹입니다. 그래서 주말 농장에서 다양하고 풍요로운 작물들은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주말 농장과 수식어 '大'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드라이어드가 주말 농장을 향해 "아~, 그뤠잇 아웃도어!"라고 감탄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말 농장은 자연, 생명력, 번성이 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장대한 설산과 풍성한 주말 농장이 똑같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언제나 '자연'은 오직 한 가지 의미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도 '자연'은 오직 한 가지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자연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을 과장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서 '자연'은 훨씬 많은 의미들이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개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답답하고 폐쇄적인 것은 자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속의 바이오 돔이 자연이 아닌가요? 바이오 돔은 폐쇄 인공 생태계입니다. 아무리 바이오 돔이 넓다고 해도, 바이오 돔은 폐쇄적입니다.
만약 답답하고 폐쇄적인 것이 자연이 되지 못한다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속의 바이오 돔이 자연이 아닌가요? 바이오 돔이 폐쇄 인공 생태계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이 자연이 되지 못하나요? 바이오 돔은 비단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인공적입니다. 바이오 돔은 비단 폐쇄 생태계일 뿐만 아니라 인공 생태계입니다. 하지만 자연과 인공은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인공적이지 않은 것을 가리킬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이라는 수식어를 이용합니다. 성형 수술을 비난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자연 미인을 운운합니다. 여기에서 자연(태생)과 인공(수술)은 대립하나, 바이오 돔은 인공 자연, 인공 생태계입니다.
인공 생태계가 자연이 될 수 있나요? 만약 자연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면, 바이오 돔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바이오 돔이 인공적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이 자연이 되지 못하나요? 만약 우주선 승무원이 바이오 돔을 향해 감탄사를 외친다면, 이게 엉터리 감탄사인가요? 만약 폐쇄 인공 생태계가 원활하게 순환한다면, 인공 생태계 덕분에, 우주선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건강한 폐쇄 인공 생태계 덕분에, 나중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주선 승무원은 바이오 돔을 향해 감탄사를 날릴지 모릅니다. 이런 감탄사가 착각, 오류인가요?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장거리 세대 우주선이라면, 평생 동안 어떤 우주선 승무원들은 행성 풍경을 직접 구경하지 못할 겁니다. 세대 우주선이 외계 행성에 도착할 때까지, 만약 우주 항해 시간이 몇 백 년을 요구한다면, 평생 동안 우주선에서 어떤 승무원들은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승무원들은 행성 풍경을 직접 구경하지 못합니다. 이런 승무원들은 오직 바이오 돔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승무원들에게 진정한 자연은 행성 풍경보다 바이오 돔일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오 돔이 '자연'이 되나요? 우리가 장거리 세대 우주선 승무원들이 자연을 착각한다고 비판하고 지적할 수 있나요?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외계 행성에 도착한다면, 우주선 승무원들은 불모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할 겁니다. 불모지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바이오 돔이 있을 겁니다. 우주선 개척 과학자들은 바이오 돔을 연구하고, 응용하고, 퍼뜨리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테라포밍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닙니다. 테라포밍, 행성 공학은 인공적입니다. 어쩌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합성 미생물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불모지 행성에서 생명체들을 퍼뜨리고 기초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개척 과학자들은 합성 미생물들을 퍼뜨릴지 모릅니다.
만약 합성 미생물들이 기초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고, 이런 생태계 기반에서 훨씬 복잡한 생물 다양성이 성공적으로 상호 작용한다면, 이게 '자연'이 되나요? 합성 미생물 생태계는 인공적입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합성 미생물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외계 행성 테라포밍 역시 인공적입니다. 인공적인 것은 자연이 아닙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 행성 생태계 공학은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외계 행성에서 새로운 자연 생태계가 풍요로운 장면을 연출한다고 해도, 이건 진정한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들이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자연이 아닙니다.
우주 곳곳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들이 어머니 행성들, 살아있는 행성들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진정한 어머니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원초적입니다. 어머니가 생명체를 낳기 때문에, 아기(생명체)보다 어머니는 원초적입니다. 반면, 테라포밍은 인공적이고 후천적입니다. 외계 행성이 불모지라고 해도, 개척 과학자들(인간)은 새로운 생태계를 직접 조성합니다. 지구에서 인간보다 자연은 원초적이나, 개척 행성에서 자연보다 인간은 원초적입니다. 어머니보다 아기가 원초적이지 않은 것처럼, 자연보다 인간은 원초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개척 행성은 어머니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SF 소설이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보여준다고 해도, SF 독자는 "아니야! 이건 어머니 자연이 아니야!"라고 부정할지 모릅니다. 개척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을 조성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버리고, 생태 공동체를 이룩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개척 행성은 어머니 자연이 되지 못해! 어머니 자연은 원초적이어야 해! 개척 행성은 인공적이야!"라고 외칠지 모릅니다. 이런 외침이 타당한가요? 행성 생태계 공학이 새로운 어머니 자연을 조성하지 못하나요?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들이 개척 행성들을 늘린다면, 뭐라고 우리가 개척 행성들을 부를 수 있나요? 소녀 자연?
지구가 어머니 자연이기 때문에, 개척 행성이 소녀 자연, 딸 자연이 되나요? 어떤 SF 독자들은 소녀 자연, 딸 자연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용어가 타당한가요? 개척 행성이 거대하고 웅장하기 때문에, 개척 행성과 소녀 자연은 어울리지 않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작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소녀 자연이 되는지 모릅니다. 만약 우주선 승무원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소녀 자연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용어가 타당한가요,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엉터리인가요? SF 독자가 우주선 승무원들에게 동의해야 하나요, 아니면 반대해야 하나요?
'어머니 자연'이라는 용어에도 너무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이런 장면이 풍요롭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의미로서 여자와 자연을 연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가장 지배적인 사회 구조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가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으로 옳다고 세뇌합니다. 하지만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여자(의 육체)를 왜곡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를 차별하고 왜곡해야 합니다.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 소외된 존재가 됩니다. 엄마는 여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자연' 개념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가부장 제도 속에서 사람들이 어머니 자연을 운운하고 여자와 자연을 왜곡하지 않나요? 이른바 2세대 페미니즘은 여신과 자연을 신나게 연결했으나, 캐롤린 머천트는 이게 위험한 작업인지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캐롤린 머천트를 비롯해) 여러 페미니즘 지식인들이 경고하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은 너무 억압적인 용어인지 모르고, 어머니 자연이 억압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소녀 자연 역시 타당한 용어가 아닌지 모릅니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언제나 '자연'은 오직 한 가지 의미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다양하게 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 비일상적인 자연이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을 훨씬 다양하게 말합니다. 자연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뉴질랜드 겨울 풍경이 자연이라고 느낄지 모르고, 누군가는 주말 농장이 자연이라고 느낄지 모르고, 누군가는 바이오 돔이 자연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SF 독자는 개척 행성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부르거나 부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SF 독자는 사이언스 픽션을 읽고 훨씬 다양한 '자연'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자연'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자연이라고 해도, 이건 그저 기호학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물줄기들이 흘러내리는 산비탈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외계 개척 행성이 어머니 자연이 되거나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의미 부여, 기호학, 해석학에 가까울 뿐입니다. SF 독자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소녀 자연에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건 그저 의미 부여, 기호학, 해석학에 가까울 뿐입니다. 문제는 생물 다양성이 심각한 위기에 부딪혔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의미 부여가 아니고, 기호학이 아니고, 해석학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윤을 끝없이 축적하고 매출을 끝없이 올리기 위해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소녀 자연은 의미 부여이나, 대대적인 생물 다양성 감소는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들이 없습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사라진다면, 배부르게 먹고 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겁니다. 빈곤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빈곤해집니다. 이건 기호학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 너무 심각한 현실입니다. 동영상 속에서 물줄기들이 흘러내리는 산비탈은 정말 장대하고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의 전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