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빼앗긴 자들>의 여자 주인공 본문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뭘까요. 저는 주인공 쉐백이 술에 취하고 쓰러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서 쉐백이 가장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은 이른바 필름이 끊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쉐백은 수많은 감성들을 느끼나, 필름이 끊어졌을 때, 쉐백은 아예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소설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당신들에게는 벽이 있어!"라는 대사 역시 핵심적이라고 생각해요. 필름이 끊어지기 전에 쉐백은 어떤 여자와 만납니다. 사실 그 여자와 만나지 않았다면, 쉐백은 술에 취하지 않고 필름이 끊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여자였죠. 쉐백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남자였고, 이런 구도는 꽤나 대립적입니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여자.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남자. 모순적이게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여자는 엄청난 차별에 시달리고,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남자는 여자와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참고로 사회주의 공동체는 국가가 아닙니다.) 만약 서로 성별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남자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여자를 만났다면? 아마 남자는 여자를 노골적으로 푸대접하거나 무시했을 겁니다. 사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쉐백은 여러 성 차별들을 겪습니다. 쉐백이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성 차별적인 발언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쉐백이 성 차별적인 발언에 동감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쉐백은 그런 발언들을 지적했고, 남자들은 당황합니다. 만약 쉐백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상황은 훨씬 골 때렸을 겁니다. 저는 어슐라 르 귄이 여자 주인공을 썼다면, <빼앗긴 자들>이 훨씬 파격적인 소설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 주인공 쉐백은 근시안적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급진적인 페미니즘조차 성 평등 운동이 정체성에 주력하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운동을 안락한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런 안락한 성 평등 운동은 정체성이 만사를 해결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운동은 계속 정체성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각하기 바라죠. 하지만 안락한 페미니즘은 금방 한계에 부딪힙니다. 안락한 페미니즘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교들과 방송들과 광고들이 모두 성 평등을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벨 훅스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도 학교들과 방송들과 광고들은 계속 성 평등을 주장해야 합니다. 그건 별로 과도한 조치가 아닐 겁니다. 성 폭행이나 강간은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너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한 계몽은 성 폭행을 없애지 못합니다. 현대 사회는 성 폭행과 강간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따라서 그런 착각이 가루가 될 때까지 학교들과 방송들과 광고들은 두들기고 때려야 합니다.
문제는 학교들과 방송들은 만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학교들과 방송들을 장악했을까요. 자본주의 기득권들입니다. 학교들과 방송들은 열심히 자본주의를 빨아줍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들을 늘어놓고, 방송들은 광고 수입에 열을 올리죠. 공익 광고들은 자본주의가 해가 되는 내용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학교와 방송과 광고가 성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어림도 없는 기대입니다.
게다가 정말 성 폭행을 추방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야만 합니다. 지금처럼 사회 구조를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성 폭행을 줄이거나 내쫓지 못할 겁니다. 성 폭행을 쫓아내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정체성만 강조해야 할까요. 아니죠.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밑부분에서 윗대가리까지, 우리는 사회 구조를 뜯어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기득권들은 사회 구조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를 버리고 싶어하지 않고, 학교들과 방송들과 광고들이 계속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찬양하기 바래요. 그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따라서 자본주의는 성 평등 운동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입니다. 성 폭행을 없애고 싶다면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하나, 자본주의는 그걸 가로막습니다. 성 평등 운동은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그저 나쁜 상업성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는 가장 강력한 구조입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성 평등 역시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성 평등 운동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인터넷에는 이른바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장면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정체성 문제를 열심히 떠드나, 자본주의를 입에 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기득권이 학교와 방송과 광고를 장악했음에도, 성 평등 운동이 그것들을 되찾아야 함에도,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거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안락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너무 편안한 사상이죠.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회 구조를 바꾸는 방법은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 줘야 한다고 주장한 블라디미르 레닌조차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연안 문예 강화를 주장했으나, 엘리트 권력을 제대로 해체하지 못했어요. 만약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혁명의 불꽃은 금방 꺼질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할 겁니다. 권력을 자잘하게 나누는 것. 그게 진짜 변혁이기 때문입니다. 소수 권력자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움켜진 상황에서 변혁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안락한 페미니즘이 이런 변혁을 바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안락한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있는 소설입니다. 성 폭행을 쫓아내고 싶다면, 빼앗긴 자들처럼 우리는 소유 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여자 주인공을 집어넣고 자본주의와 성 차별을 더욱 강조했다면, <빼앗긴 자들>은 훨씬 파격적인 소설이 되었을 겁니다. 저는 그게 꽤나 아쉽군요. <빼앗긴 자들>이 더욱 파격적으로 나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