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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소설 <듄>과 영화 <아바타>에서 어머니 자연 본문

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소설 <듄>과 영화 <아바타>에서 어머니 자연

OneTiger 2019. 3. 17. 17:50

[이런 풍요로운 생태계는 어머니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사막 행성은 어떨까요.]

 

 

"여자는 그대의 밭이다. 이제 그대의 밭으로 가서 경작하라." 이건 이슬람 학술 고전 <키탑 알 이바르>에 있는 문구입니다. 소설 <듄>은 <키탑 알 이바르>를 인용합니다. 아라키스 사막 원주민 프레멘들은 <키탑 알 이바르> 같은 책을 읽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건 이븐 할둔이 쓴 <키탑 알 이바르>가 아니라 프랭크 허버트가 창작한 가상의 서적인지 모릅니다.

 

이 <키탑 알 이바르>가 무엇이든, 프레멘 여자와 남자가 결혼한 이후,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때, 남자는 저 문구를 읊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밭입니다. 남자는 밭을 경작합니다. 이건 남자가 여자에게 정자를 제공한다는 뜻일 겁니다. 남자가 밭을 경작한 이후, 밭은 수확물을 내놓습니다. 수확물은 아이입니다. 이렇게 여자는 밭이 되고, 남자는 밭을 경작하고, 수확물은 아이가 됩니다. 이런 비유는 오직 <키탑 알 이바르>의 전유물이 아닐 겁니다.

 

수많은 장소들에서 여러 문화들은 여자를 밭, 대지, 자연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고대 동양 철학에서도 여자는 대지, 남자는 하늘입니다. 하늘이 비를 부릴 때, 대지는 새싹을 틔웁니다. 하늘과 비는 남자와 정자를 가리킬 겁니다. 대지와 새싹은 여자와 아이를 가리킬 겁니다. 여자는 아이를 생산합니다. 여자처럼 자연은 생산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에게서 식량을 얻습니다. 식물들이 쑥쑥 자라고 울창해질 때,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명력을 느낍니다.

 

 

여자는 생산적이고, 자연 역시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여자와 자연은 닮았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들은 어머니 자연을 말했습니다. 이런 여러 문화들처럼, 프레멘 원주민들이 어머니 자연을 말하나요? 아라키스 행성 프레멘들이 어머니 자연을 믿나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설 <듄>에는 부록들이 있고, 부록들 중에서 하나는 아라키스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 부록은 어머니 자연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라키스 프레멘들은 샤이 훌루드, 거대한 창조자를 믿습니다.

 

거대 괴수 모래벌레가 최상위 포식자(알파 프레데터)이기 때문에, 모래벌레는 프레멘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수시로 사람들이 100m짜리 거대 괴수들과 마주쳐야 한다면, 거대 괴수들은 사람들의 관념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겁니다. 프레멘들은 모래벌레들을 숭배하고, 샤이 훌루드는 이런 결과입니다. 반면, 어머니 자연은 희미합니다. 분명히 프레멘 문화에는 주술사 대모가 있고, 부족장처럼 주술사 대모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프레멘들은 어머니 자연을 운운하지 않습니다.

 

프레멘 문화에는 어머니 자연과 비슷한 뭔가가 없습니다. 어쩌면 아라키스 행성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어머니 자연을 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머니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사람들은 싱그러운 녹색 숲을 의인화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의인화한 녹색 숲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보세요. 이 애니메이션에는 테 피티가 있습니다. 테 피티는 대지모신, 자연의 여신, 어머니 자연입니다. 그리고 테 피티는 의인화한 녹색 자연입니다.

 

 

어머니 자연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의인화한 녹색 자연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하지만 아라키스 행성은 모래 사막 행성입니다. 여기에는 녹색 숲이 없습니다. 사방은 그저 노란 모래 사막에 불과합니다. 물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함부로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지 못합니다. 물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거친 모래들로 목욕합니다.

 

프레멘들은 익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물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인간이 물에 빠져 죽는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프레멘들에게 물귀신은 꽤나 공허한 개념일 겁니다. 프레멘 문화는 익사를 알지 못하고, 당연히 프레멘 문화에는 물귀신이 없을 겁니다. 어머니 자연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테 피티는 싱그러운 녹색 식물들을 보여주나, 프레멘들은 울창한 녹색 숲을 본 적이 없습니다.

 

폴 무앗딥이 행성 공학을 시도하기 전에, 프레멘들에게 울창한 녹색 숲은 그저 미래 전망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척박한 자연 환경에서 사막 사람들이 어머니 자연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까요? 사막 행성 사람들이 어머니 자연을 머릿속에 떠올린다고 해도, 그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어머니 자연과 다를 겁니다. 프레멘들은 자연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라키스 행성에는 자연 생태계가 있고, 프레멘들 역시 자연 생태계를 관찰합니다. 하지만 사막 행성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이게 풍요롭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풍요로운 자연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어머니 자연을 연상하지 못할 겁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한 <아바타>는 <듄>과 꽤나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외계 행성 원주민들을 말하고,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자연 생태계를 중시하고, 식민지 수탈을 질타합니다.

 

소설 <듄>과 영화 <아바타>에는 모두 행성 생태학자가 있고, 양쪽 행성 생태학자는 양쪽 주인공의 멘토가 됩니다. 당연히 양쪽 행성 생태학자와 양쪽 주인공은 외부인입니다. 양쪽 주인공이 사나운 야생 동물(모래벌레와 토루크)에 탑승할 때, 원주민들은 양쪽 주인공을 지도자(전설적인 샌드 라이더와 토루크 막토)로 인정합니다. 양쪽 주인공은 양쪽 부족장의 양쪽 딸과 사랑에 빠지고 부족 지도자가 됩니다. 영화 <아바타>가 개봉했을 때, SF 독자들은 이런 공통점들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듄>의 아라키스 행성과 달리, 영화 <아바타> 속의 판도라 위성에는 어머니 자연이 있습니다. 행성 원주민들은 어머니 자연을 숭배합니다. 판도라 위성에는 엄청나게 울창하고 거대한 열대 밀림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원주민들은 쉽게 어머니 자연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라키스 행성에는 거대한 열대 밀림 따위가 없습니다. 심지어 녹색 새싹조차 구경하기가 힘듭니다. 어쩌면 녹색 새싹보다 멜란지 스파이스는 훨씬 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프레멘들은 어머니 자연을 말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테 피티처럼, 사람들은 어머니 자연이 녹색 숲이라고 생각하나, 아라키스 행성에는 울창한 숲이 없어요.]

 

 

게다가 프레멘 사회는 꽤나 가부장적입니다. 프레멘 사회는 남자를 우대합니다. "여자는 그대의 밭이다. 이제 그대의 밭으로 가서 경작하라." 이렇게 <키탑 알 이바르>는 말합니다. 이건 남자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 문구에서 '그대'는 남자입니다. 여자는 밭입니다. 밭이 경작을 기다리는 것처럼, 여자는 경작을 기다립니다. 남자는 밭(여자)에 씨앗(정자)을 뿌리고 수확물(아이)을 얻습니다. 그래서 프레멘 여자는 "나는 그대 아이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구에서 생산자는 남자입니다. 생산의 주체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고대부터 수많은 여자들은 생산자가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산의 주체는 여자입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그래서 여자는 생산적입니다. 여자는 생산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여자들은 피임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식량 생산보다 인구가 늘어날 때, 여자들은 피임했고 인구를 조절했습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그저 아이들만 낳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채집과 농사를 맡았습니다. 여자들은 정말 대지와 밀접했습니다.

 

남자 사냥꾼들이 위험한 사냥을 감당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귀환할 때, 여자 채집꾼들과 여자 농민들은 남자 사냥꾼들을 먹였습니다. 사냥을 떠나기 위해, 남자 사냥꾼들은 여자 채집꾼들의 식량들을 가져가야 했습니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남자 사냥꾼들은 공동체를 쉽게 먹여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누이트 문화 같은 극단적인 문화 이외에 여러 지역들에서 여자 채집꾼들과 여자 농민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전통적인 농업 사회 이후, 가부장 문화는 훨씬 발달하고 여자들을 육아와 살림으로 밀어넣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농업 사회 이후에도 여자들은 꾸준히 아이들과 식량들을 생산했습니다. 심지어 노예 여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중국 인민 공사는 아예 공개적으로 성 차별을 없애기 원했고, 수많은 여자들은 생산자들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지역들에서 여자들은 아이들과 식량들을 함께 생산합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오직 아이들과 작물들만 생산하지 않습니다. 여자(어머니)들은 모유를 생산합니다. 여자는 젖을 생산하고, 젖은 가장 기초적인 식량입니다. 과일, 생선, 곡물, 야채, 고기를 먹기 전에, 아기는 모유를 먹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는 정말 가장 기초적인 식량 생산자입니다. 여자와 대지, 어머니 자연은 그저 비유에 불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작물을 수확할 때, 여자들은 정말 자신들이 풍만하고 생산적인 자연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키탑 알 이바르>는 여자가 밭이고 남자가 농민이라고 말했으나, 판도라 위성 나비 부족민들에게 이건 잘못된 비유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라키스 행성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키탑 알 이바르>를 인용하고 남자를 농민이라고 비유했을지 모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판도라 위성 원주민 나비들은 다르게 말할 겁니다. 생태 환경이 달라질 때, 이건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신앙 역시 바뀔 겁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들은 인간형 외계인입니다. 나비 여자는 인간 여자와 비슷합니다. 나비 여자에게는 두 젖가슴이 있습니다. 나비 여자 역시 모유를 생산할 겁니다. 나비 여자가 젖을 먹일 때, 나비 여자는 자신이 가장 기초적인 식량 생산자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나비 여자가 젖을 먹일 때, 나비 여자는 어머니 자연을 생생하게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수유와 어머니 자연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지구 여자들은 진짜 어머니 자연을 숭배하지 못하나, 지구 여자들 역시 젖을 먹일 수 있고 자신이 가장 기초적인 식량 생산자라고 느낄 수 있겠죠. 물론 여자는 혼자 아이를 낳지 못하고 혼자 젖을 먹이지 못합니다. 남자가 정자를 제공할 때,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일 수 있어요. 여자와 자연을 연결할 때, 흔히 에코 페미니즘은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오직 여자만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몸으로 생산하는 주체는 여자입니다. 남자에게는 젖가슴이 없고, 여자에게는 크고 부푼 젖가슴이 있습니다. 여자는 (문자 그대로) 몸으로 아이를 먹이고 풍요로운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자는 '몸으로' 비단 아이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수유는 정말 독특하고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에서 육아와 수유는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노동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노동을 무시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가 되어야 하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들은 그저 파편적이고 보조적인 스트레스에 불과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너무 폭력적이고 지배적이기 때문에, 에코 페미니즘이 남자와 정자를 간과한다고 해도, 이런 오류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가부장 문화가 오직 득실거리는 남정네들만 강조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에코 페미니즘은 훨씬 많이 여자와 자연을 강조해야 할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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