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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OneTiger 2017. 10. 28. 20:00

머피의 법칙은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엎친 데 덮쳤다고 표현하죠.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비가 후두둑 쏟아지고, 옷이 모두 젖고, 도로는 막히고, 아까운 하루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가을 소풍을 바란 사람은 머피의 법칙이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런 사람들은 재수가 없다거나 운이 나빴다고 말할 겁니다. 맞아요. 우리는 이런 현상을 그저 우연으로 돌리곤 합니다.


사실 우연이 맞죠. 먹구름들은 가을 소풍을 바라는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먹구름들은 그저 자연적인 현상이죠.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가 꾸민 음모라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누군가가 치밀하고 거대한 음모를 꾸몄다면? 특정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누군가가 먹구름들을 부르고, 차가운 바람을 불고, 소나기를 뿌린다면? 이건 꽤나 재미있는 한편, 끔찍한 상상입니다. 날씨를 바꿀 만큼 강력한 누군가가 무슨 이유로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기 원할까요? 만약 그렇게 짓궂은 존재가 사람들을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면, 사람들은 그 존재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은 이런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레닌그라드에 사는 어느 천문학자입니다. 어느 날, 이 학자는 문득 굉장한 가설을 떠올리고, 그 가설을 계산하느라 모든 것을 잊습니다. 어쩌면 이 가설은 소설 주인공을 위대한 발견으로 이끌지 모르고, 천문학자는 대가들 사이에서 영원히 명예를 누릴지 모릅니다. 그만큼 혁신적인 가설이었어요. 하지만 천문학자가 계산에 집중하려는 순간, 엎친 데 덮친 것처럼 여러 사건들이 줄줄이 발생합니다.


불행한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천문학자는 레닌그라드에 거주하나, 희한하게 날씨가 엄청나게 덥습니다. 언론은 거의 2백 년만에 찾아온 무더위라고 떠듭니다. 낯선 손님들은 연이어 찾아오고, 이웃짚 아저씨는 골 때리는 소리를 지껄이고, 심지어 보안청이 소설 주인공을 취조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설을 계산해야 하나, 천문학자는 계산에 집중할 여유가 없어요. 천문학자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짐작과 달리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천문학자를 곤경에 빠뜨리기 원한다면?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은 비단 천문학자만 덮치지 않았습니다. 천문학자의 동료들, 다른 지식인들이나 학자들도 비슷한 봉변을 당했죠. 결국 생물학자, 물리학자, 역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등등 지식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논의합니다. 덕분에 <세상이 10억 년>은 꽤나 학술적인 소설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은 좁은 집구석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방 안에서 열심히 떠들기 바쁘고, 그런 고민과 사유와 토론과 말싸움은 대부분 내용을 차지합니다.


이런 소설을 <별의 계승자> 같은 학술 SF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학자들이 열심히 토론한다고 해도 <세상이 10억 년>은 그리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제임스 호건과 달리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펼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런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사건에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출발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소설은 시종일관 풍자와 해학과 우스갯소리를 일삼습니다. 하지만 그런 풍자와 해학과 우스갯소리 너머 뭔가가 존재합니다. 학자들은 치열한 고민과 토론과 말싸움 끝에 그 존재를 밝히기 원합니다.



독자 역시 학자들을 따라가고, 점차 그 존재에게 접근합니다. 이런 과정은 <세상이 10억 년>이 선보이는 가장 큰 재미일 겁니다. 그리 학구적이지 않다고 해도 전문가들의 토론은 사회와 국가와 문명을 넘고, 마침내 자연과 우주에 다다릅니다. 학자들은 우주를 깊이 고찰하고, 인류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뭔가가 있음을 추측합니다. 학자들의 토론은 우스꽝스러운 우연들에서 출발했으나, 자연과 우주를 훌쩍 뛰어넘고, 그들의 사유는 끝을 알지 못하도록 거대해집니다. 비록 이 소설은 어느 천문학자의 집구석이라는 좁은 무대만 보여주나, 실질적인 설정은 그보다 훨씬 방대합니다.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마저 그런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학자들은 어떤 거대한 뭔가가 인류가 인식하는 장벽 뒤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나, 어떻게 그런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뭔가는 인류를 아득히 앞지르기 때문에 인류는 단순한 언어들과 개념들로 그것을 감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어설픈 비유만 동원할 뿐입니다. 비록 모든 것은 말, 말, 말일 뿐이고 이 소설에 우주선은 등장하지 않으나, 독자는 우주선을 타고 무한한 차원을 여행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학자들의 토론 속에서 독자는 우주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그리 유쾌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방대한 세계를 여행한다고 해도 그 세계가 여행자를 압도적으로 공격한다면, 여행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 학자들은 무궁무진한 존재와 개념을 가정하나, 그 무궁무진한 존재와 개념은 인류에게 적대적일지 모릅니다. 적어도 천문학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그들이 옳을까요? 이 천문, 수학, 생물, 역사, 물리학자들이 제대로 추측했을까요? 소설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개인들이 해석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넓고 복잡합니다.


그들은 최대한 머리를 굴리나, 일개 개인은 방대한 우주를 꿰뚫지 못합니다. 어쩌면 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학자들이 헛다리를 짚었는지 모르죠. 문제는 아무리 학자들이 고민한다고 해도 개인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학자들은 최신 컴퓨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개미들인지 모릅니다. 그 무지막지한 존재와 개념 앞에서 학자들은 개미들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개미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최신 컴퓨터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죠. 그저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부분만 인식할 뿐입니다.



인류는 태생적인 감각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 수 있으나,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인 만큼 그 도구들 역시 불완전할 겁니다. 그 도구들은 우리를 더욱 머나먼 세계로 안내할 수 있겠으나, 결국 우리는 장벽에 부딪히겠죠. 아마 절대 넘지 못할 다른 장벽이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에게서 벗어난다면, 그런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저 장벽 너머를 추측해야 할 겁니다. 뭐, 이런 상황은 서글프나, 그리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장벽 너머에서 이해하지 못할 존재가 넘어온다면? 그런 존재가 우리들을 공격한다면? 인류는 공격을 받는 중임에도 방어는 고사하고 공격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학자들이 이런 상황을 깨닫는 순간, 소설은 슬슬 암울하고 위압적인 불가향력을 논합니다. 현실은 비참하고 끔찍하나, 가시적인 공포는 없습니다. 거대 괴수가 도시에 나타나고 사람들을 짓밟는다면, 오히려 그게 나을 겁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뭐가 자신을 공격하는지 볼 수 있죠.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공격한다면, 사람들은 인식의 한계 속에서 쓰러져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죠.



우주를 바라볼 때, SF 작가들은 각자 다르게 반응할 겁니다. 어떤 작가는 광대한 공간을 찬양하고, 수많은 행성들을 경외적으로 노래할 겁니다. 어떤 작가는 그게 무섭다고 말할 겁니다. 그래서 온갖 우주 괴수들을 창작할지 모릅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을 이용해 후자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형체가 뚜렷한 외계 괴수 따위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괴수가 덮쳤다면, 학자들은 환호했을 겁니다. 적어도 그들은 외계 괴수를 보고 만질 수 있겠죠.


하지만 학자들은 장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다고 해도 절대 전체 모습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저 코나 귀나 꼬리를 만질 뿐이죠.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겠죠. 장님들은 코끼리가 뱀과 비슷한 동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길다란 코만 만진다면, 코끼리가 뱀으로 보이겠죠. 만약 코끼리가 상아로 장님들을 찌르거나 다리로 장님들을 짓밟는다면, 장님들은 누가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코끼리가 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건 그들의 한계입니다. 장님들은 그런 한계를 넘지 못해요. 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이 우주를 가혹하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바라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소설 속에서 우주는 위대한 옛 존재들이 꿈틀거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주적 공포 소설들은 장벽 너머에 초점을 맞추고, 그 와중에 인간들은 파멸할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10억 년>은 장벽 너머보다 장벽 안쪽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장벽 너머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도 맞출 방법이 없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역시 장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학자들은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신히 깨달았습니다. 과연 그 장벽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장벽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나, 어쨌든 뭔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뭔가가 그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입니다. 저항해야 할까요? 어떻게?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어떻게 저항하죠? 아니,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를 가정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나, 어쨌든 상황은 암울합니다. 따라서 그 상황에 굴복해야 할까요?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둘로 나뉠 겁니다. 여기에서 멈추느냐, 아니면 더 앞으로 나가느냐. 하지만 그 앞에 압도적인 아가리가 있을지 몰라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살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아마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이 그저 폭력적인 소비에트 연방을 비유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건 틀린 해석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맥락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거대한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은 그저 소비에트 연방만이 아니겠죠. 고대 국가는 노예들에게 채찍질했고, 중세 국가는 왕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근대 국가는 인민들이 사회를 이루기로 계약했다고 헛소리를 남발합니다. 사실 인민들은 절대 계약한 적이 없음에도 여러 정치인들은 사회 계약론을 들먹이죠. 사회 계약론이 정당성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유를 부르짖는 나라들은 다른 약소국들을 침략하거나 양민들을 학살하곤 합니다. 비단 소비에트 연방만 문제가 아닙니다. 인민들을 세뇌하고 시야를 가리는 국가와 거대 자본 역시 문제입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마치 대단하고 고귀한 것처럼 포장하는 기득권들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소비에트 연방만 붙잡는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코끼리가 뱀이라고 생각하는 장님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사회 풍자를 넘어 이 소설은 우주를 바라보는 색안경이 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이고 막막한 우주를 바라보는 색안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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