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SF 평론에서 주제와 형식 측면 본문
[언뜻 이 그림은 우주 수경 재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이 미래 과학 상상도가 될 수 있나요?]
이 블로그에서 2019년 4월 2일 게시글(링크)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게시글은 어떻게 사람들이 폐쇄 인공 생태계를 평등하게 관리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게시글은 생태학 SF 평론에 속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바이오 돔 같은 폐쇄 인공 생태계가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게시글이 생태학 SF 평론에 정말 속할 수 있나요? 외계 행성의 바이오 돔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에서 우주 개척자들이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논의합니다.
이미 오닐 원통과 버블 월드와 거대 우주 정거장은 드문 논의가 아닙니다. 1960년대에 철학자이자 공학자 파울로 솔레리는 아스테로모(Asteromo)라는 어마어마한 우주 주거 공간을 상상했습니다. 아스테로모는 직경 10km짜리 소행성 도시입니다. 길다란 튜브 터널은 지구와 소행성 도시를 연결합니다. 이런 소행성 도시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미래 인류 문명이 소행성 도시를 지을 수 있을까요? 만약 소행성 도시가 나타난다면, 소행성 도시 안에는 인공 생태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거주지 직경이 10km이기 때문에, 거주지 안에서 방대한 자연 생태계는 원활하게 순환할 겁니다.
이건 SF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우주 개척 사업입니다. SF 소설 작가와 우주 개척 연구원은 비슷한 주제(외계 행성의 바이오 돔)를 이야기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과 우주 개척 사업은 다릅니다. SF 소설은 문학에 속하고, 우주 개척 사업은 자연 과학에 속합니다. 양쪽은 커다란 교집합을 형성하나, 문학과 자연 과학은 다른 분야에 속합니다. 그리고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라는 게시글은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작은 어항부터 장거리 세대 우주선까지, 이 게시글은 여러 인공 생태계들을 언급하나, 이 게시글은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SF 소설 이외에 다른 SF 만화, SF 영화,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라는 게시글은 SF 장르를 언급하지 않으나, 이 게시글이 생태학 SF 평론에 속할 수 있나요? 이 게시글은 SF 소설보다 우주 개척 사업을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여러 SF 소설들이 외계 바이오 돔을 묘사한다고 해도,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라는 게시글이 SF 소설들을 직접 분석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게시글은 생태학 SF 장르보다 우주 개척 사업을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SF 팬들은 이 게시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 게시글은 생태학 SF 평론에 속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문학이기 때문에, 생태학 SF 평론은 문학적인 측면을 언급해야 합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여러 가지를 고민합니다. 소설 작가는 시점, 문체, 단락 구성, 문학 사조, 대사를 고려합니다. 만약 시점, 문체, 단락 구성, 문학 사조, 대사가 달라진다면, 독자는 다른 느낌을 받을 겁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은 다른 느낌을 풍깁니다. 건조한 문체와 화려한 미사여구는 다른 느낌을 풍깁니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작가는 많은 대사들을 넣고, 어떤 작가는 서술 문장들에 힘을 실어줍니다. 어떤 작가는 특정한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피할지 모릅니다. 종종 수구 꼴통들은 노동자라는 단어보다 근로자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수구 꼴통들이 빨간색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자보다 근로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것처럼, 언어는 이야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자지 말자."는 수업 시간에 졸지 말라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지 말자."는 남자가 성기를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끈을 둘둘 마는 것처럼, 남자가 성기를 둘둘 말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자지 말자."는 수업 시간에 졸지 말라는 경고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듣는 사람은 남자가 성기를 둘둘 만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언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나, 우주 개척 연구원은 이런 것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처럼. 마-마-마지막처럼. 마지막 밤인 것처럼. love." 이 노래 가사에서 블랙핑크 리사는 언어 유희를 구사합니다. '마지막 밤인 것처럼'에서 '럼'과 'love'가 비슷한 발음이기 때문에, 관중은 마지막 밤과 사랑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밤'과 '사랑'은 열정적이고 화끈한 섹스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전반적으로 이 노래 <마지막처럼>은 열정적이고 도발적인 연애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건 남한 표준어 유희입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한국어보다 영어라면, 리사는 언어 유희를 구사하지 못할 겁니다. "As if it's your last night. love." 이 문구가 언어 유희(비슷한 발음)를 구사하나요?
"마지막 밤인 것처럼. love."에서 '럼'과 'love'가 어울리는 것처럼, "As if it's your last night. love."에서 'night'와 'love'가 어울리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영어 문구는 언어 유희(비슷한 발음)를 구사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례처럼, 언어에는 미묘한 측면, 한계가 있습니다. SF 장르에서, 특히, SF 소설에서 이건 훨씬 심각할지 모릅니다. 예전에 2월 13일 게시글(링크)이 설명한 것처럼, 네 반지 오로진 시에나이트는 남한 속담을 구사합니다. 오로진 시에나이트는 남한을 절대 알지 못하나,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시에나이트는 남한 속담을 구사합니다. SF 장르에서 언어는 이런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게시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고 시점과 문체와 언어와 단락 구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코맥 매카시가 쓴 <로드>에는 많은 여백들이 있습니다. 소설 <로드>는 여백의 미를 살립니다. 멸망한 세상이 공허하기 때문에, 여백의 미는 고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잘 어울립니다. SF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이런 형식들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우주 개척 연구원은 이걸 고민하지 않을 겁니다. 우주 개척 사업 연구원은 그저 외계 행성에서 바이오 돔이 원활하게 순환하는지 예측할 뿐입니다.
미래학 서적들과 천문학 서적들에게도 형식은 아주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 작가와 미래학자는 형식을 다르게 고민할 겁니다. 미래학자는 미래학 서적에 문학적인 감성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래학자는 미래학 서적을 SF 소설과 합치거나 SF 소설처럼 미래학 서적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과 문학적인 미래학 서적은 다릅니다. 게시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문학적인 측면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글은 생태학 SF 소설보다 우주 개척 사업을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이 게시글의 소재는 SF 소설보다 우주 개척 사업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팬들은 이 게시글을 다른 생태학 SF 소설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록 게시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가 문학적인 측면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게시글은 생태학 SF 주제들을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글쓴이의 의도 역시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화가가 수경 재배 구역을 열심히 그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화가가 폐쇄 인공 생태계를 묘사한다고 추측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화가는 외계 개척 기지가 수경 재배 구역을 이용하고 지속 가능하게 먹고 산다고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화가는 그저 FPS 게임 배경 무대를 그릴 뿐인지 모릅니다.
<둠>과 <헤일로>, <내추럴 셀렉션>, <오버워치>, <콜 오브 듀티>, <데드 스페이스> 같은 FPS 게임들은 수경 재배 구역들, 우주 식물 재배 구역들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저 배경 무대에 불과합니다. FPS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폐쇄 인공 생태계보다 신나는 사격과 학살입니다. 다른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드벤처 게임 <스테이시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선 녹색 정원과 인공 생태계보다 포인트 & 클릭 퍼즐에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아무리 화가가 수경 재배 구역을 열심히 그린다고 해도, 이 그림은 생태학 SF 범주보다 비디오 게임 밑그림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수경 재배 구역은 사칙연산과 비슷합니다. 수학자가 방정식과 미적분을 풀기 전에, 수학자는 사칙연산을 계산해야 합니다. 방정식과 미적분보다 사칙연산은 훨씬 기초적인 계산 방법입니다. 우주 수경 재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가 풍요로운 삼림 타일과 야생 보호 구역과 식물 점수를 제시하는 것처럼, 생태학 SF 장르에게 외계 행성과 야생 보호 구역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아주 거대한 바이오 돔을 짓고,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고, 야생 보호 구역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기초 단계가 필요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거대한 바이오 돔을 짓기 전에, 개척 과학자들은 지속 가능하게 먹고 살아야 합니다. 지속 가능하게 먹고 살기 위해 개척 과학자들에게 우주 수경 재배는 필수적일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작물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런 과학자들이 거대한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나요?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기지를 짓든, 거대한 바이오 돔을 짓든, 테라포밍을 시도하든, 우주 개척 사업에서 우주 수경 재배는 기초 단계입니다. 거대한 바이오 돔은 미적분과 비슷하고, 우주 수경 재배는 사칙연산과 비슷합니다.
[아주 거대한 바이오 돔에서 이른바 해충들이 생태계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하나요? 이게 옳은가요?]
하지만 아무리 우주 수경 재배가 지속 가능하다고 해도, 우주 수경 재배보다 거대한 바이오 돔은 훨씬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이오 돔 속의 자연 생태계가 이른바 해충들을 품어야 하나요? 흔히 사람들은 해충들이 나쁘다고 간주합니다. 해충들은 부정적입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는 해충들을 배제해야 합니다. 문제는 통상적으로 자연 환경에서 해충들이 생태계 구성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비단 해충들만 아니라 기생충들 역시 생태계 구성 요소들입니다. 어쩌면 우주 어딘가에서 다른 가이아 행성들은 존재하고, 이런 가이아 행성들에서 기생충들은 진화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인류에게 오직 지구만 가이아 행성입니다. 우리는 오직 지구 자연 생태계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에서 이른바 해충들과 기생충들은 생태계 구성 요소입니다. 거대한 바이오 돔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해충들과 기생충들을 풀어놔야 할지 모릅니다. 이게 무슨 파장을 미칠까요? 일반적인 자연 생태계와 달리, 바이오 돔은 폐쇄 생태계입니다. 아무리 바이오 돔이 거대하다고 해도, 바이오 돔은 폐쇄 생태계입니다. 폐쇄 생태계에서 병충해와 기생충들이 영양분 순환에 부정적인 피해를 미치지 않을까요? 폐쇄 생태계와 열린 생태계는 다릅니다.
만약 폐쇄 생태계가 이른바 해충들을 배제한다면,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폐쇄 생태계는 다른 것들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작은 생체 로봇들을 만들고 폐쇄 생태계를 보조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개척 과학자들이 생체 로봇들을 자연 생태계 순환에 끼워넣을 수 있나요? 미래 과학자들이 생태계 구성 요소로서 생체 로봇들을 정말 만들 수 있나요? 이런 물음들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외계 행성 개척과 거대한 바이오 돔과 생체 로봇들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SF 작가들은 이게 가능하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어떤 SF 작가들은 고개들을 흔들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SF 작가들은 대답을 번복할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의 바이오 돔처럼, 소설 <붉은 화성> 3부작은 우주 개척을 묘사합니다. 바이오 돔과 화성 테라포밍과 대규모 생태계 조성은 비슷한 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 우주 개척과 새로운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 3부작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은 화성 테라포밍에 긍정적입니다. 반면, 소설 <오로라>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은 외계 행성 테라포밍에 다소 부정적입니다. 인류 문명에게는 다른 가이아 행성이 없습니다. 인류 문명에게 지구는 유일한 가이아 행성입니다. 인류 문명은 지구 환경을 아껴야 합니다. 하지만 악랄한 범죄자로서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온갖 환경 오염들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장르는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 온갖 환경 오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우주 수경 재배는 외계 행성 개척, 거대한 바이오 돔, 야생 보호 구역, 기후 변화,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우주 수경 재배를 그리는 동안, 화가는 이것들을 의식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화가는 그저 FPS 게임 배경 무대를 그렸을 뿐인지 모릅니다. 화가가 거대한 바이오 돔과 야생 보호 구역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SF 팬들이 우주 수경 재배 그림과 야생 보호 구역을 연결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화가 의도보다 장르 전형은 훨씬 거대합니다.
비록 화가가 그저 FPS 게임 배경 무대를 그렸을 뿐이라고 해도, 우주 수경 재배를 묘사하기 위해 화가는 생태학 SF 설정들을 (어느 정도) 연구했을 겁니다. 화가가 생태학 SF 설정들을 (어느 정도) 연구했기 때문에, 비록 우주 수경 재배 그림이 FPS 게임 밑그림이라고 해도, 이 그림 '배후'에는 생태학 SF 설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FPS 게임 밑그림은 거대한 바이오 돔과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개별적인 그림보다 생태학 SF 공식, 전형은 훨씬 거대합니다. 비록 화가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SF 팬들은 화가 의도보다 장르 전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라는 게시글은 어떤가요? 왜 제가 이 게시글을 썼나요? 생태학 SF 소설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니면 우주 개척 사업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 <오로라>와 비디오 게임 <서바이빙 마스> 때문에, 저는 뭔가 영감을 받았고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를 썼습니다. 제가 문학적인 측면보다 인공 생태계 관리와 사회적인 합의를 이야기하기 원했기 때문에, 저는 그저 SF 소설과 SF 게임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우주 개척 사업보다 생태학 SF 평론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우주 개척 사업보다 생태학 SF 장르 때문에, 저는 게시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게 올바른 생태학 SF 평론인가요? <오로라>는 소설이고, <서바이빙 마스>는 게임입니다. 생태학 SF 평론은 문학적인 측면, 게임적인 측면을 언급해야 합니다. 아무 형식 없이, <서바이빙 마스> 같은 SF 게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바이빙 마스>를 만들기 위해 게임 제작자들은 무슨 게임 엔진을 쓸지 고민했을 겁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게임 그래픽을 고민했을 겁니다. <서바이빙 마스>는 돔 도시를 보여줍니다. 화성 돔 도시에서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척박한 불모지 화성에서 미래 인류는 정말 돔 도시를 짓고, 나무들을 키우고, 생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돔 도시를 표현하기 위해, 돔 속의 나무들을 표현하기 위해, <서바이빙 마스>는 특정한 그림체를 동원해야 합니다. 게임 <서바이빙 마스> 속에서 특정한 그림체로서 화성과 돔 도시와 나무들은 존재합니다. <서바이빙 마스>는 화성에서 개척자들이 도시를 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은 첨단 과학 기술들을 열거하고, 이런 내용은 하드 SF 같습니다. 하드 SF 게임에는 진지하고 섬세한 그래픽이 어울릴 겁니다. 내용이 하드하기 때문에, 게임 그래픽 역시 진지해야 합니다.
만약 <서바이빙 마스>가 5살짜리 꼬마 낙서 같은 그래픽을 보여줬다면, 내용과 형식은 어울리지 않았을 테고, 게임 플레이어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반면, <림월드> 역시 외계 개척지를 보여주나, <림월드>는 훨씬 단순한 그림체를 이용합니다. <림월드>가 진지한 우주 탐사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태학 SF 장르에서 내용처럼 형식은 중요합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이런 형식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게시글은 올바른 생태학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태학 SF 평론으로서 이 게시글에 아무 가치가 없나요?
만약 이 게시글이 문학적인 측면들을 언급한다면, 이 게시글은 소설 <오로라>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평론으로서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는 다소 부족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2월 13일 게시글이 오로진 시에나이트와 수마트라 호랑이를 설명하는 것처럼,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에서 다른 여러 게시글들은 문학적인 측면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게시글들은 <폐쇄 인공 생태계와 평등한 생태계 관리>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글이 정말 올바른 생태학 SF 평론이 아닌가요? 언제나 생태학 SF 평론이 문학적인 측면들을 필연적으로 분석해야 하나요?
고장원님이 쓴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안내 서적입니다.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은 다양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을 보여주나, 이 책은 문학적인 측면들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폴아웃> 같은 핵 전쟁 아포칼립스는 아주 유명하나,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은 비디오 게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국내 SF 문화에서 여러 평론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고장원님은 오직 소설들과 영화들에만 치중합니다. SF 게임들은 훌륭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으나, <대재앙 이후의 세계>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SF 평론으로서 이 책이 다소 부족한가요?
어떤 독자는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이 부족하다고 느낄 겁니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이 충분하다고 느낄 겁니다. 어떤 독자는 비록 <대재앙 이후의 세계>가 부족하다고 해도 이 책이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누가 옳은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SF 평론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글이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 이 글은 SF 소설 평론일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책이 문학적인 측면을 분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책은 문학 평론일 수 있습니다. 만약 생태학 SF 평론이 코로나 19 사태를 논의한다면, 문학적인 측면은 약해질지 모릅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많은 문제들을 시사합니다. 전염병 사태는 심각하나, 국가 정부는 공공 의료를 확대하지 않고, 민간 병원들을 동원하지 않고, 돌봄 노동 위기를 해결하지 않고, 시민 배당을 지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은 훨씬 커다란 고통에 부딪힐 겁니다. 자본주의가 착취 경제이기 때문에, 수탈 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 정부는 전염병 사태를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심각한 전염병 상황에서도 여전히 국가 정부는 공공 의료와 돌봄 노동들보다 시장 경제를 떠받듭니다. 코로나 19 사태에서 자본주의는 추악한 본색을 드러냅니다.
[SF 팬들은 이런 거대 괴수(환경 아포칼립스)와 자본주의 비판, <자연의 죽음>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재앙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훨씬 추악한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수구 꼴통들 역시 차별적인 발언들을 훨씬 심각하게 지랄지랄거립니다. 아무리 수구 꼴통들이 3차 세계 대전에 찬성하고 지랄발광한다고 해도, 이건 절대 이상하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들은 심각한 전염병 사태를 악용하고 온갖 편견들을 몰아붙입니다. 결국 세계화 자본주의는 수구 꼴통들을 부추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수구 꼴통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합니다. 수구 꼴통들과 차별들을 없애기 위해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면, 심각한 차별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또 다른 생태 재앙이 나타난다면, 세계화 자본주의가 코로나 19 사태에 무능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또 다른 생태 재앙에 무능하게 대처할 겁니다. 여러 환경 전문가들은 너무 많은 무역량들과 세계화 자유 시장 경제, 기후 변화가 또 다른 생태 재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생태학 SF 장르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얼마나 이런 미래가 끔찍할지 과장하고 비유합니다. 비록 환경 아포칼립스가 전염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팬들은 전염병이 생태 재앙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허공에서 갑자기 심각한 코로나 19 사태가 번쩍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자연 정복을 비판하고 경고합니다. 서구 계몽주의 이후, 자연 정복은 이른바 근대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이 자연을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남자 자지가 여자 보지를 찌르고, 꿰뚫고, 쑤시는 것처럼, 과학은 자연을 찌르고, 꿰뚫고, 쑤셔야 합니다. 조각 <La Nature se dévoilant>는 이런 폭력적인 자연 정복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과학이 자연을 들쑤신 이후, 과학은 자연을 알 수 있고, 이건 힘이 됩니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은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엉망진창 코로나 19 사태를 보세요. 이게 정말 힘인가요?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의 힘을 이야기했으나, 이런 과학이 정말 과학인가요? '과학자'로서 레이첼 카슨은 환경 오염을 비판했으나, 영리 기업들은 레이첼 카슨을 조롱했습니다. 이게 과학의 힘인가요? 과학은 자연을 들쑤셔서는 안 됩니다. 과학은 자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이게 가능한가요? 세계화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경외적으로 바라보나요? 이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헛소리입니다. 자본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상품화를 중시하고, 자본주의에서 자연 환경 역시 상품이 됩니다. 애석하게도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자본주의를 깊게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팬들은 자본주의 비판과 <자연의 죽음>과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연결하고 생태 재앙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비판과 <자연의 죽음>과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에서 세리자와 박사는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지 못한다. 자연 정복은 오만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대사는 너무 진부하나, 자본주의 비판-<자연의 죽음>-환경 아포칼립스 연결 고리에서 이런 대사는 가치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생태학 SF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에서 문학적인 측면들은 크게 드러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평론은 어떻게 창작물, 픽션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건 평론이 창작물의 생산 조건을 분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동안, 평론은 내용과 형식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모범적인 평론은 어떻게 내용과 형식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가 너무 심각하고, 자본주의가 너무 무능하고 멍청하고 한심해빠졌기 때문에, 이런 논의에서 생태학 SF 평론은 문학적인 측면들보다 다른 측면들에 치중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논의 역시 생태학 SF 평론에 속할 겁니다.
※ 비디오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 스크린샷 출처: alangblake,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1235571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