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픽션에서 표현 형식과 생산 과정 차이 본문
[만약 실사 영화가 이런 거대 괴수들을 구현한다면, 이건 엄청난 제작 비용과 제작 시간을 요구할 겁니다.]
소설 <상흔>과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는 거대 괴수들이 있습니다. 소설 <상흔>에는 아방이 있고, 영화 <괴수왕>에는 여러 티타누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상흔>은 오직 아방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소설 <상흔>에는 아방 이외에 다른 수많은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있습니다. 아방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평범한 고등어 무리부터 질척거리는 심해 갑각류들까지, 소설 시점은 수많은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보여줍니다. 거대하고 살아있고 기이한 테두리로서 해양 생태계는 아방을 둘러싼 것 같습니다. <상흔>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자연을 보여줍니다.
반면,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를 비롯해 티타누스들 이외에 다른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없습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여러 첨단 시설들과 장비들을 보여주나, 이 영화는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지 않습니다. 티타누스들과 첨단 장비들 이외에 비일상적인 상상력들은 크지 않습니다. 배경 무대는 일상적인 도시입니다. <고지라: 괴수왕>보다 <상흔>은 훨씬 거대한 설정을 내놓습니다. 당연히 <고지라: 괴수왕>보다 <상흔>은 훨씬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흔>이 새로운 자연 환경을 구현한다고 해도, 이것을 위해 차이나 미에빌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습니다.
반면, 모스라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을 구현하기 위해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엄청난 비용을 퍼부었을 겁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엄청난 흥행 수입을 올리기 위해 <고지라: 괴수왕>은 엄청난 예산을 퍼부었습니다. 비록 흥행이 실패했다고 해도, 분명히 <고지라: 괴수왕>은 돈덩어리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고지라: 괴수왕>은 미친 돈지랄입니다. 지구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어죽기 때문입니다. 지구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너무 비참하게, 정말 너무 비참하게 굶주립니다. 그들은 빵 한 조각과 깨끗한 물 한 모금을 정말 간절하게 원합니다. 이 세상은 목이 타는 지옥입니다.
하지만 굶주리는 사람들보다 거대 괴수들을 구현하기 위해 <고지라: 괴수왕>은 엄청난 비용을 퍼붓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정말 대단합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해도, 다른 한쪽에서 거대 괴수들을 구현하기 위해 블록버스터 영화는 돈을 펑펑 낭비하고 미친 돈지랄을 펼칩니다. 현실에는 거대 괴수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라가 폭풍을 형성하고, 라돈이 광풍을 일으키고, 모스라가 화려하게 날개 무늬를 반짝이고, 고지라가 골판들을 빛낸다고 해도, 결국 현실에는 거대 괴수들이 없습니다. 고지라, 모스라, 라돈, 기도라 같은 거대 괴수들은 그저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비록 거대 괴수들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런 상상력을 위해 블록버스터 영화는 예산을 펑펑 소비합니다. 아무리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해도,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대 괴수들을 위해 블록버스터 영화는 엄청난 비용을 쏟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궁극적인 목표가 이윤 축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해도,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윤 창출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이건 절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국가 지도자를 살해하고, 반동적인 쿠데타를 지원하고, 세계 무역을 봉쇄하고, 저항 운동들을 고립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을 저지르고, 양민들을 학살하고,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얼마든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킵니다. 아무리 블록버스터 영화가 미친 돈지랄이라고 해도,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행성급 환경 오염은 훨씬 엄청나게 미친 돈지랄입니다. 쿠데타 지원 및 제국주의 침략 및 행성급 환경 오염과 달리, 블록버스터 영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돈지랄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상대적으로 작은 돈지랄입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해도, 결국 이건 미친 돈지랄입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지랄염병을 떨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스라가 상대적으로 작은 괴수라고 해도, 모스라를 구현하기 위해 <고지라: 괴수왕>은 많은 예산을 소비했을 겁니다. 적어도 소설 <상흔>보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훨씬 많은 예산을 소비했을 겁니다. 왜 <상흔>이 훨씬 거대한 설정을 구현함에도, 작은 모스라를 구현하기 위해 <상흔>보다 <고지라: 괴수왕>이 많은 예산을 소모하나요? <고지라: 괴수왕>이 실사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실사 영화는 현실을 정교하게 반영하기 원합니다.
실사 영화와 현실 사이에 아주 많은 차이들이 있다고 해도, 실사 영화는 현실을 정교하게 반영하기 원합니다. 실사 영화와 현실 사이에는 아주 많은 유사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보다 실사 영화와 현실 사이에는 훨씬 많은 유사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현실을 훨씬 간략하게 반영합니다. 물론 <곤>과 <신부 이야기> 같은 만화들은 상당히 세밀한 그림체를 자랑합니다. 이런 세밀한 그림체는 현실과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모리 카오루가 그림체에 공을 쏟는다고 해도, <신부 이야기>는 영상이 아닙니다. <신부 이야기>에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만화 <신부 이야기>는 아미르와 카르르크가 움직인다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만화는 여러 정지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연이은 그림들은 등장인물들이 움직인다고 강하게 암시하나, 이런 정지 그림들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움직인다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정지 그림들을 연이어 보고 등장인물들이 움직인다고 해석합니다. 독자는 해석할 수 있으나, 독자가 해석한다고 해도, 만화 <신부 이야기>에서 아미르와 카르르크는 정말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만화 <신부 이야기>에는 다채로운 색깔들이 없고, 목소리들이 없고, 특정한 질감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모리 카오루가 세밀하게 아미르를 그린다고 해도, 이건 그림체입니다. 그림체로서 아미르는 존재합니다. 그림체 아미르와 현실 속의 인간 여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리 카오루가 그림에 상당한 공을 들이기 때문에, <신부 이야기>는 특정한 표현 형식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만화 독자들은 그림체가 아주 세밀하다고 호평합니다. 만약 <신부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이 된다면,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는 엄청난 비용을 소비할지 모릅니다. 세밀한 그림체가 색깔들을 입고 움직인다면,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거나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정교하고 세밀하고 독특한 표현 형식은 주목을 이끌 수 있으나, 이런 표현 형식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체를 비슷하게 구현하기 위해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가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처럼,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러빙 빈센트>가 제작 기간 10년을 요구한 것처럼,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에는 오랜 제작 기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가 많은 비용과 오랜 제작 기간을 소비한다면, <신부 이야기>는 특정한 표현 형식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가 상당히 특별한 표현 형식을 자랑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관객들이 <러빙 빈센트> 줄거리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러빙 빈센트>가 아주 특별한 표현 형식을 자랑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감탄합니다. <러빙 빈센트>처럼, 애니메이션 <신부 이야기> 역시 감탄들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이 뭔가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은 이런 표현 형식을 호평할 겁니다. <러빙 빈센트>와 달리, 만화 <안녕 자두야>는 특별한 표현 형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안녕 자두야>에는 고유한 그림체가 있으나, 이런 표현 형식은 많은 비용과 오랜 제작 기간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안녕 자두야>는 훨씬 간단한 표현 형식(그림체)을 보여줍니다.
만화 <신부 이야기>보다 만화 <안녕 자두야>는 훨씬 간단한 표현 형식(그림체)을 보여줍니다. 간단한 표현 형식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과 제작 기간을 요구할 겁니다. 이렇게 표현 형식, 비용, 제작 기간 사이에는 필수적인 관계들이 있습니다. 창작물이 뭔가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구현하기 원한다면, 이런 표현 형식을 위해 창작물은 엄청난 비용과 엄청난 제작 기간을 요구해야 합니다. 실사 영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사 영상은 현실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반영해야 합니다. 표현 형식적인 측면에서 실사 영상과 현실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TV 드라마 <미생> 속의 안영이와 현실 속의 강소라는 다릅니다. 아무리 촬영 기법이 정교하다고 해도, 표현 형식적인 측면에서 <미생> 속의 안영이는 현실 속의 강소라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TV 드라마 표현 형식은 현실 속의 강소라를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왜곡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다거나 멋진 얼굴이 사진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영상들 속의 박보검들보다 현실 속의 박보검은 훨씬 멋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 속의 박보검이 훨씬 멋지다고 해도, 수많은 매체들 중에서 실사 영상은 현실과 가장 많은 유사성들을 공유할 겁니다.
21세기 초반 산업 문명에게 TV 드라마는 별로 대단하지 않으나, 20세기 중후반까지, 인류 문명은 이런 TV 드라마들을 본격적으로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온갖 TV 드라마들과 실사 영화들이 널렸으나, 하루 아침에 인류 문명은 비디오 카메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류 문명은 산문들을 썼고 그림들을 그렸으나, 본격적으로 정교한 비디오 카메라는 20세기 후반 산물입니다. 인류 문명 전체에서 실사 영상은 상당히 최근에 나타났습니다. 실사 영상에게 첨단 장비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첨단 장비들은 상당한 비용을 요구합니다. 결국 실사 영상은 상당한 비용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매체들보다 실사 영상은 가장 정교하고 세밀한 매체일 겁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이런 실사 영상 속에 모스라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게다가 모스라는 굉장히 화려합니다. 네 주연 거대 괴수들 중에서 모스라는 가장 화려한 무늬들을 자랑합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 모스라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TV 드라마 <미생>은 강소라를 촬영하고 안영이를 구현할 수 있으나,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모스라를 직접 촬영하지 못합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모스라를 그려야 합니다. 현실 속에 거대 엄마 나방 괴수가 없기 때문에, <고지라: 괴수왕>은 모스라를 직접 그려야 합니다. 모스라는 애니메이션입니다. 하지만 모스라는 그저 단순한 애니메이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서 모스라는 정교하고 세밀한 실사 영상과 어울려야 합니다.
이런 여러 이유들 때문에, 모스라를 구현하기 위해 <고지라: 괴수왕>은 많은 비용을 퍼부었을 겁니다. 모스라는 실사 영화와 어울리기 위한 정교한 그림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스라는 비단 그림체일 뿐만 아니라 동작들, 음성들, 색깔들, 질감들을 보여줍니다. 모스라(를 보여주기 위한 표현 형식)는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소설 <상흔>이 새로운 자연을 조성한다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은 훨씬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실사 영화 속의 모스라와 달리, 소설 속의 기이한 해양 생태계는 글자들입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회적인 기호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보편적으로 글자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맹률은 사회 인프라를 가늠하기 위한 척도가 됩니다. 사회 인프라를 가늠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맹률을 파악합니다. 글자들은 보편적인 기호가 되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기호로서 글자들은 정교하지 않고 세밀하지 않습니다. 모스라와 반 고흐 유화와 강소라와 박보검에게 어떤 특징들이 있다면, 이런 특징들은 고유할 겁니다. 강소라와 박보검이 똑같이 미모를 자랑한다고 해도, 이런 미모에는 고유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것과 고유한 것은 대조적이고, 보편적인 글자들은 고유한 미모를 묘사하지 못합니다. 글자 '미모'는 보편적입니다.
보편적인 기호로서 글자들은 강소라가 아름답다고 설명할 수 있으나, 글자들은 어떻게 강소라가 고유한 아름다움을 뽐내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이건 글자들에게 보편적인 기호가 족쇄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문학 작가들은 글자가 족쇄(보편적인 기호)를 끊고 멀리 날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문학 작가들은 특정하게 글자들을 이용합니다. 어떤 모더니즘 소설들은 언어를 거의 새로 만듭니다. 독자가 이런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소설을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이런 소설들은 페이지들을 휙휙 넘기지 않습니다. 이런 모더니즘 소설들에서 글자들은 외계 언어와 비슷합니다.
이런 소설들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독자는 왜 자신이 이런 알아듣지 못하는 것들을 읽어야 하는지 푸념할지 모릅니다. 시(詩)들 역시 글자들이 그저 보편적인 기호에 불과하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시들 속에서 종종 글자들은 의미보다 춤꾼이 됩니다. 독자가 운율을 느낄 때, 시에서 글자들은 의미보다 춤꾼이 됩니다. 시인이 의미와 운율을 함께 집어넣는다면, 이런 시는 많은 호평들을 받을 겁니다. SF/판타지 소설들은 신조어들을 집어넣고 현실과 소설 속의 세상이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세상이 다르다면, 언어 역시 다를 겁니다. SF/판타지 소설들은 특정한 글씨체들을 이용해 특정한 존재를 표현합니다.
[글자 'Styracosaurus'와 그림 속의 뿔공룡이 닮았나요? 글자에는 시각적인 유사성이 없습니다.]
이렇게 문학 작가들은 글자들이 족쇄를 풀고 멀리 날아가기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글자들이 멀리 날아가기 원한다고 해도, 결국 근본적으로 글자들은 사회적인 기호, 보편적인 기호가 되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기호로서 글자들은 얼마나 강소라와 박보검이 고유한 미모를 뽐내는지 묘사하지 못합니다. 글자들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글을 쓰기 때문에, 글자 매체는 많은 비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건 다소 과장이나, 작가에게 오직 종이와 연필만 있다고 해도,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 지망생들은 만화와 연극과 영화와 게임보다 소설에 도전합니다.
만화와 연극과 영화와 게임은 고유한 특징들을 훨씬 (시각적으로)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정교한 묘사 덕분에, 이런 창작물들과 현실은 많은 유사성들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과 현실 사이에 많은 유사성들이 있다면, 창작물은 훨씬 깊은 흡입력을 자랑할 테고, 사람들은 창작물 속으로 깊게 빠질 겁니다. 이건 오직 정교한 표현 형식만 흡입력을 자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스다 미리 만화들은 별로 정교한 그림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만화에서 그림체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그림체는 만화를 구성하기 위한 모든 요소가 아닙니다. 시점, 각도, 컷 분할 같은 형식들 역시 중요합니다.
만화가는 그저 그림들을 잘 그리는 사람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만화가는 그림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구성해야 합니다. 종종 만화가들은 똑같은 장면들을 연이어 늘어놓습니다. 종종 만화가들은 말풍선 없이 오직 그림들만 보여줍니다. 로맨스 만화에서 뽀샤시 효과와 반짝이 효과는 두근두근 심쿵 장면을 강조할 수 있으나, 만화가들은 뽀샤시 효과와 반짝이 효과를 적절하게 집어넣어야 합니다. 아무리 만화 작가가 예쁜 그림체를 선보인다고 해도, 만화 작가가 컷 분할에 능숙하지 않다면, 이런 만화는 호평을 받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만화 구성이 너무 엉성하고 오직 그림체만 예쁘다고 비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예쁜 그림체는 커다란 장점이 됩니다. 우리 인간이 시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예쁜 그림체는 가장 먼저 주목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림체가 예쁘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글자보다 그림은 훨씬 시각적입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림을 대충 그리는 것 같다고 해도, 이런 그림 덕분에, 만화 독자는 소설보다 만화에 훨씬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마스다 미리 그림체가 간단한 것 같다고 해도, 이런 그림체조차 쉽지 않습니다. 수필 <엄마라는 여자>에서 심지어 엄마는 간단한 개구리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림 그리기에 익숙하지 않다면, 만화 그리기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 될 겁니다.
그림체가 간단하든, 그림체가 아주 세심하든, 그림 덕분에, 만화 독자는 만화에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그림은 시각적인 정보입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독자가 만화책을 펼치고, 현실에서 만화 속으로 독자가 움직인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두 눈으로 계속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비록 마스다 미리 그림체가 간단하다고 해도, 분명히 치에코씨는 시각적인 정보입니다. 현실 속의 여자와 만화 속의 치에코씨 사이에서 독자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반면,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글자들이 시각적이라면, 글자들은 고유함을 반영해야 할 겁니다. 이런 고유함은 보편적인 기호와 대조적입니다.
아무리 스티라코사우루스(글자)와 스티라코사우루스(동물) 사이에서 독자가 시각적인 유사성을 찾기 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시각적인 유사성을 찾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상형 문자조차 시각적인 유사성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木'이 정말 나무와 시각적으로 유사한가요?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는 생체 나무 우주선이 있습니다. 언폴른 종족은 나무 거인입니다. 그들은 생체 나무 우주선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언폴른은 이런 우주선들에 기계 장치들을 결합합니다. 이런 생체 나무 우주선들은 진짜 나무들과 다르나, 그렇다고 해도 나무와 언폴른 우주선 사이에는 여러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木'보다 언폴른 우주선은 나무와 훨씬 비슷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책을 펼칠 때, 독자는 너무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현실에서 독자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나, 독자가 소설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기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너무 충격적이고 이질적입니다. 소설책에는 시각적인 정보들이 없습니다. 사회적인 기호들은 시각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에서 첫문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소설 속의 세상이 너무 충격적이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첫문장이 독자를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독자는 소설 밖으로 도망치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건 소설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소설 첫문장이 반드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현실에서 소설로 독자가 움직이는 동안, 시각적인 정보들에서 사회적인 기호들을 향해 독자는 낯선 경계선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라이트 노벨들은 인기를 끄는지 모릅니다. 라이트 노벨 독자는 삽화를 보고,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낯선 기호들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글자들에는 이런 단점이 있습니다. 글자들이 사회적이기 때문에, 글자들에게는 이런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단점 때문에, 글을 쓰기는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 지망생들은 소설에 도전합니다. 만화, 연극, 영화, 게임이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가 쉽다고 해도, 글을 멋지게 쓰기는 어렵습니다. 글을 멋지게 쓰기 위해 작가는 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만약 소설이 쉬운 매체라고 작가 지망생이 착각한다면, 작가 지망생은 낭패할지 모릅니다. 글을 쓰기는 쉬우나, 필력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작가가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글자들이 고유한 특징을 시각적이고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장르 소설에서 이런 문제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아리카와 히로가 쓴 <바다 밑>에서 모리오 노조미는 평범한 일본 여자 고등학생입니다. 독자는 모리오 노조미를 시각적으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는 수두룩한 일본 여자 고등학생들이 있고, 일상 속에서 그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남한 독자가 일본 고등학생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남한 독자는 남한 고등학생을 모리오 노조미에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수함 내부 시설을 연상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잠수함을 쉽게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글자들이 고유한 특징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글자들은 잠수함의 고유한 갑갑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독자가 잠수함 내부 시설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독자는 잠수함 영화들을 참고해야 할 겁니다. SF 소설들 속에는 잠수함보다 훨씬 비일상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잠수함 내부 시설보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이런 그림은 정교하고 세밀하고 비일상적입니다. 글자 매체는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잠수함이 비일상적이라고 해도, 적어도 현실에는 잠수함이 있습니다. 반면, 현실에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없습니다. 우리가 '숲 속의 오두막'이라는 문구를 읽는다면, 우리는 어떤 장면을 머릿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장면을 떠올리지 못한다고 해도, 어떤 공동체에서 '숲 속의 오두막'은 상당히 보편적인 시각적인 측면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 게시글을 읽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숲 속의 오두막 장면과 제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숲 속의 오두막 장면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유사성들이 있을 겁니다. 심지어 우리는 거의 똑같은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반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SF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면, 독자들은 아주 다양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독자들이 과학 다큐멘터리들을 참고한다고 해도, 현실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없기 때문에, 아직 인류 문명이 이것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은 다양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들을 상상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이외에 다른 설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이 비일상적인 상상력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와 소설이라는 매체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 아닐지 모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과 소설이 잘 어울리지 못한다면, 왜 독자가 SF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SF 소설이 저렴한 가격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티타누스들보다 스팀펑크 해양 생태계가 훨씬 이질적이라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이 영화이고 <상흔>이 소설이기 때문에, 차이나 미에빌은 훨씬 저렴하고 쉽게 스팀펑크 해양 생태계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에게 종이와 연필이 있다면, 차이나 미에빌은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자가 SF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아니면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소설이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입니다. 소설 매체에서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게 소설은 원조 매체입니다.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기타 매체들 중에서 소설은 "나는 SF 원조 매체야! 19세기에 소설이 없었다면, SF 역시 나타나지 못했을 거야!"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소설이 원조 매체이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이 원조 매체 소설을 대접해야 하나요? 소설 매체 앞에서 SF 독자들이 예의를 갖춰야 하나요? 만약 이런 이유가 합당하지 않다면, 왜 SF 작가들이 소설들을 쓰고 SF 독자들이 소설들을 읽나요? 글자 매체에게 무슨 장점이 있나요? 사고와 감정과 이론은 대답이 겁니다. 글자 매체는 추상적인 사고와 감정과 이론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문단에서 이제까지, 이 게시글은 시각적인 측면들을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래서 우리에게 시각적인 측면들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건 세상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사고 방식, 감정, 이론 역시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에게 사고(思考)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하지만 사고, 감정, 이론은 추상적입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쓴 우화 모음집 <바지를 입고 싶은 캥거루>에서 어떤 동물들은 생각들을 글자들로 표현합니다. 극지에서 바다표범이 뭔가를 생각한다면, 바다표범의 머리 위에서 그 생각은 고드름 글자들이 될 겁니다.
만약 바다표범이 '우와~, 굉장히 멋진 추위야.'라고 생각한다면, 바다표범 머리 위에서 "우와~, 굉장히 멋진 추위야."라는 고드름 글자들은 떠오를 겁니다. 만약 바다표범이 '아놔, 왜 이렇게 이드리스 엘바가 멋질까?'라고 생각한다면, 고드름 글자들은 "아놔, 왜 이렇게 이드리스 엘바가 멋질까?"라고 적을 겁니다. 만약 바다표범이 '야호, 퀴어 축제는 정말 흥겨워. 이번 퀴어 축제는 정말 성공적이었어.'라고 생각한다면, 고드름 글자들은 이것을 적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고 방식이 시각화한다고 해도, 결국 고드름 글자들은 '글자 매체'입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기발한 우화를 썼으나, 기발한 우화 속에서도 글자 매체는 사고를 표현합니다. 글자 매체는 추상적인 사고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소설 <상흔>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언어학자입니다. 언어학자는 문맹 조수에게 글자들을 가르치고, 조수는 왜 언어가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과정은 추상적입니다. 비가시적인 언어는 비가시적인 사고 방식, 깨달음, 충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설 도입부에서 <상흔>은 기이한 해양 생태계 풍경을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은 언어를 이용합니다. 이런 설명이 그림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결국 설명에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생태학 이론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생태계 그 자체는 가시적이나, 해양 생태계는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생태학 이론은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를 정리하고 압축하고 분류합니다.
이런 생태학 이론은 비가시적입니다. 우리가 비가시적인 이론을 설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가시적인 그림보다 비가시적인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언어는 아주 거대한 현상을 추상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흔>이 영상 매체가 된다면, 영상 매체는 기이한 해양 생태계 풍경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겁니다. 관객들은 해양 생태계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으나, 관객들은 어떻게 기이한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영화 <반지 원정대>를 보세요. 영화 도입부에서 <반지 원정대>는 어떻게 사우론이 절대 반지를 만들고, 마지막 동맹이 진군하고, 이실두르가 반지를 얻고, 골룸이 반지를 차지하는지 보여줍니다.
만약 여기에서 갈라드리엘이 설명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도대체 무슨 사건들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저 날개 투구들이 뭐고, 저 나뭇잎 방패들이 뭐고, 저 시커먼 깡통 덩어리가 뭐야?" 이렇게 관객들은 마지막 동맹이 용감하게 싸운다고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영화 <반지 원정대> 도입부에서 영상보다 언어는 우선합니다. 마법 반지 주조 장면이 나오기 전에, 영화는 갈라드리엘 목소리들을 들려줍니다. 왜? 영화 도입부가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도입부는 절대 반지 주조와 마지막 동맹이라는 아주 거대한 연대기를 정리하고 압축하고 분류해야 합니다. 언어는 이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One Ring to rule them all."은 그림, 영상, 음악보다 언어입니다.
영상 없이, 관객들이 오직 설명만 듣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마지막 동맹이 무슨 사건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설명 없이, 관객들이 오직 영상들만 본다면, 관객들은 왜 절대 반지가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실사 영화 <반지 전쟁>처럼, <상흔>이 실사 영화가 된다고 해도, 기이한 해양 생태계를 설명하기 위해 <상흔>은 언어를 동원해야 할 겁니다. 설명과 함께 관객들은 스팀펑크 해양 생태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소설과 영상 매체가 똑같은 사건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은 훨씬 많은 설명들을 늘어놓습니다. 특히, SF 소설들은 새로운 설정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흔>이 기이한 스팀펑크 해양 생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SF 소설들에게는 새로운 설정들이 있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추상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과 언어 매체는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SF 소설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들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상 매체보다 글자 매체는 훨씬 유리할 겁니다. 글자 매체에는 이것 이외 다른 장점들이 있으나, SF 소설에게 이런 장점은 가장 커다란 특징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 속의 세상이 추상적이라고 해도, 많은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사랑할 겁니다. 이렇게 다양한 매체들에는 다양한 표현 형식들이 있습니다. 스팀펑크 심해 생태계보다 모스라가 훨씬 작다고 해도, 영화 관객들은 스팀펑크 심해 생태계보다 모스라가 훨씬 인상적이라고 기억할지 모릅니다. 모스라가 훨씬 화려하고 시각적인 날개 무늬들을 빛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모스라는 삑삑삑~ 울부짖으나, 소설은 이런 고유한 소리를 구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차이나 미에빌이 기가 막히게 글을 쓴다고 해도, 소설 <상흔>은 이런 시각/청각 체험을 선사하지 못합니다. 반면, 소설이 추상적이라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고지라: 괴수왕>보다 <상흔> 속의 스팀펑크 해양 생태계가 훨씬 깊고 풍부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상흔>에 아주 높은 밀도가 있다고 느낄 겁니다. 글자들은 사고 방식, 감정, 비유, 의식, 이론을 연이어 늘어놓습니다. 글자들은 기호이고, 독자는 기호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독자는 추상적인 기호들을 이용해 가시적인 세상을 상상해야 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런 연상 작용을 계속 겪어야 합니다. 이런 연상 작용들은 독자를 자극할 테고, 독자는 소설에 높은 밀도가 있다고 느낄 겁니다.
만약 독자가 이런 밀도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블록버스터 영화가 화려한 시각 효과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을 그리워할 겁니다. 이건 소설보다 영화가 반드시 낫거나 영화보다 소설이 반드시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과 영화에는 여러 특징들이 있고, SF 팬들은 이런 특징들을 골고루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표현 형식들을 파악할 때, 우리는 표현 형식과 내용 사이에 무슨 괴리가 있고 어떻게 표현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막대한 돈을 벌기 원하기 때문에, <고지라: 괴수왕>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나타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환경 보호를 외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환경 보호를 외치나, 이 블록버스터 영화는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이건 웃긴 짓거리입니다. 깡패가 사시미로 사람 옆구리를 푹푹 찌르는 동안, 깡패가 자신이 지극히 평화롭다고 외친다면, 이건 아주 웃긴 짓거리일 겁니다.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는 동안, 깡패가 자신이 평화롭다고 외친다면, 이건 미친 짓거리일 겁니다. <고지라: 괴수왕>이 자본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에, <고지라: 괴수왕>은 웃기고 미친 짓거리를 저질러야 합니다. 블록버스터 <고지라: 괴수왕>보다 소설 <상흔>은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상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임금 노동자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그들은 임금 노동 제도를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급진적인 생산 수단 공유를 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그들은 생산 수단 공유를 외쳐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는 이런 모순이 있습니다. 이건 너무 안타까운 모순입니다. 안타깝게도 <상흔>과 <고지라: 괴수왕> 역시 이런 모순을 피하지 못합니다. SF 팬들이 <상흔>을 읽고 <고지라: 괴수왕>을 보는 동안, SF 팬들이 '어떻게 사회 구조 속에서 창작물이 나타나는지' 파악한다면,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훨씬 근본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림 <REDRAW IN DESC. gentle giants> 출처:
austroraptorcabazai, http://fav.me/dd5ej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