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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비경 탐험 소설의 흐름과 킹콩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비경 탐험 소설의 흐름과 킹콩

OneTiger 2017. 3. 19. 20:00

[이런 킹콩과 해골섬 이야기는 <잃어버린 세계>와 <지구 속 여행>의 연장선에 가깝습니다.]



영화 사이트 IMDB는 <콩: 해골섬>의 장르를 액션, 모험, 판타지로 분류했습니다. <콩: 해골섬>의 전작은 2014년 <고지라>인데, IMDB는 이 영화의 장르를 액션, 모험, 사이언스 픽션으로 분류했죠. 똑같은 괴수물이고 전작과 속편이지만, 고지라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킹콩은 판타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분류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람마다 장르라는 것을 다르게 정의하게 마련이고, <콩: 해골섬>이 판타지든 사이언스 픽션이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괴수가 나오고 아슬아슬한 모험이 기다리고 관객들이 그걸 재미있게 즐겼다면, 장르가 판타지가 되든 사이언스 픽션이 되든 상관없는 일이죠. 그래도 저는 IMDB의 분류 방법에 살짝 딴죽을 걸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콩: 해골섬>은 19세기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SF 비경 탐험물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SF 소설은 비경 탐험물과 함께 시작했고, 비경 탐험물은 여전히 SF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당연히 <콩: 해골섬>은 SF 장르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콩: 해골섬>의 장르 분류가 어쨌든, 이런 SF 장르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은 흔히 본격적인 사이언스 픽션의 출발점을 <프랑켄슈타인>으로 꼽습니다. 메리 셸리가 쓴 소설이죠. 사람들은 흔히 SF 장르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외계인이 아리따운 아가씨를 납치하고, 용감무쌍한 남자 주인공이 외계인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출하고…. 이런 이야기는 SF 장르에 꽤나 흔하고, 남자들의 환상을 충족하죠.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메리 셸리였고, 그 이후에도 여자들은 꾸준히 SF를 쓰고 읽었습니다. 여자 소설가들도 마스터피스와 그랜드 마스터(데임) 같은 칭호를 누리고, 휴고상이나 네뷸러상에 올라갔죠. 여전히 SF 장르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세상은 꾸준히 변하는 법입니다. 여자 작가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로맨스나 쓴다는 것도 편견이죠. 스페이스 오페라나 밀리터리 SF 소설들도 많으니까요. <프랑켄슈타인>은 바이오펑크이고 탐험물입니다. 소설 후반부에 인조인간과 박사 모두 극지방으로 떠나고, 극지방 탐험선이 죽어가는 박사를 발견하죠.



극지방 탐험은 비단 <프랑켄슈타인>에만 나오는 소재가 아닙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나 <해저 2만리>에도 나오는 소재죠. 유럽인들에게 17~19세기는 그야말로 탐험의 시대였습니다. 유럽 탐사대는 극지방과 열대 밀림과 황량한 사막으로 떠났고, 그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모험기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낯선 환경, 기이한 동물들, 이상한 문명, 열병과 굶주림, 조난 등은 극적인 장치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마 초기 SF 작가들은 이런 탐험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초기 SF 작가들은 여러 탐험 이야기를 썼고, 여타 장르 작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르 작가들에게 탐험은 정말 매력적인 소재였을 겁니다. 쥘 베른, 아서 코난 도일, 허먼 멜빌, 에드거 앨런 포, 헨리 라이거 해거드, 브람 스토커, 기타 등등 다양한 작가들이 탐험 이야기에 손을 댔습니다. 소설 속에서 탐사대는 열대 우림에서 공룡을 목격하거나 잠수함을 타고 대왕 오징어와 싸우거나 오지의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거나 혹독하고 하얀 극지방을 떠돌았죠. 이런 분위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가령, 댄 시몬스는 <테러 호의 악몽>을 썼습니다. 21세기 소설이지만, 19세기 탐험물의 유형을 이어받았죠.



메리 셸리 이전에도 장르 소설은 존재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나 <유토피아> 등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설들도 탐험을 소재로 삼았죠. 걸리버는 배를 타고 여행했고, 유토피아는 상상의 섬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합니다. 이런 소설들은 그저 무늬만 사이언스 픽션이지만, 장르 소설이 일찌감치 탐험을 품 안으로 끌어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초기 SF 작가들은 이런 탐험에 과학적 상상력을 덧붙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적 상상력과 탐험의 궁합이 높아집니다. 사실 기술이 발달하지 않는다면 탐험을 떠나기도 힘듭니다.


고대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별다른 장비 없이 항해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탐험은 그만큼 최신 장비가 필요하겠죠. 단순한 육로 여행이나 수로 여행이라면 최신 기술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지방, 사막, 깊은 동굴, 해저(!), 우주(!!) 같은 환경은 인간의 도전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습니다. 최신 기술이 없다면 탐험대의 귀환은 물론이고 생존조차 보장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마이클 크라이튼이 <콩고>에서 말했듯) 탐험 이야기는 최신 기술을 언급하기 마련이고, 당연히 SF 장르로 귀결합니다. 뭐, 잠결에 우주로 떠나는 탐험 이야기도 없지 않았지만.



이뿐만 아닙니다. 탐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SF 작가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탐사대와 공룡의 조우를 위해 선사 시대 동물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상상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공룡이 현대까지 살아있도록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잃어버린 세계>는 <해저 2만리>처럼 최신 기술을 언급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룡 왕국을 묘사하기 위해 이런저런 과학 가설을 늘어놔야 했고, 챌린저 박사는 소설 속에서 그런 업무를 맡았습니다. 적어도 과학 냄새를 풍겨야 했죠.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은 노틸러스 같은 만능 잠수함을 말하지 않지만, 대신 지구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정을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각종 가설들을 동원해야 했고요. 당연히 <지구 속 여행>은 상상 과학을 탐구하는 SF 소설이 되었습니다. 영화 <콩: 해골섬>은 이런 소설들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세계>와 <지구 속 여행>을 21세기 블록버스터로 뒤바꾼다면, <콩: 해골섬> 같은 영화가 튀어나올 겁니다. <잃어버린 세계>가 SF 소설이라면, <콩: 해골섬>도 SF 영화겠죠.



물론 킹콩을 비롯한 괴수들은 공룡과 비교가 안 되는 생명체입니다. 공룡은 이 세상에 실존했습니다. 커다란 공룡들은 사라졌지만, 새는 아직 인류 곁에서 날개짓하죠. 반면, 킹콩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기존 킹콩을 그냥 거대 고릴라라고 쳐도 <콩: 해골섬>의 킹콩은 30m에 이릅니다. 스컬 크롤러도 실제 동물과 많이 동떨어진 생명체입니다. 게다가 고지라는…. 이 위대한 심해 파충류는 그냥 생명체의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사실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고지라는 걸어다니는 재앙 덩어리이고, 각종 화기와 광역 병기를 씹어먹는 도마뱀인데, 어떻게 공룡 따위와 비교하겠어요. (아니, 고지라를 파충류라고 불러도 될지….) 고지라는 차라리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다곤이나 크툴루와 비슷할 겁니다. 고지라는 다곤처럼 사교를 퍼뜨리거나 인간에게 정신력을 미치지 않으나, 파괴될 수 없는 괴수이기 때문에 많이 닮았죠. 따라서 누군가는 킹콩이나 고지라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그냥 판타지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도 SF 울타리에 들어오곤 합니다.



SF라는 장르를 딱히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기 힘듭니다. "작가가 자기 소설을 SF라고 우기면 그 소설은 SF가 된다."라는 말이 있죠. 아마 SF를 정의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상 과학적으로 보이는 창작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창작물이 상상 과학적인 냄새를 풍기면, 그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뜻입니다. 초인이 광검을 휘두르거나 괴수가 심해에서 올라오거나 기이한 외계 우주선들이 서로 싸워도, 어쨌든 그것들이 상상 과학에 뿌리를 둔다면, 그것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킹콩이나 고지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비록 과학적인 고증은 밑바닥을 치겠지만, 그 줄기는 상상 과학의 뿌리에서 뻗었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하드 SF 소설들도 과학적인 고증을 철저하게 따지지 못합니다. <중력의 임무>나 <블라인드 사이트>는 훌륭한 하드 SF 소설이지만, 현실의 과학자들은 외계 문명의 존재조차 증명하지 못하죠. 상상 과학은 과학처럼 보이면 됩니다. 좀 더 과학처럼 보이든, 판타지로 날아가든, 그건 작가의 취향에 달린 문제일 뿐입니다.



<콩: 해골섬>은 유구한 SF 비경 탐험물의 관습을 이어갑니다. 아울러 상상 과학적인 냄새를 풍깁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IMDB 사이트는 장르 분류를 바꿔야 할 겁니다. 물론 이미 말했듯 이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든 판타지든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콩: 해골섬>이 어떤 유형의 창작물이고, 이와 비슷한 창작물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콩: 해골섬>의 위치가 더욱 확실해지고, 다른 창작물들과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마라코트 심해>나 <광기의 산맥>과 판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쨌든 <콩: 해골섬>은 괴수물입니다. 킹콩이나 스컬 크롤러 같은 괴수가 주연이죠. 이에 비해 <마라코트 심해>나 <광기의 산맥>에는 여러 생물들이 나오지만, 그것들은 주연이 아닙니다. 괴수의 활약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라코트 심해>보다 <콩: 해골섬>을 더 선호하겠죠.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콩: 해골섬>은 비경 탐험물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의 한 지류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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