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밤의 숲 속에서>의 생태 도시와 무정부주의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밤의 숲 속에서>의 생태 도시와 무정부주의

OneTiger 2018. 4. 7. 19:05

제이 레이크가 쓴 소설 <밤의 숲 속에서>는 무정부주의 집단이 세운 생태 도시를 보여줍니다. 캐스케디오폴리스라고 불리는 이 생태 도시는 도시치고 뭔가 좀 어색합니다. 흔히 우리는 인공적인 건물들이 가득한 주거지를 도시라고 부릅니다. 도시는 높은 산맥이나 울창한 삼림이나 험한 바위 지대를 포함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도시 밖으로 밀려나죠. 도시는 자연 경관을 크게 바꾸고, 산맥과 숲과 바위 지대 대신 마천루들을 집어넣습니다.


반면, 캐스케디오폴리스는 산맥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캐스케디오폴리스 시민들은 나무들을 베지 않고, 바위들을 밀어내지 않고, 산을 부수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곳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자원들을 채취할 뿐입니다. 설사 그들이 나무를 베거나 바위를 부순다고 해도, 그들은 자연 경관을 크게 바꾸지 않아요. 무엇보다 여기에는 환경 오염으로 죽는 사람들이 없죠. 캐스케디오폴리스에 환경 오염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연 환경을 절대 바꾸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하지만 캐스케디오폴리스는 매연이나 핵 폐기물이나 막대한 온실 가스, 무자비한 생물 다양성 감소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캐스케디오폴리스는 공간적인 특성보다 사상적인 특성을 강조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도시에서 공간적인 특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캐스케디오폴리스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세운 도시이고, 그래서 공간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캐스케디오폴리스가 무너진다고 해도, 무정부주의자들은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새로운 보금자리나 마을, 도시를 꾸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상입니다. 어디에서든 보금자리를 틀 수 있다는 사상이죠.


캐스케디오폴리스가 기대는 산맥이라는 공간적인 특성은 그저 일부분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곳을 향해 얼마든지 떠날 수 있고, 이런 풀뿌리 특성은 사방으로 퍼지고, 생태 도시들을 더욱 확장합니다. <밤의 숲 속에서>는 기후 변화를 비롯한 환경 오염을 걱정하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이고, 그 대안으로서 생태 도시와 무정부주의 공동체를 내놓는 것 같습니다. 이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경 운동과 많이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경 운동은 무정부주의와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왜 무정부주의 같은 사회주의 사상이 환경 보호와 이어져야 할까요.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일까요.



환경 오염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카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3권을 인용하곤 합니다. <자본론> 3권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농업을 분석했고, 그런 농업이 재활용을 막는다고 주장했어요. 오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농업은 화학 비료를 퍼붓고, 토지에게 쉴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각종 오물들은 재활용 없이 그저 버려지고, 토지는 계속 화학 비료를 받아먹고 작물들을 생산해야 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농업이 토지를 황폐하게 하고 비옥함을 망칠 거라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계에서 농민들은 점차 사라지고 농업 노동자들은 늘어납니다. 농업 노동자들은 토지를 보유하지 못했고, 토지를 이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농업 노동자는 토지를 착취해야 하고, 덕분에 노동과 생산은 서로 괴리됩니다. 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원하는 대로 유기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겠으나, 농업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죠. 이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 나오는 내용이고, 환경 오염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내용 역시 좋아해요. 이런 내용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절대 환경 보호와 대립하는 사상가가 아니라고 주장하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완전히 생태적인 사상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할 수 있는지 증명했고, 그건 여전히 가치가 있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넘고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아무리 근검절약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환경 오염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밤의 숲 속에서>는 생태 도시와 무정부주의 집단을 보여줬을 겁니다. 이 소설이 마르크스주의 소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밤의 숲 속에서>는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환경 운동가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평등한 공동체를 운영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따라가지 않아요. 캐스케디오폴리스는 상품과 수익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노동합니다. 저는 이런 생태 도시와 무정부주의 집단이 진정한 환경 운동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환경 운동가들은 자본주의를 수긍하고 체계 안에서 운동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환경 오염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고, 그런 운동은 금방 장벽에 부딪힐 겁니다.



진정한 환경 운동은 자연 환경과 현대 문명을 분리해서는 안 될 겁니다.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넘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룰 때, 캐스케디오폴리스 같은 도시가 등장할 때, 마침내 우리는 환경 보호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겠죠.



※ <밤의 숲 속에서>는 구원자 신화를 담았으나, 이 소설과 구원자 신화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새로운 부족주의를 선보이는 SF 소설에 구원자 신화…. 아마 작가는 구원자 신화를 덧붙이고, 생태 도시를 장엄하게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덕분에 시점은 산만하고, 구원자 신화가 생태 도시를 다소 가리는 것 같군요. 전능한 구원자를 이야기할 여유가 있었다면, 오히려 생태 도시를 좀 더 둘러보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저는 자연 생태계와 생태 도시에서 어떻게 에너지가 흐르고 재생산되는지 보고 싶었으나, 그런 설정보다 웬 구원자 이야기가 더 많군요.


소재가 좀 아깝습니다. 생태 도시를 그리는 작가는 어떻게 에너지가 흐르고 재생산되는지 묘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설정 때문에 바이오스피어나 생태 도시나 세대 우주선 같은 인공적인 자연 생태계(좀 이상한 표현이군요)가 재미있지 않겠어요. 산맥에 자리를 잡은 생태 도시는 괜찮은 발상이나, 뜬금없는 구원자 덕분에 소재가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비단 <밤의 숲 속에서>만 아니라 <메타트로폴리스>의 다른 소설들 역시 생태 도시라는 측면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는 듯해요. 오히려 존 스칼지 소설이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환경 디스토피아 소설 <밤의 숲 속에서>에게 게임 <블록후드> 같은 생태 건물을 기대하기는 무리일까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