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반지 전쟁>은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말하지 못한다 본문

SF & 판타지/숲 속의 주문들

<반지 전쟁>은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말하지 못한다

OneTiger 2019. 10. 15. 20:15

만약 사람들이 중세 유럽 판타지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사람들은 소설 <반지 전쟁>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소설 <반지 전쟁>은 중세 유럽 판타지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반지 전쟁>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착각이 아닐 겁니다. 분명히 호빗은 하플링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우직하고 튼튼한 드워프 전사, 아름답고 신비로운 엘프 레인저, 사악한 오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중세 판타지를 논의한다면, 사람들은 이런 유사성을 지나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양쪽 사이에는 유사성들처럼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은 서사시입니다. 이 소설은 여러 세력들이 커다란 전쟁을 벌이고, 영웅들이 활약하고, 선한 세력이 악한 세력을 몰아낸다고 이야기합니다. 호빗들은 작으나, 작은 호빗들 역시 거대한 사건에 참가해야 합니다. 작은 톱니는 거대한 바퀴와 맞물려야 합니다. 1부 <반지 원정대>는 어느 정도 모험 이야기에 가까우나, 전반적으로 <반지 전쟁>에는 모험보다 전쟁이 있습니다. 반면,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모험이 있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과 달리,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공성전과 회전(會戰)보다 던전 탐험에 치중합니다. 던전 탐험은 별로 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대 유적이 거대한 던전이 된다고 해도, 던전은 제한적인 배경 무대입니다. 던전은 비좁고 복잡하고 고립되었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이 카잣 둠(모리아)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카잣 둠은 제한적인 배경 무대입니다. 헬름 협곡 공성전 및 펠렌노르 회전과 달리, 카잣 둠에서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간달프가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어떻게 반지 원정대 아홉이 대규모 전투를 펼칠 수 있나요? 소설 <반지 전쟁>은 반지 '전쟁'을 이야기해야 하고, 아무리 카잣 둠이 많은 던전 탐험 이야기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던전 탐험과 <반지 전쟁>은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반면, 이름처럼,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던전 탐험을 이야기합니다. 소규모 모험가 일행은 음산한 성채에 들어가고, 미궁에서 돌아다니고, 해골 병사들과 싸우고, 함정을 회피하고, 흡혈귀 백작을 물리치고, 보물 상자를 엽니다. 이런 던전 탐험 이야기에는 대규모 군대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규모 군대가 없기 때문에, 모험가 일행은 뚜렷한 특성들을 드러내야 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전사와 성직자와 도적과 마법사는 전형적인 모험가 일행 조합입니다. 전사는 일행을 보호하고 근접 전투를 담당합니다. 성직자는 전사를 보조하고, 언데드를 퇴치하고, 부상을 치유합니다.

 

 

도적은 정찰과 함정 탐색, 기습을 담당합니다. 마법사는 비전을 읊조리고 강력한 파괴 마법을 날립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다른 여러 클래스들이 있으나, 기본적인 역할 분담은 전사, 성직자, 도적, 마법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반지 전쟁>이 선구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해도,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반지 전쟁>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반지 전쟁>과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다릅니다. <반지 전쟁>이 선구적이기 때문에, 어떤 판타지 독자들은 <반지 전쟁>이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판타지 독자들은 <반지 전쟁>을 이용해 다른 중세 판타지들을 평가하기 원합니다.

 

이런 비교 및 대조는 흥미롭습니다. 판타지 독자들은 <반지 전쟁>과 다른 중세 판타지들을 비교하거나 대조하고 어떻게 중세 판타지들이 바뀌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판타지 독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훨씬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반지 전쟁>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반지 전쟁>은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으나, 이건 <반지 전쟁>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판타지 팬들은 <반지 전쟁>보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훨씬 높게 평가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반지 전쟁>이 선구적인 중세 판타지라고 해도, 이 소설에는 많은 한계들이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모험가 일행에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똑같습니다. 여자들은 성기사가 되고, 드루이드가 되고, 바드가 되고, 소서리스가 될 수 있습니다. <반지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주연 등장인물이 되나요? 아웬은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나, 아웬이 주연 등장인물인가요? 아니, 아웬은 아라곤을 조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에오윈은 중요한 업적을 세우나, 에오윈이 공개적으로 전장으로 향할 수 있나요? 아니, 에오윈은 자신을 감춰야 합니다. 갈라드리엘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나요? 아니, 로스로리엔 밖으로 갈라드리엘은 나오지 않습니다. 반지 원정대에 여자들이 있나요?

 

아니, 반지 원정대 아홉은 모두 남자입니다. 작은 페레그린 투크부터 건장한 보로미르까지, 반지 원정대에는 오직 남자들만 득실거립니다. 사실 현명한 마법사들 역시 남자들입니다. 비중이 그저 병풍에 불과한 라다가스트부터 강대한 사루만까지, 현명한 마법사들은 남자들입니다. 전작 <호빗>에서도 여자 주연 등장인물은 없습니다. 심지어 여자 등장인물을 집어넣기 위해 영화 <스마우그의 폐허>는 원작 소설을 크게 고쳐야 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로서 <반지 전쟁>은 여자 마법사가 활약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반지 전쟁>에는 오직 남정네들만 득실거립니다. 이 소설은 오직 남정네 냄새만 풍깁니다.

 

 

반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여자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드루이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여자 드루이드는 전사를 보조하고, 덩굴을 이용해 해골 병사들을 묶고, 멧돼지 동료과 함께 (문자 그대로) 저돌적으로 돌진하고, 부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오직 남정네 냄새만 풍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 드루이드(와 멧돼지 동료)가 멋지게 활약하기 때문에, 던전 탐험 이야기는 새로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게다가 여자 드루이드는 멧돼지 동료와 교감하고 야성을 풍길 수 있습니다. 만약 귀족 놈팽이들이 나무들을 함부로 베고 야생 동물들을 학살한다면, 드루이드는 귀족 놈팽이들과 격렬하게 대립할 겁니다.

 

<반지 전쟁>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레골라스가 녹색 나뭇잎이라고 해도, 레골라스는 귀족 놈팽이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레골라스는 야생 동물들과 교감하지 않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은 고작 야생 동물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레골라스는 왕족입니다. 아라곤은 왕족입니다. 김리는 왕족 친가입니다. 심지어 프로도 배긴스조차 상류층입니다. 만약 높으신 분들께서 행차하시고 대륙의 운명을 논의하신다면, 어떻게 고작 야생 동물 따위가 높으신 분들 사이에 끼어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드 엘프로서 레골라스가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반지 전쟁>은 역동적인 생물 다양성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반지 전쟁>이 중세 유럽 '판타지'임에도, 판타지로서 <반지 전쟁>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별로 발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지 전쟁>은 왕족 가계도를 들여다보느라 바쁩니다. 우드 엘프가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생태적인 상상력보다 왕족 가계도는 훨씬 중요합니다. 만약 판타지 독자가 정말 '자연 친화적인 우드 엘프'를 보고 싶다면, 독자는 <반지 전쟁>보다 <드래곤 라자>를 선택해야 할 겁니다. 레골라스 그린리프보다 이루릴 세레니얼은 훨씬 낫습니다. 레골라스 그린리프보다 이루릴 세레니얼은 정말 드루이드 같습니다. 그리고 <드래곤 라자>는 <반지 전쟁>보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가깝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드루이드 롤모델을 찾기 원한다면, <반지 전쟁>보다 <드래곤 라자>는 백 배, 천 배 나을 겁니다. 이루릴 세레니얼은 여자이고, 야생 동물들과 교감하고, 자연을 독특하게 바라봅니다. 게다가 이루릴은 왕족 같지 않습니다. 이루릴은 요정 여왕과 친하고 중요한 업무를 맡은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도 상류층으로서 이루릴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레골라스는 왕족이고, 왕족으로서 레골라스는 거드름을 피워야 합니다. 왕족으로서 레골라스는 가식을 떨고 허세를 부려야 합니다. 이런 가식과 허세 없이, 왕족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반지 전쟁>에서 왕권 신수설은 판타지 설정입니다.

 

 

왕권 신수설이 설정이기 때문에, 왕족 레골라스는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레골라스를 비롯해 반지 원정대는 높으신 분들 분위기를 풍깁니다. 반지 원정대는 높으신 분들께서 행차하신다고 말합니다. 개돼지 민중들은 높으신 분들께 열등하고 하찮은 대가리들을 숙여야 할 겁니다. 반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모험가 일행은 왕족, 귀족, 상류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드루이드가 평민 출신이라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시골 소녀가 울창한 숲이 놀이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골 소녀는 어른이 되고 드루이드 수업을 받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설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골 소녀는 흑인이나 인디언이나 원주민이 될 수 있습니다. <반지 전쟁>에서 자연 친화적인 레골라스는 아름답고 새끈한 왕족 백인 남자입니다. 반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여자 드루이드는 투박한 흑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드루이드 체격이 우락부락하고,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고, 피부가 검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샤니카 같은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우락부락하고 투박한 흑인 여자 샤니카는 드루이드가 되고 활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샤니카가 흑표범 동료와 함께 (백인 남자 외모의) 흡혈귀 남작을 두들겨팬다면, 이런 장면은 색다른 '중세 유럽' 판타지가 될 겁니다.

 

 

어떤 판타지 팬들은 중세 유럽 판타지와 흑인 여자 드루이드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반박할 겁니다. 그들은 왜 중세 유럽 판타지가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말해야 하는지 반문할 겁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고, <반지 전쟁>이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문제는 허공에서 중세 유럽 판타지가 번쩍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 문화, 계급 차별, 얄팍한 환경 운동은 너무 지배적입니다. 이것들은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 역시 지배적인 관념에게 충성합니다.

 

초월적인 공간 속에서 판타지 팬들은 사변 소설을 읽지 않고, 사변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 사변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체계 속에서 판타지 독자가 사변 소설을 읽는 동안, 판타지 독자는 지배적인 관념을 강화할지 모릅니다. 만약 사변 소설이 가부장 문화를 보여준다면, 독자는 가부장 문화 속으로 훨씬 깊게 빠질지 모릅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만약 현실이 삐뚤어졌다면, 문학은 삐뚤어진 현실을 반영할 테고, 문학 역시 삐뚤어질 테고, 독자는 삐뚤어진 현실 속으로 훨씬 깊게 빠질 겁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에게 창작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삐뚤어진 현실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실 속에는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이 없습니다. 현실 속에는 투박한 흑인 여자 드루이드가 없습니다. 판타지 소설 작가는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을 만듭니다. 판타지 게임 플레이어는 투박한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만듭니다. 소설 작가가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을 만들고 게임 플레이어가 투박한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만드는 동안, 소설 작가와 게임 플레이어는 재료들을 이용합니다. 소설 작가는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 문화, 계급 차별, 얄팍한 환경 운동 같은 지배적인 관념을 이용해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을 만듭니다. 만약 이런 판타지 설정이 대세가 되고 유행이 된다면, 지배적인 관념은 훨씬 강해질 겁니다. 아무리 중세 유럽 판타지에게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은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비록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에게는 재료들,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 새끈한 우드 엘프 왕자님이 없기 때문에, 우드 엘프 왕자님보다 생산 조건은 훨씬 우선합니다. 진정한 문제는 이런 생산 조건입니다. 솔직히 유럽 문명이 식민지 수탈을 저지르지 않고, 양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마녀 사냥하지 않았다면, 중세 '유럽' 판타지 <반지 전쟁>은 세계적인 문학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 <반지 전쟁> 배후에는 추악하고 참혹한 수탈이 있습니다. 판타지 게임 플레이어가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재료들을 제대로 배합해야 할 겁니다. 요리사가 상한 재료들을 버리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비열하고 썩어빠진 재료들을 비판하고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북반구 자본주의 강대국들에서 거대 자본가 계급이 산업 폐기물들을 함부로 버리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나타납니다. 가난한 남반구 민중들이 산업 폐기물들을 버리지 못함에도,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남반구 민중들은 피해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훨씬 많은 피해를 받을 겁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그 자체로서 여자는 피지배 계급이고,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여자는 약자와 비슷한 운명입니다.

 

그래서 기후 정의는 남반구, 여자, 열대 밀림, 해방 사상을 이야기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이런 논의들 없이, 자연 환경 보호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환경을 지키기 원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흑인, 열대 밀림, 해방 사상을 드루이드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반면, 아무리 독자가 여자, 흑인, 열대 밀림, 해방 사상을 <반지 전쟁>에 대입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레골라스가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아무리 독자가 과잉 해석한다고 해도, 독자는 새끈한 백인 왕자 레골라스에게 여자, 흑인, 열대 밀림, 해방 사상을 절대 대입하지 못합니다.

 

 

이건 <반지 전쟁>보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반드시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도 많은 한계들이 있습니다. <반지 전쟁>처럼, <던전스 앤 드래곤스> 역시 진부한 공식(서구 상류층 백인 남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비디오 게임 <네버윈터 나이츠>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만들고 흑표범 동료를 선택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네버윈터 나이츠>에서 서구 문화와 상류층 백인 남자들은 흑인 여자 드루이드와 흑표범 동료를 둘러쌉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샤니카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도, 이건 사건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상투적인 주인공 유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흑인 여자 드루이드가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해도, 분명히 흑인 여자 드루이드와 흑표범 동료는 새끈한 백인 왕족 레골라스와 다릅니다. 적어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여러 가능성들을 열고, 진부한 공식을 극복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노력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반지 전쟁>(이 드러내는 여러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극복 덕분에, 장르는 성장합니다. 비단 장르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사상에게도 여러 한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사상은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흑인 여자 드루이드와 흑표범 동료. 독자가 소설 <반지 전쟁>에서 이런 설정을 이끌어낼 수 있나요?]

 

 

소설 <Moving the Mountain>에서 샬롯 퍼킨스 길먼은 에코 페미니즘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 오늘날, 에코 페미니즘은 샬롯 퍼킨스 길먼을 100% 따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에코 페미니즘은 한계를 극복하고, 샬롯 퍼킨스 길먼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한층 성장합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선구적인 생태 사회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 오늘날, 생태 사회주의는 윌리엄 모리스를 100%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런 덕질 블로그조차 윌리엄 모리스를 반드시 따르지 않습니다. 해방 사상이 한계를 극복하는 것처럼, 장르 역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보세요. <다섯 번째 계절>은 진부한 공식을 극복합니다. 드루이드 플레이어는 <다섯 번째 계절>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에쑨은 조산술사입니다. 하지만 만약 에쑨이 식물 초능력자라면? 만약 에쑨이 스톤 이터보다 삼림 요정과 동행한다면? 만약 에쑨이 바위들보다 식물들을 조종한다면? 만약 에쑨이 아버지 대지보다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한다면? 만약 다섯 번째 계절이 심각한 지진보다 '풀의 죽음'이라면? 흑인 여자 드루이드는 이런 설정들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던전 마스터와 게임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정들이 교차하고 상호 작용하는 동안, 장르는 성장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설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반지 전쟁>을 읽는 동안, 아무리 독자가 에쑨을 반영하고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집어넣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과잉 해석한다고 해도, <반지 전쟁>에는 가능성들이 없거나 너무 미약한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반지 전쟁>이 차별과 편견에서 똑같이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반지 전쟁>보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열린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롤플레잉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롤플레잉 게임으로서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비선형적입니다. 던전 마스터와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야기를 직접 만듭니다. 반면, <반지 전쟁>은 소설이고, 독자는 소설 설정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과잉 해석한다고 해도, 과잉 해석보다 비선형적인 게임 플레이는 훨씬 낫습니다. 비선형적인 게임 플레이가 전복적이고 파격적인 설정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던전스 앤 드래곤스> 규칙을 위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 <반지 전쟁>보다 '롤플레잉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훨씬 낫습니다.

 

 

 사람들은 게임이 유치하다고 무시하고 소설이 고상하다고 떠받듭니다. 하지만 게임보다 소설이 반드시 나은가요? 흑인 여자 드루이드 샤니카는 그게 아니라고 증명합니다. 이런 사례는 게임에게 열린 가능성들이 있다고 증명합니다. 독자가 과잉 해석한다고 해도, 독자는 <반지 전쟁>에서 흑인 여자 드루이드를 이끌어내지 못하나,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샤니카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다친 전사를 치유하기 위해 드루이드 플레이어가 8면체를 두 번 굴리고 "아놔, 씨발, 왜 두 번 모두 1이야? 오늘 다이스 갓이 아침을 잘못 처먹었나?"라고 주절거린다고 해도, 흑인 여자 드루이드 샤니카는 썩어빠진 재료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