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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드래곤 라자>와 <프랑켄슈타인>이 그리는 비인간 존재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드래곤 라자>와 <프랑켄슈타인>이 그리는 비인간 존재

OneTiger 2018. 10. 10. 17:17

비인간 존재(다른 존재)를 만나는 즐거움.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SF 소설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SF 세상에는 숱한 비인간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르고, 그런 차이를 확인할 때, 독자는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진다고 느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있고, 그런 차이를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훨씬 제대로 알 수 있겠죠. 하지만 SF 소설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 역시 숱한 비인간 존재들을 보여줍니다. 중세 판타지에 나오는 흔한 엘프나 드워프부터 도시 판타지에 나오는 흡혈귀나 늑대인간, 그리고 판타지 작가가 상상하는 온갖 기이한 존재들까지….


판타지 소설 역시 얼마든지 비인간 존재들을 늘어놓을 수 있죠. 가령, 소설 <드래곤 라자>는 그런 비인간 존재들을 열심히 고민합니다. 후치 일행이 이루릴과 처음 만났을 때, 후치는 왜 이루릴이 인간들을 돕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이루릴은 왜 자신이 인간을 도와야 하는지 물었어요. 후치는 엘프에게 무조건 오크와 적대하고 인간을 도울 이유가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건 인간적인 관점이었고, 엘프적인 관점이 아니었죠. 칼 헬턴트는 인간과 엘프가 나누는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고요.



이 장면은 어떻게 <드래곤 라자>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바라보는지 알려줍니다. 이 장면 이후, <드래곤 라자>는 꾸준히 후치 일행이 상식을 깨고 비인간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과정 때문에 <드래곤 라자>는 재미있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겠죠. 따라서 비인간 존재를 보고 싶다면, 독자에게는 구태여 SF 소설을 집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판타지 소설 역시 비인간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만약 독자가 SF 소설을 집어들었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어떻게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이 서로 다르게 비인간 존재를 이야기할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과학적인 고증일 겁니다. SF 소설은 과학을 고증하고, 판타지 소설은 그렇지 않아요. 물론 이는 SF 소설이 무조건 현실적인 비인간 존재를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SF 소설들에 등장하는 비인간 존재들 역시 상상력입니다. 아무리 SF 작가들이 치밀하게 고증하거나 설정한다고 해도, 온갖 로봇들과 인조인간들과 개조 생명체들과 돌연변이들은 상상력입니다. 하드 SF 소설조차 그렇고, 소트프 SF 소설들은 훨씬 그렇습니다. 하드 SF 작가에게 막대한 자금과 연구 인력들과 첨단 공장 설비들이 생긴다고 해도, 하드 SF 작가는 강력한 인공 지능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드 SF 작가는 과학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하드 SF 작가는 과학을 이용해 상상합니다.



하지만 과학을 이용해 상상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기반에서 SF 소설은 출발합니다. 따라서 SF 작가가 상상을 펼친다고 해도, 그 기반은 현실이고, 우리는 상상을 이용해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약 상급 인공 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나타난다면, 우리가 로봇 권리를 만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런 로봇 권리를 존중해야 할까요? 그게 법적인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아무도 상급 인공 지능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급 인공 지능은 현실에 기반한 설정이고, 따라서 독자는 그런 설정을 이용해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건 판타지 소설이 모방하는 못하는 차이일 겁니다. 아무리 후치와 이루릴이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그건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죠. 중세 유럽 판타지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현실에 기반하지 않아요. 작가가 그런 공간을 이용해 상상한다고 해도, 작가는 거기에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집어넣지 못하겠죠. 판타지 작가는 어떤 보편적인 감성을 호소할 수 있겠으나, 어지간히 설정을 비틀지 않는다면, 특정한 시대 상황을 부각하지 못하겠죠. (사실 그 보편적인 감성 역시 착각에 불과할지 모르나, 저는 그걸 넘어가겠습니다.)



따라서 SF 소설은 판타지 소설보다 시대 상황을 자세히 부각할 수 있습니다. SF 작가는 인공 지능을 이야기하고 기술적 특이점에 대비할 수 있죠. 판타지 작가 역시 이걸 모방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작가가 골렘과 마법사를 이야기한다면, 그건 로봇과 인공 지능을 비유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판타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SF 설정을 열심히 따라가지 않는다면, 골렘과 마법사 이야기는 비유를 잃을지 모릅니다. 골렘과 마법사 이야기로 인공 지능을 비유한다고 해도, 판타지 작가는 열심히 SF 창작 방법을 쫓아가야 할 겁니다. 판타지 작가가 인공 지능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판타지 작가에게는 이런 노력이 필요하겠죠.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골렘과 마법사 이야기와 비슷할 겁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은 마법사와 골렘과 비슷하겠죠. 그리고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은 인간 기술자와 상급 인공 지능을 이야기할 수 있고요. 로봇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켄슈타인>은 굉장히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메리 셸리는 19세기 유럽 사람이고, 19세기 유럽이라는 시대적인 맥락을 소설 속에 넣었습니다. 판타지 작가 역시 그래야 할 겁니다. 골렘이 나오는 중세 판타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거기에 시대적인 맥락을 집어넣지 못한다면, 판타지 작가는 인공 지능을 비유하지 못하겠죠.



여기에서 '시대적인 맥락'은 소설이 그저 특정 시대만을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은 그저 특정 시대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건 전부가 아닙니다. SF 장르는 그렇게 시시한 장르가 아니죠. SF 장르는 '특정 시대가 또 다른 특정 시대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시대적인 맥락'은 그런 겁니다. 판타지 작가가 SF 소설을 따라가기 원한다면, 판타지 작가는 골렘이 나타나고 사람들의 인식과 관념이 뒤집어졌다고 써야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계몽주의, 19세기 근대적인 진보, 개인의 자유, 사회적인 평등, 근대 과학의 발달에서 비롯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 시대는 또 다른 특정 시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SF 창작 방법은 그런 것입니다. 만약 용사들이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의 평화를 구했다면, 그건 전형적인 판타지 이야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그런 결말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마왕 때문에 사람들의 관념과 인식이 크게 바뀌었을 때, SF 소설은 그런 결말을 선호하겠죠. 비인간 존재들 역시 이런 논리에 적용될 수 있어요. 시대가 바뀌는 맥락에서 SF 소설은 비인간 존재를 이야기하죠. 이건 판타지 소설과 SF 소설이 드러내는 가장 큰 차이점들 중 하나일 겁니다.



<드래곤 라자>는 그런 시대적인 맥락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인간 존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드래곤 라자>에는 그런 맥락이 없어요. 중세 유럽에는 신이 존재합니다. 신은 세상을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의 시대는 고정적이고, 시대적인 맥락을 말하지 못해요. 아쉬움 속에서 후치 네드발은 그저 마법의 가을을 떠나보낼 뿐이죠. 반면, <프랑켄슈타인>에는 그런 시대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비록 <프랑켄슈타인>이 초기 사이언티픽 로망스이기 때문에 시대적인 맥락은 다소 약하나, <프랑켄슈타인>은 분명히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바꾸고 그게 다시 숱한 관념들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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