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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Naev>, 스테고사우루스 장식, 장애인 권리 본문

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Naev>, 스테고사우루스 장식, 장애인 권리

OneTiger 2024. 12. 28. 04:55

[아~, 어떤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스테고사우루스를 묘사합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 가신대~♬" 이 노래처럼,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합니다. 21세기 초반, 이건 신성한 종교 기념일보다 행복한 연말 행사에 가깝습니다. 이 행사에서 화려한 나무는 빠지지 않습니다. 연말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나무를 꾸밉니다.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장식들은 공룡들을 묘사합니다. 21세기 초반과 달리, 아무리 중세 유럽 사람들이 예수 생일을 기념했다고 해도, 그들은 이 동물들을 장식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이 예수 생일을 기념했나요? 이 시대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명한 날이었나요? 아무리 중세 유럽 사람들이 예수 생일을 기념했다고 해도, 21세기 초반과 달리, 스테고사우루스를 장식하기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골판 공룡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비단 유럽 사람들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았습니다. 19세기 문명에서 고생물학이 진보하기 전에, 화석 전문가들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발굴하기 전에, 인류는 이 골판 공룡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크메르부터 이집트, 아즈텍까지, 19세기에서 고생물학이 진보하기 전에, 인류는 이 공룡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1세기 초반조차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떤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묘사한다고 해도, 아…, 이 살아있는 골판 공룡을 만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인간과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는 만나지 못합니다. 중세 문명에서 이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문명처럼, 21세기 초반, 아직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와 만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과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가 만난다면, 이건 현실이 아닐 겁니다. 만약 어떤 소설들이 양쪽이 만난다고 묘사한다면, 이 소설들은 오직 현실만 모방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서 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들이 오직 현실만 모방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와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는 연결될 수 있습니다. 어랄라~,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떻게 스페이스 오페라와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가 연결되나요? <Naev>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 비디오 게임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Naev>는 머나먼 우주 항해를 묘사합니다. 이 비디오 게임에서 은하계는 주된 배경입니다. 현실에서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우주 문명이 아닙니다. 지구에서 아무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현실과 <Naev>는 다릅니다. 양쪽은 너~~무 머나먼 관계입니다.



현실과 <Naev>가 다르기 때문에, 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른 세계'가 됩니다. 비단 <Naev>만 아니라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들 역시 똑같습니다. 소설부터 실사 영화까지, 애니메이션부터 액션 피규어까지, 현실과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릅니다. 우주 전투기부터 타키온 드라이브까지, 기술적인 특이점부터 우주 괴수까지,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른 세계'가 됩니다. 아무리 <Naev>보다 어떤 소설들이 훨씬 진지한 문학들이라고 해도, 만약 이 소설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들이라면, <Naev>가 오직 현실만 모방하지 않는 것처럼, 이 소설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다른 세계'는 아주 커다란 특성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다른 세계는 아주 커다란 특성이 됩니다. 아니, 이건 그저 커다란 특성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만약 <Naev>가 오직 현실만 모방한다면, 음…, 머나먼 우주 항해를 묘사하기는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서 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Naev>와 다른 세계는 필연적인(본질적인) 관계입니다. 아무리 <Naev>보다 어떤 소설들이 훨씬 진지한 문학들이라고 해도, 만약 이 소설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들이라면, <Naev>와 다른 세계가 필연적인 관계인 것처럼, 이 소설들과 다른 세계는 필연적인(본질적인) 관계일 겁니다.



양쪽이 필연적인 관계인 것처럼, 다른 세계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위한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다른 세계 없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쓰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 없이, <Naev>를 제작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비디오 게임처럼, 스테고사우루스는 비슷합니다. 현실에서 머나먼 우주로 항해하기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현실에서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와 만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소설들이 인간과 이 골판 공룡이 만난다고 묘사하기 원한다면, <Naev>가 오직 현실만 모방하지 않는 것처럼, 이 소설들은 다른 세계들을 상상할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교집합입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만나기 위해 인간에게는 (현실보다) 다른 세계가 필요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Naev>는 다른 세계입니다. 다른 세계 없이, 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제작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Naev>처럼, 다른 세계 없이, 인간과 스테고사우루스는 만나지 못합니다. <Naev>와 이 만남에게 다른 세계는 아주 중요한 교집합입니다. 아니, 이건 그저 중요한 교집합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가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만약 인간과 스테고사우루스가 만난다면, <Naev>와 이 만남에게 다른 세계는 본질적인 교집합일 겁니다. 이 교집합처럼, <Naev>와 스테고사우루스는 연결됩니다.



[다른 세계 없이, 인간과 스테고사우루스는 만나지 못합니다. <Naev>는 똑같습니다.]



<Naev>와 스테고사우루스가 연결되기 때문에, 이 비디오 게임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스테고사우루스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연결됩니다. 다른 세계는 양쪽을 연결하기 위한 고리가 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이언스 픽션(SF)에 속합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Naev>에게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겁니다. 이 비디오 게임이 (진지한) 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Naev>가 (진지한) 문학보다 그저 비디오 게임에 불과하다고 해도, 만약 어떤 (진지한) 문학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들이라면, <Naev>와 스테고사우루스가 연결되는 것처럼, 이 문학들과 스테고사우루스는 연결될 겁니다. 문학과 상관없이, 비디오 게임과 상관없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른 세계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문학과 상관없이, 비디오 게임과 상관없이, 서사 판타지(에픽 판타지)는 다른 세계가 됩니다. 현실에서 드워프 왕국이 지하 성채를 건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달리, 서사 판타지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드워프들이 성채를 건설하는 것처럼, 현실과 서사 판타지는 다릅니다. 양쪽이 다르기 때문에, 서사 판타지는 '다른 세계'가 됩니다. <Naev>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Naev>와 서사 판타지는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이 비디오 게임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서사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비록 어떤 SF 독자들이 <Naev>에게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양쪽이 비슷하다고 인정할 겁니다.



비록 어떤 SF 독자들이 <Naev>에게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서사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슷한 위상이 된다고 인정할 겁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연결되기 때문에, 서사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슷한 위상이 되기 때문에, 스테고사우루스와 서사 판타지는 연결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다른 세계는 양쪽을 연결하기 위한 고리가 됩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달리, 장수 거북과 서사 판타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어떤 소설들이 오직 현실만 모방한다고 해도, 인간과 장수 거북이 만난다고 묘사하기는 가능합니다. 이게 가능한 것처럼, 장수 거북과 만나기 위해 인간에게는 다른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장수 거북과 만나기 위해 인간에게 다른 세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와 장수 거북은 연결되지 않습니다. 서사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슷한 위상이 되기 때문에, 장수 거북과 서사 판타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장수 거북보다 스테고사우루스에게는 다른 세계로 연결되기 위한 훨씬 높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의견,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세계>(1912년 소설)부터 <킹콩>(1933년 실사 영화)까지, <선사 시대로의 여행>(1955년 실사 영화)부터 <프라이멀 플래닛>(2025년 비디오 게임)까지, 다른 세계는 인간과 스테고사우루스가 만난다고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세계>, <킹콩>, <선사 시대로의 여행>, <프라이멀 플래닛>은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에 속합니다. 이 사례들은 장수 거북보다 스테고사우루스에게 다른 세계로 연결되기 위한 훨씬 높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비단 <잃어버린 세계>, <킹콩>, <선사 시대로의 여행>, <프라이멀 플래닛>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 역시 비슷합니다. 소설부터 실사 영화까지, 만화부터 보드 게임까지, <공룡과 춤을>부터 <블루 월드>까지, <공룡섬>부터 <지구 중심으로의 여행>까지,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은 인간과 살아있는 공룡이 만난다고 묘사합니다. 이 사례들과 달리, 현실적인 문화·예술들은 양쪽이 만난다고 묘사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가들이 인간과 살아있는 공룡이 만난다고 묘사하기 원한다면, 그들은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을 쓸 겁니다. 이 소설가들과 달리, 비록 어떤 소설가들이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과 장수 거북이 만난다고 묘사하기는 가능합니다. 이게 가능한 것처럼, 비록 어떤 소설들이 오직 현실만 모방한다고 해도, 이 소설들에서 인간과 장수 거북은 만날 수 있습니다. 양쪽이 만나는 것처럼, 장수 거북과 스테고사우루스는 다릅니다. 비단 이 동물, 이 공룡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다른 공룡들 역시 똑같습니다. 코끼리와 브론토사우루스는 다릅니다. 호랑이와 알로사우루스는 다릅니다. 오카피와 람베오사우루스는 다릅니다.



장수 거북과 스테고사우루스가 다른 것처럼, 오카피와 람베오사우루스는 다릅니다. 오카피와 람베오사우루스가 다른 것처럼, 호랑이와 알로사우루스는 다릅니다. 비록 양쪽이 다르다고 해도, 호랑이는 야생 동물입니다. 이 동물로서, 호랑이는 생물 다양성에 속합니다. 21세기 초반, 생물 다양성은 커다란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 위기는 너무 치명적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이 수준처럼, 수마트라 호랑이는 멸종 위기 동물입니다. 비단 이 호랑이만 아니라 다른 야생 동물들 역시 비슷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커다란 위기에 빠지는 것처럼, 대규모 멸종은 다가오는 중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환경 운동이 대규모 멸종을 걱정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가 대립적인 관계라고 인식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인간들(문명)이 파괴하기 때문에, 자연(야생)이 위기에 빠지나요? 그건 아닙니다.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은 똑같은 계급에 속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가난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코끼리 상아를 판매한다면, 그들은 돈들을 벌 겁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이 사람들은 코끼리를 죽입니다. 그 자체로서, 밀렵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난 때문에, 밀렵꾼은 코끼리를 죽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이 가난한가요? 대답은 자본주의입니다. 어휴…, 이 경제에서 빈부 격차는 너무 커다란 문제입니다.



[비록 코끼리, 장수 거북과 브론토사우루스, 스테고사우루스가 다르다고 해도….]



자본주의에서 빈부 격차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범죄들에서 어떤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니, 자본주의에서 빈부 격차는 그저 커다란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 경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생합니다. 착취 없이,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을 벌지 못합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20세기 신자유주의,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처럼, 착취 없이,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을 벌지 못합니다. 19세기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서구 제국주의부터 기후 변화까지, 이 사례들은 자본주의와 착취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증명합니다. 양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난은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가난은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21세기 초반,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경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가난이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이건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가난 때문에, 세계적으로, 범죄들에서 어떤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범죄들은 야생 동물들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코끼리처럼, 만약 21세기 초반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한다면, 골판들을 판매하기 위해 밀렵꾼들은 이 공룡을 죽일 겁니다. 이 비극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밀렵꾼들이 코끼리를 죽이는 것처럼, 만약 21세기 초반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한다면, 이 공룡은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착취이기 때문에, 이 경제와 코끼리는 대립적인 관계입니다. 만약 21세기 초반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한다면, 코끼리처럼, 자본주의와 이 골판 공룡은 대립적인 관계일 겁니다. 이 관계처럼, 인류, 문명은 나쁜 문제가 아닙니다. 어휴…, 인류(문명)보다 자본주의는 나쁜 문제입니다. 비단 밀렵만 아니라 기후 변화 역시 똑같습니다. 21세기 초반, 이 행성급 재앙은 위험한 수준입니다. 어떤 보고서들은 밀렵보다 기후 변화가 훨씬 많은 코끼리들을 죽인다고 주장합니다. 코끼리처럼, 이 행성급 재앙은 야생 동물들을 죽입니다. 왜 극단적인 기후들이 발생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경제입니다. 대규모 산업들은 이 경제에게 종속됩니다. 자본주의에게 훨씬 많은 돈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이 경제는 너무 많은 상품들을 제조(하고, 유통하고, 판매)합니다. 이 과정은 너무 많은 에너지들을 소비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자본주의와 석탄들, 석유들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관계 때문에, 만약 자본주의가 석탄들, 석유들을 포기하고 재생 에너지들에게 의지한다면,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게 어렵기 때문에, 대규모 산업들은 너무 많은 석탄들, 석유들을 태웁니다. 자본주의 때문에, 지구 온도는 상승합니다.



대규모 산업들이 너무 많은 석탄들, 석유들을 태우기 때문에, 지구 대기 중에서 너무 많은 온실 가스들은 증가합니다. 이 가스들이 증가하기 때문에, 지구 평균 온도는 상승합니다. 이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기후들은 발생합니다. 밀렵꾼들보다 살인적인 폭염이 훨씬 많은 코끼리들을 죽이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야생 동물들을 죽입니다. 이 행성급 재앙은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가난합니다. 이 사람들은 대규모 산업들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지구 가열화는 인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행성급 재앙은 인류보다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만약 21세기 초반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한다면, 밀렵꾼들보다 살인적인 폭염이 훨씬 많은 코끼리들을 죽이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이 공룡을 죽일 겁니다. 이 비극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가 자본주의 문제이기 때문에, 스테고사우루스와 이 경제는 대립적인 관계입니다. 아무리 밀렵꾼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스테고사우루스를 죽입니다. 이 경제가 이 공룡을 죽이는 것처럼, 환경 운동은 이 경제를 긍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자본주의가 대립적인 관계인 것처럼, 환경 운동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운동과 자본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환경 운동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장애인 권리 운동은 다르지 않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에게 자본주의가 원수인 것처럼, 환경 운동에게 이 악랄한 경제가 원수인 것처럼, 장애인 권리 운동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게 훨씬 많은 돈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가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기 원합니다. 만약 갑이 비장애인이라면, 만약 을이 장애인이라면, 임금 노동자로서, 자본주의는 을보다 갑을 선호할 겁니다. 비장애인으로서, 똑같은 시간 동안, 을보다 갑은 많은 상품들을 제조합니다. 자본주의는 많은 상품들을 판매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가 많은 상품들을 판매하기 원하기 때문에, 을보다 갑이 많은 상품들을 제조하기 때문에, 임금 노동자로서, 자본주의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장애인으로서, 이 경제에게 을은 그저 잉여 인간에 불과합니다. 을이 잉여 인간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장애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장애인 권리 운동은 대립적인 관계입니다. 환경 운동과 이 경제가 대립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장애인 운동과 환경 운동은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이 비슷한 위상이 되기 때문에, 환경 운동은 비단 생물 다양성만 아니라 장애인 권리 역시 고민할 수 있습니다.



[환경 운동은 장애인 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카를 마르스크(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계급 사회라고 주장합니다. 이 경제에서 빈부 격차가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자본주의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입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원한다면, 이 운동은 수직적인 관계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합니다. 만약 장애인이 권리를 얻지 못한다면, 이건 수평적인 관계가 아닐 겁니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지하기 위해 환경 운동은 장애인 권리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비단 장애인 권리만 아니라 다른 권리들 역시 비슷합니다. 여자, 흑인, 원주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처럼, 수평적인 관계는 중요합니다.

 

만약 트랜스젠더가 권리를 얻지 못한다면, 이건 수평적인 관계보다 수직적인 관계일 겁니다. 카를 마르스크(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수평적인 관계보다 수직적인 관계와 자본주의는 어울립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트랜스젠더 차별을 외면한다면, 수직적인 관계를 비판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수직적인 관계와 자본주의가 어울리기 때문에, 만약 환경 운동이 트랜스젠더 차별을 외면한다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 물론, 카를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과 계급을 연결합니다.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계급은 정체성보다 생산 수단입니다.



아무리 계급과 생산 수단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임금 노동자로서, 트랜스젠더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가 트랜스젠더를 차별한다면, 영리 기업은 트랜스젠더를 고용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 차별은 그저 문화적인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영리 기업이 트랜스젠더를 고용하지 않는 것처럼, 트랜스젠더가 돈들을 벌지 못하는 것처럼, 이 차별은 비단 문화적인 문제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훨씬 많은 돈들을 위해 자본주의가 지구 가열화를 외면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관점에서 환경 운동은 이 악랄한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 차별이 비단 문화적인 문제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관점에서 환경 운동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는 만날 수 있습니다. 환경 운동은 트랜스젠더 권리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비단 동정, 연민, 박애만 아니라 경제 역시 환경 운동과 성 소수자 운동을 연결하기 위한 고리가 됩니다. 어휴…,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해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를 외면합니다. 어휴…,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해 자본주의는 장애인이 인간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건 커다란 교집합입니다. 아니, 이건 본질적인 교집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너무 엉뚱하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크리스마스가 <Naev>로 연결되기 때문에, <Naev>가 스테고사우루스로 연결되기 때문에, 스테고사우루스가 지구 가열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지구 가열화가 장애인 권리로 연결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너무 엉뚱하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 스테고사우루스, 스페이스 오페라, 지구 가열화, 장애인 권리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스테고사우루스와 장애인 권리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이 게시글은 거짓들보다 사실들을 주장합니다.

 

19세기 문명에서 고생물학이 진보하기 전에, 인류는 스테고사우루스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이 골판 공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와 만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이 골판 공룡은 다른 세계로 연결됩니다. 비록 양쪽이 연결된다고 해도, 만약 21세기 초반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했다면, 지구 가열화는 이 골판 공룡을 죽였을 겁니다. 어휴…, 이 행성급 환경 재앙은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비단 지구 가열화만 아니라 장애인 권리 역시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아니, 이건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 게임 <Naev>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598530/Naev/

※ 사진 <Elephant On …> 출처: Filip Olsok,
http://www.pexels.com/photo/elephant-on-green-grass-field-4003736/

※ <비마이너> “尹 탄핵으로 장애인 권리 보장하는 민주주의 실현하자”,
http://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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