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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괴수물을 넘어서는 괴수 소설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괴수물을 넘어서는 괴수 소설

OneTiger 2017. 5. 25. 20:00

공자는 "포악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독재나 부패 정치가 육식동물보다 훨씬 많은 고통을 양산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육식동물의 공포에서 매력을 느끼나 봅니다. 육식동물의 공포를 이야기하는 창작물들은 넘쳐나고, 대부분 이런 창작물들은 큰 인기를 끌지 못하지만 꾸준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 가운데 종종 명작이 탄생할 수 있고요. <죠스>가 너무 인상적인 까닭에 '육식동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야기'는 너무 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창작물들도 종종 번득이는 영감이나 발상을 선보이곤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주제나 사변, 사건 전개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뻔한 소재라고 해도 창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겠죠. 때때로 이런 창작물은 사이언스 픽션의 울타리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작가는 소재의 차별성을 위해 혹은 독자에게 좀 더 공포를 불어넣기 위해 실존 동물이 아니라 가상의 동물을 상상합니다. 스티브 앨튼의 <메그>는 좋은 사례입니다. <메그>는 <죠스>와 비슷해 보이는 소설이지만, 고대의 거대 상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죠스>와 차별성을 선보일 수 있었죠.



이런 창작물들의 가장 큰 단점은 작가가 너무 자극을 추구하기 때문에 소설이 전반적으로 얄팍해진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괴수의 공포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부분을 무시합니다. 이런 경향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소설은 그냥 괴수를 강조하는 설정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추럴 셀렉션>이나 <프래그먼트>는 이런 얄팍함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한없이 가볍고, 사건 전개는 상투적이고, 깊이 있는 주제도 없고, 카타르시스 따위는 애초에 보이지 않고…. 물론 이런 소설들은 나름대로 고증에 매달리지만, 아무리 고증에 매달리면 뭐하겠습니까.


SF 소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SF 작가는 과학적 고증만큼 상상 과학적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흉포한 괴수 몇 마리나 내놓는다고 해서 그게 장대한 비전으로 이어질 리 없죠. <내추럴 셀렉션>은 뭔가 좀 현실적인 괴수를 보여주기 위해 애씁니다. <프래그먼트>는 온갖 괴수들을 미친 듯이 보여줍니다. 괴수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별별 생명체들을 선보이기 바쁩니다. 하지만 이런 괴수들은 그저 단편적인 공포만 강조할 뿐이고, 뭔가 장대한 비전으로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원대한 비전을 선보이는 괴수, 가령,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다곤이 무서운 이유는 작가가 열심히 괴수만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죠.



SF 작가는 아니지만, 빅토르 위고는 <바다의 노동자>에서 거대 문어를 이용해 치열한 사변을 늘어놓습니다. <바다의 노동자>는 <파리의 노틀담>이나 <레 미제라블>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지만, 그래도 빅토르 위고가 바다의 온갖 감성을 묘사하는 대목은 독자가 '소설의 읽는 맛'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이 소설에서 거대 문어는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위고는 바다의 혐오스러운 감성을 이 문어에게 완전히 집중한 것 같습니다. 3류 촉수물들은 널리고 널렸으나, 이만큼 거대 문어의 휘감는 성질을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할 듯합니다.


물론 빅토르 위고는 세계적인 대문호입니다. <내추럴 셀렉션>과 <프래그먼트>를 이런 대문호와 비교할 수 없겠죠. 그래도 위고를 언급한 이유는 괴수 소설이 그저 괴수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가는 괴수를 이야기할 때, 괴수를 넘어 더 거대한 뭔가를 주장해야 할 겁니다. 아마 괴수의 공포에만 극단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그 덕분에 재미를 보장하는 소설도 있겠죠. 이게 틀린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말초적인 감성에만 집착하기 쉽고, 결국 얄팍한 이야기로 흘러간다고 봅니다. 재미만 보장되면 장땡이겠지만, 저런 얄팍한 책은 뭔가 재미도….



문화 비평가 콜린 윌슨은 <정신기생체> 서문에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말초적인 내용에 집착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콜린 윌슨이 러브크래프트를 잘못 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살이 찢어지고 피가 터지는 고어나 슬래쉬 장면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괴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런 장면들도 나오지만, 러브크래프트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죠. 작가 본인이 말했듯 러브크래프트는 괴수 소설보다 <에리히 잔의 선율>이나 <우주에서 온 색채>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인스머스의 그림자>나 <크툴루의 부름>이 아니라….


게다가 러브크래프트는 의외로 피칠갑 하드고어 소설을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양반은 세상 저편에서 꿈틀거리는 뭔가 기이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어두운 비밀을 논하기 원했습니다. 그게 훨씬 무섭다고 생각했죠. 다곤 같은 괴수는 그런 꿈틀거리고 기이하고 형이상학적인 비밀의 매개체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다곤은 그냥 괴수가 아니라 신적 위상입니다.) 저는 이런 방법이 괴수 소설을 쓰기에 더 적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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