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서평과 정체성 문제 본문
경향신문에는 고장원 평론가가 연재하는 SF 소설 서평들이 꾸준히 올라옵니다. 최근에는 제임스 호건이 쓴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이 올라왔군요. 이 소설은 <거인 시리즈> 중 하나이고, <별의 계승자>에서 이어지는 속편입니다. <별의 계승자>는 이른바 학술 하드 SF 소설이라고 불립니다. 별명처럼 이 소설은 엄중한 자연 과학적 상상력과 학술적인 논의에 치중해요. 고장원 평론가는 이런 하드 SF 소설이 비단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만 아니라 사회적인 주장을 담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이 초식동물 사회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이 소설에는 초식동물에게서 진화한 지적 문명이 등장하고, 그 문명은 꽤나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합니다. 고장원 평론가는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이 현대 인류 문명에게 대안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정말 초식동물에게서 진화한 지적 문명이 온화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초식동물이 온순할 거라고 생각하나, 초식동물들 역시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심지어 초식동물들은 서로 잔인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초식동물들은 절대 순진하지 않아요.
제임스 호건 역시 그런 사실을 알 겁니다. 이런 하드 SF 작가가 그런 사실을 모를 이유는 없겠죠.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은 그저 초식동물이 무조건 온순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복잡한 하드 SF 소설로서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은 이질적이고 풍부한 과학적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이 정말 현대 인류 문명에게 무엇을 시사할 수 있는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고장원 평론가는 이런 하드 SF 소설이 사회적인 주장을 담을 수 있다고 설명했으나, 사례를 잘못 고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초식동물이 진화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한다는 주장은 진화 심리학에 크게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화 심리학은 사회 생물학 같은 편파적이고 수구 꼴통 같은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남자들은 남성이 무조건 섹스를 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남자들은 남자가 바람을 피워도 그게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변호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성 폭행할 때, 남자들은 섹스가 남자의 본능이라고 떠듭니다. 심지어 에드워드 윌슨 같은 권위적인 과학자조차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진화 생물학은 21세기 우생학이 될 수 있고, 지배 계급을 변호하는 수구적인 사상이 될 수 있어요.
만약 인류가 초식동물 유전자를 이용해 자신들을 개조한다면, 훨씬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저는 인류가 초식동물 유전자를 이용하기 바랍니다. 저는 개조 인류가 21세기 초기 문명보다 훨씬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신체 개조 설정은 커다란 문제를 남깁니다. 이런 신체 개조 설정은 그저 태생적이고 생물적인 요소에 치중할 뿐이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이 유전자 조작 기술을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온순하게 개조할지 모르겠군요. 문명이 흐르는 동안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에게 온갖 세뇌들과 거짓말들과 왜곡들을 주입했습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이 저항하기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평화로운 초식동물 유전자를 이용할 수 있다면, 지배 계급은 개조 수술을 마다하지 않을 테고, 피지배 계급을 개조하겠죠. 따라서 평등한 사회 구조는 평화로운 유전자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아무리 인류가 자신들을 평화롭게 개조할 수 있다고 해도, 평등한 사회 구조가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개조 수술 따위는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초식동물 유전자 따위가 아닙니다. 언젠가 그런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당장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초식동물 유전자보다 평등한 사회 구조입니다. 하지만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을 이야기하는 서평에서 고장원 평론가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서평은 왜 인류 문명이 극단적인 전략 병기를 개발하고 기후 변화를 불러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서평은 인류 문명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계급 사회이고, 그런 사회 구조적인 모순이 전쟁과 환경 오염을 부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고장원 평론가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우리가 무슨 이데올로기를 따르는가)을 빼먹고, 대신 거기에 정체성 문제(우리가 누구인가)를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초식동물(우리는 평화로운 동물이다)이라는 정체성 문제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덮습니다. 여기에 계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정체성만 존재합니다. 이런 정체성 논의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만 존재하고, 옳고 그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인 표현형에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왜 남자들이 본능을 들먹이고 성 폭행을 두둔하겠어요? ("어쩌라고? 남자는 원래 섹스를 좋아해. 남자로 태어난 게 죄냐?")
하지만 정말 이 세상이 정체성으로 굴러가나요? 이 세상에 계급이 존재하지 않나요? 아프리카 시골의 가난한 농민 할머니와 캐나다 백인 중산층 남자가 정체성 문제인가요? 가난한 편의점 여대생(남한이 정말 목을 매다는 단어죠.)이 편의점 점장 중년 남자에게 성적/경제적 착취를 당한다면, 이게 정체성 문제인가요? 이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이 세상은 평등한 원형 탁자가 아닙니다. 인류 문명은 아주 극단적인 계급 사회이고,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착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과 환경 오염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서평은 이런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초식동물 문명이 평화로운 사회를 보여준다고 해도, 현대 인류 문명이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고장원 평론가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마 지배 계급을 변호하기 위해 고장원 평론가가 일부러 저렇게 주장했겠어요. 하지만 정말 사회적인 주장을 말하고 싶었다면, 저 서평은 우생학적인 진화 운운하지 말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이야기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