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이 우주 4X 게임을 떠받치다 본문
[만약 SF 소설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은 장대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바둑이나 체스, 윷놀이나 백개먼, 화투나 블랙잭 같은 것들은 게임이라고 불립니다. 네, 이것들은 게임입니다.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거기에 따라 승부나 성패를 가린다면, 그건 게임이라고 불릴 수 있겠죠. 바둑이나 체스는 머리 싸움이고, 윷놀이나 백개먼에는 운이 좀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주사위 신(다이스 갓)이 존재하죠.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서로 승부를 가리는 게임들 이외에 문제를 푸는 게임들 역시 많습니다.
미로나 수수께끼, 루빅 큐브, 숨은 그림 찾기 같은 것들 역시 게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게임 세계에서 퍼즐 게임들은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하고, 제작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인디 게임 제작진들 역시 여러 퍼즐 게임들을 선보입니다. 저는 체스나 윷놀이, 미로,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게임이라는 본질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유는 규칙에 따라 승부나 성패를 가리는 재미 때문이겠죠. 모든 게임이 똑같은 목표를 추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토리텔링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 세계에는 규칙에 따른 승부나 성패보다 분위기, 이야기, 그림체, 음악을 즐기는 게임들 역시 존재합니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유는 승부나 성패 때문일 겁니다. 바둑이나 체스나 윷놀이나 백개먼이나 미로나 수수께끼, 퍼즐은 규칙에 따라 승부나 성패를 가리는 게임입니다. 근본적으로 게임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창의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입니다. 거기에서 게임은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문제 풀이 이외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는 게임들 역시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비디오 게임들은 문제 풀이에 동영상과 설정과 이야기와 배경 음악과 화려한 시각 효과를 덧붙입니다.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4X 전략 게임은 어마어마한 SF 선물 세트입니다.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4X 게임은 온갖 SF 설정들을 종합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신나게 스페이스 오페라를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좋아하는 종족을 만들고, 원하는 행성들을 개척하고, 우주선들을 조립하고, 아득한 은하계를 탐사할 수 있어요. 게임 플레이어는 무력 충돌 없이 평화롭고 무정부적인 우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게임 플레이어는 호전적으로 다른 종족들을 말살하는 은하 제국주의자가 될 수 있죠.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4X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선호하는 SF 소설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러 게임 플레이어들은 '컨셉을 잡고' 게임에 임합니다. 우주 전략 게임을 플레이할 때, 어떻게 우주를 개척하고 건설할지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미 진로를 결정해요. SF 소설을 잘 아는 게임 플레이어는 SF 소설을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SF 소설을 잘 모르는 게임 플레이어 역시 익숙한 클리셰들을 바탕으로 컨셉을 잡을 수 있겠죠. 평등하고 공산주의적인 기술적 유토피아나 외계인들을 차별하는 은하 제국은 유명한 설정입니다. SF 소설을 잘 모르는 사람들 역시 저런 설정을 들어봤을 테고, 거기에 따라 컨셉을 잡을 수 있겠죠. 가령, 어떤 게임 플레이어가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감동적으로 읽었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컬쳐 같은 세력을 컨셉으로 잡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게임 플레이는 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체스나 윷놀이나 화투 같은 게임 플레이와 많이 다릅니다. 체스를 두거나 윷놀이를 할 때, 컨셉을 잡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체스를 두거나 윷놀이를 할 때, 사람들은 그저 규칙에 따라 머리를 굴릴 뿐입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우주 전략 게임은 사람들에게 설정을 고려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저는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우주 전략 게임 역시 문제 풀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과 인구와 기술과 생산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전략 게임은 복잡해 보이나, 그저 복잡한 문제 풀이에 불과해요.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게임은 진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과 기술과 생산 비용을 계산해야 하고, 그런 문제 풀이는 핵심적인 게임 플레이에 속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행위가 사이언스 픽션일까요. 아니죠. 진짜 사이언스 픽션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대신) 우주에서 우리 인류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하겠죠. 그래서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게임은 진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겠죠. 하지만 이런 우주 전략 게임을 플레이할 때, 컨셉을 잡는 행위는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은 다양한 설정들을 내놨고, 게임 플레이어는 그걸 게임에서 구현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런 설정을 간접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해도, 컨셉을 잡고 실행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겠죠. 그래서 종종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SF 소설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스페이스 엠파이어즈> 같은 우주 전략 게임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주 전략 게임이 등장한 이유는 SF 작가들이 멋진 설정들을 깔아놨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 역시 컨셉을 잡을 수 있겠죠.
이 글에서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게임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SF 소설을 이야기하기 위해 게임들을 줄줄이 늘어놨습니다. SF 게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SF 게임 역시 존재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SF 게임을 떠받치는 디딤돌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