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유럽이라는 태생적인 특징 본문
흔히 평론가들은 고전 소설이 시대를 초월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는 꽤나 많은 논란들을 부르는 평가입니다. 정말 고전 소설이 시대를 초월할까요? 정말 고전 소설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감성을 전달할까요? <춘향전>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전 문학이 될 겁니다. 하지만 18세기 조선 사람들과 20세기 한국 사람들이 <춘향전>에게서 똑같은 감성을 느낄 수 있을까요? 만약 15세기 조선 사람들이 <춘향전>을 읽는다면, 양반과 기생이 서로 좋아하는 이야기를 뭐라고 느낄까요? 양반과 상놈이 똑같이 <춘향전>을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춘향전>은 그저 옛날 소설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게 <춘향전>은 정말 생생한 현실일 겁니다. 착취적인 신분 질서 속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착취적인 신분 질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춘향전>에서 신분 차별을 느낄지 모르죠.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춘향전>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을까요? 정말 고전 소설이 시대를 초월할까요? 이런 평가가 많은 논란들을 부른다고 해도, 그건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극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셰익스피어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남아메리카 부족민이었다면, 은광 속에서 고통스럽게 노동하고 죽어갔을지 모릅니다. 유럽 침략자들이 착취한 부족민들 중에서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보다 위대한 극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유럽 예술가들을 쉽게 떠들 수 있으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 예술가들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유럽은 강대국이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가 강대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술 작품조차 강대국과 권력에게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강대국과 권력은 얼마든지 예술 작품을 휘두를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만약 남아메리카 제국들이 대항해 시대를 개막하고, 유럽 대륙을 침략하고, 유럽 사람들을 착취하고, 막대한 부를 얻었다면, 우리는 유럽이 아니라 남아메리카 예술가들을 칭송했을 겁니다. 우리가 유럽 예술가들을 칭송하는 이유는 유럽 예술가들이 정말 위대하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유럽이 강대국이기 때문이죠. 이는 유럽 소설이나 유럽 음악이 엉터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소설이나 <캐논> 같은 음악이 얼마나 멋집니까.
중요한 것은 유럽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 예술을 쉽게 접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유럽이나 미국 예술을 훨씬 많이 접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고전 소설 목록들은 유럽 작가들과 미국 작가들을 늘어놓습니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개막하지 않았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설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저 유럽 젊은이가 아름다운 유부녀를 사랑하는 이야기에 불과했을지 모르죠. 이런 상황에서 정말 고전 소설이 시대를 초월하고 보편타당한 감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전 소설들이 좋다고 생각하나, 그건 논란들이 많은 문제일 겁니다. 이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엉터리 소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권력은 예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예술은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권력 관계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예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문화 예술을 감상할 때,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그런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저 그런 짝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권력 관계를 의식해야 할 겁니다.
저는 고전 소설이 그런 문제 의식을 피하지 못하는 것처럼 SF 소설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SF 소설 역시 문화 예술이고, SF 소설 역시 권력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겁니다. SF 작가들은 외계 항성계와 미래 문명을 열심히 묘사합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이 정말 저런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SF 작가들이 발휘하는 상상력은 권력자들이 허용한 상상력이 아닐까요? SF 작가들이 뭐라고 상상하든, 권력자에게 불편하지 않은 부분을 교묘하게 회피하지 않을까요? SF 작가들이 그저 불편한 상상력을 회피하고 안락한 상상력만 발휘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드 SF 소설들이 전복적이거나 혁명적이라고 칭송하나, 정말 하드 SF 소설들이 전복적이거나 혁명적일까요? 분명히 숱한 하드 SF 소설들은 놀랍습니다. 그런 소설들은 경이적이고, 하드 SF 소설들 덕분에 독자들은 원대한 우주를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하드 SF 소설을 읽기는 어려우나, 책을 덮은 이후 독자는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드 SF 소설들이 어렵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을 버리지 못하겠죠. 비단 하드 SF 소설만 아니라 경이적인 다른 뉴웨이브 소설들이나 사이버펑크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추구하는 전복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 권력 관계가 예술 창작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오직 SF 소설만 예외가 되지 못할 겁니다. SF 소설 역시 권력 관계에 포섭될 테고, 권력 관계는 SF 소설에게 일정한 것들을 허용할지 모릅니다. SF 작가들 역시 얼마든지 권력의 나팔수가 되거나 권력자들을 빨아줄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들 역시 착취적인 사회 구조를 용인하거나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SF 소설은 상상력을 펼칠 수 있습니다. 여러 세계 문학들이나 클래식 음악들처럼, SF 소설들 역시 유럽 태생입니다. 그런 SF 소설들이 정말 전복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