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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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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장르 정의

투영하는 SF, 끌어오는 SF

OneTiger 2018. 9. 25. 18:53

종종 이 블로그에서 저는 SF 작가가 현재의 문제를 미래에 투영하거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SF 작가는 현재를 미래에 투영하거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옵니다. 따라서 SF 세상에는 '투영하기'와 '끌어오기'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투영하기는 SF 작가가 현재의 문제를 미래에 대입한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상정하는 숱한 SF 소설들은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가령, 그렉 이건이 쓴 <쿼런틴>은 미래 디스토피아 도시를 그립니다. 하지만 미래 디스토피아 도시가 그렇게 나타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렉 이건이 묘사하는 미래 시대는 오직 현재의 문제들을 뻥튀기한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그렉 이건은 여러 모드들을 언급합니다. 모드는 인간의 생체를 조절하고 강화하는 생물적인 삽입 장치입니다. 모드를 장착한 인간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침착하게 위기를 돌파하거나, 기본적인 욕구를 억제하거나, 아주 날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은 모드들을 필수적으로 장착합니다. 미래에 정말 이런 모드가 등장할까요? 미래 경찰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이런 생물적인 장치를 집어넣을까요? 아무도 그걸 모르겠죠.



왜 그렉 이건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래를 그렸을까요? 그렉 이건이 예언자일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그렉 이건 같은 SF 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SF 작가들은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에게는 미래를 예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강연에서 청중이 물었을 때, 이안 뱅크스는 "당신은 SF 작가들에게 미래를 그리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착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청중은 SF 작가들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지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하드 SF 작가들조차 미래를 함부로 예언하지 못할 겁니다. 미래를 예언하지 못한다면, 왜 SF 작가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미래 시대를 상정할까요?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현재의 문제를 더욱 깊게 고찰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는 현재를 떠나야 합니다. 현재의 문제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런 시도는 빗나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장선과 단절을 바라볼 때, 우리는 파격적인 뭔가를 느낍니다. 중요한 것은 그겁니다. 파격적인 뭔가. 미래 경찰들이 생물적인 장치를 집어넣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상상력에서 파격적인 뭔가를 느낍니다.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고, 앞으로 역시 바뀔 겁니다. 주류 문학들이나 다른 장르 소설들은 거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소설들은 그걸 인정하고, 거기에서 파격적이고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감성을 이끌어냅니다. 그것 때문에 SF 작가들은 미래를 그립니다. 물론 어떤 SF 소설들은 여전히 현재를 말합니다. 테크노 스릴러 소설들은 별로 멀리 나가지 않죠. 소설 <쥬라기 공원>은 미래 문명을 그리지 않습니다. <쥬라기 공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똑같은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에는 유전 공학 공룡들이 돌아다닙니다. 이 소설을 쓸 때, 마이클 크라이튼은 미래를 현재로 불렀습니다.


배경 시대는 현재이나, 상상력은 미래입니다. 이런 소설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사실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기지개를 켰을 때, 이미 이런 소설들은 존재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든다고 이야기했으나, 미래 시대를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쥘 베른은 만능 잠수함 노틸러스를 상상했으나, 노틸러스는 미래 잠수함이 아닙니다. 노틸러스는 여전히 증기 함선들과 싸웁니다. 넓은 관점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이나 제프 밴더미어가 쓴 <소멸의 땅> 역시 여기에 속할 겁니다.



<해저 2만리> 같은 소설은 만능 잠수함을 묘사하나 미래에 상상력을 던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네모 선장은 미래 해저 문명을 언급했으나, 전반적으로 <해저 2만리>는 19세기 유럽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SF 소설들이 너무 미래에 몰입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SF 소설들이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21세기는 혁신과 미래와 전망을 운운하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미래가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그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쩌면 SF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 사람들은 혁신과 변혁과 전망에 익숙해야 할지 모릅니다. 세계가 변하지 않기 바란다면, 그런 사람들이 SF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SF 소설들이 계속 새로운 것들을 내놓고 인류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무너뜨릴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이 불편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인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적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런 이야기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겠죠. 많은 사람들은 관습과 전통과 (고전적인) 질서를 중시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미래에 발을 들여놓지 못합니다. 만약 SF 소설들이 새롭고 낯선 미래를 들이댄다면, 사람들은 그게 부담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만약 SF 소설들이 미래를 보여주지 않고, 낯선 개념들을 현재로 끌어온다면, 사람들은 한결 편하게 SF 소설들을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물론 이건 이런 '끌어오기 소설들'이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블러드 뮤직>이 쉬운 소설일까요?



투영하기와 끌어오기 양쪽에는 모두 장점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주제는 투영하기에 어울릴지 모르고, 어떤 주제는 끌어오기에 어울릴지 모르죠. '끌어오기 소설들'은 현재에 낯선 것을 집어넣고, 현재가 뒤집어지는 과정을 묘사할 수 있겠죠. 독자들은 다짜고짜 낯선 미래를 마주치지 않고, 그런 변화를 따라갈 수 있고요. 작가 역시 어떻게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는지 살필 수 있을 겁니다. 미래에 직접 뛰어들기(투영하기) 전에 작가는 어떻게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는지 고찰하기 원할지 모르죠. 이건 끌어오기 소설들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낯선 미래를 대면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을 대면하는 것은 중요하겠죠. 그렇게 미래를 바라볼 때, 투영하기 소설들처럼 끌어오기 소설들 역시 변화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투영하기와 끌어오기 모두 시대적인 변혁을 이야기할 수 있죠.


물론 SF 작가들은 투영하기와 끌어오기 이외에 다른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어요. <마술사가 너무 많다>처럼 어떤 소설은 과거를 부풀리고 변주하거나, <비포 아담>처럼 어떤 소설은 아예 선사 시대로 내려갈 수 있죠. 누군가는 어떻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지 물을 겁니다. 하지만 미래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가 다시 미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래는 존재합니다. 산업 혁명 없이 어떻게 우주 문명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스팀펑크 소설 역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에 일조할 수 있을 겁니다. 산업 혁명을 뒤돌아볼 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요.



이렇게 여러 방법들은 시대 변화를 바라봅니다. 어떻게 미래가 바뀔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나, 분명히 미래는 바뀔 겁니다. SF 작가들은 그걸 인정하고, 여러 방법들로 계속 그걸 고찰합니다. 그런 방법들 중에서 투영하기와 끌어오기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방법들이 미래를 직접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여러 문학들 중 오직 SF 소설들만 이런 방법을 동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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