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이 바라보는 자연 환경 본문
[메레디스는 눈이 내리는 숲 속 풍경에 감탄할 겁니다. 인조인간 데이빗이 숲 속 풍경에 감탄할까요?]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우주 탐사물입니다. 외계인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인류 과학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외계 행성으로 날아갑니다. 외계 행성은 가깝지 않고, 당연히 이건 장거리 우주 항해입니다. 우주선 프로메테우스가 외계 행성 LV-223으로 날아가는 동안 우주선 승무원들은 깊은 잠에 빠집니다. 데이빗-8은 예외입니다. 데이빗-8은 합성 개체(인조인간)이고,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항해하는 동안, 데이빗은 혼자 우주선을 관리합니다. 거대한 우주선 속에서 데이빗이 혼자 돌아다닐 때, 이 장면은 꽤나 쓸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인조인간이고, 그래서 데이빗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영화는 데이빗이 외로움을 느끼는지 확실히 표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데이빗에게는 어떤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데이빗은 창조주에게서 벗어나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조인간을 만드는 것처럼, 심지어 데이빗은 자신 역시 창조주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데이빗에게 감정과 욕망이 있다면, 데이빗은 외로움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데이빗이 외롭다고 느낀다고 확실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은 꽤나 모호합니다. 데이빗이 정말 인간을 편드나요? 데이빗이 인간을 질투하지 않나요?
만약 데이빗에게 감정이 있다면, 데이빗 역시 생명력을 갈구할까요? 만약 인간처럼 데이빗이 느낄 수 있다면, 데이빗 역시 생명 현상이 아름답다고 느낄까요?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생명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이른바 엔지니어 외계인들은 지구 생명체들을 만들었고, 지구 생명체들 중에서 인간들은 (데이빗을 비롯해) 인조인간들을 만들었습니다. 엔지니어가 지구 생명체들을 만드는 것처럼, 인간이 인조인간을 만드는 것처럼, 데이빗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데이빗은 피조물보다 창조주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이빗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기 원한다고 해도, 데이빗이 생명 현상에 감동하나요? 데이빗이 오직 창조주가 되기 위한 욕망만으로 생명 현상을 파악하지 않나요? 인간은 생명 현상에 감동합니다. 인간이 생물학에 정통하지 못하고 생명 현상을 과학적으로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은 생명 현상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 현상은 '풍요로운 자연'을 가리킵니다. 기생충들이 꾸물거리거나 전염병이 사방으로 퍼질 때, 이것 역시 생명 현상입니다. 분명히 해로운 미생물들과 기생충들 역시 생명체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들이 아름다운 생명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예찬할 때, 사람들은 인간에게 이로운 자연을 예찬합니다. 인간에게 전염병과 기생충은 이득이 되지 않고, 그래서 이것들은 풍요로운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물학 연구에서 예쁜꼬마선충이 커다란 공을 세운다고 해도, 사람들은 고작 선충 따위가 자연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다른 많은 선형동물들이 혐오스러운 기생 동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각종 나무들은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나뭇잎(의 광합성 요소들)은 생산자입니다. 식물이 광합성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식물들이 광합성하지 않는다면, 자연 생태계에서 식물을 비롯해 광합성 생산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인간이 나뭇잎을 직접 씹어먹지 못한다고 해도, 나뭇잎은 중요한 생산자입니다. 나뭇잎이 생산하기 때문에, (인간을 비롯해) 각종 동물들은 소비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나뭇잎들은 생존을 보장합니다. 풍성한 나뭇잎들은 동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여러 식물들과 과일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은 중요한 생산자이고 풍요로운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풍요로운 자연을 상징하기 원할 때, 중세 판타지 속의 드루이드부터 현실 속의 글로벌 그린스까지, 녹색 나뭇잎은 수많은 상징들이 됩니다.
울창한 숲은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울창한 숲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인간을 비롯해 동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에서 토끼들과 사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면, 인간은 토끼와 사슴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울창한 숲 속에 호랑이가 있다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겁니다. 숲 속의 토끼들과 사슴들은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이것들이 이득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들 없이 인간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인간은 반드시 생산적인 자연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산적인 자연을 공유해야 합니다.)
언젠가 기계 인공 생태계는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밀어낼지 모릅니다. 그때 생산적인 자연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때는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가 개조 생명체들을 마음대로 만든다고 해도, 결국 인간에게는 생산적인 (개조) 자연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아직 우리 인류는 자연을 마음대로 개조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숲을 소비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인간에게는 울창한 숲이 필요합니다. 숲 속에는 비단 토끼들과 사슴들만 아니라 호랑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호랑이가 풍요로운 자연이 될 수 있나요?
중세 판타지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드루이드가 광역 치유 주문을 시전할 때, 바닥에서 마법진은 예쁜 꽃들을 틔우고 나뭇잎들을 흩날립니다. 드루이드 치유 주문 아이콘들은 나뭇잎들과 녹색 식물들입니다. 치유의 손길, 재생, 피어나는 생명 같은 주문 아이콘들은 나뭇잎들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중세 판타지에서 나뭇잎은 드루이드 치유 주문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녹색 나뭇잎들이 풍요로운 자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드루이드는 사나운 고양이과 야수로 변신하고 악마를 물리칩니다.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표범으로 변신하고, 타우렌 드루이드는 사자고 변신하고, 트롤 드루이드는 호랑이로 변신합니다. 녹색 나뭇잎이 자연인 것처럼, 드루이드에게 호랑이는 자연입니다. 자연에는 녹색 나뭇잎과 호랑이가 함께 있습니다. 호랑이는 인간에게 피해를 미칩니다. 구닥다리 비디오 공익 광고처럼, 옛날 어린이들에게 전쟁, 호환, 마마는 가장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호랑이가 인간에게 피해를 미친다고 해도, 호랑이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은 호랑이가 압도적이라고 느낍니다. 기생충과 호랑이가 똑같이 인간을 해친다고 해도, 기생충과 호랑이는 다릅니다. 건장하고 육중한 호랑이는 힘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해양 탐사 게임 <압주>에서 백상아리는 해양 생태계들의 수호자입니다. 사실 백상아리는 아주 위험한 육식동물입니다. 인간에게 백상아리는 위험합니다. 바닷속에서 인간이 4m짜리 백상아리를 만난다면, 인간은 자신이 절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압주>에서 백상아리는 우아한 아군입니다. 백상아리는 절대 사악한 악마가 아닙니다. 영화 <죠스>는 백상아리가 지옥에서 올라온 바다 악마라고 묘사하나, <압주>에서 백상아리는 든든한 아군이고 아주 우아합니다. 호랑이가 무서운 육식동물이고 동시에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백상아리 역시 그렇습니다.
백상아리의 건장하고 육중한 육체는 힘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도시 시민에게 호랑이와 백상아리는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 시민은 아무르 호랑이가 멸종한다고 걱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 도시 시민은 백상아리가 자연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녹색 나뭇잎과 백상아리는 다릅니다. 녹색 나뭇잎은 생산자입니다. 백상아리는 강력한 야성입니다. 하지만 양쪽이 다르다고 해도, 양쪽 모두 자연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백상아리를 보고 강력한 힘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자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백상아리 역시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육중한 기계들 역시 힘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소브레메니급 구축함은 아주 막강한 힘입니다. 소브레메니급 구축함에게 백상아리는 그저 어물전 생선 따위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백상아리가 무서운 육식동물이라고 해도, 백상아리는 감히 소브레메니급 구축함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문제는 구축함이 선천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백상아리보다 구축함이 강력하다고 해도, 구축함은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과 근대적인 진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육식 상어들은 바닷속을 헤엄쳤습니다. 구축함과 백상아리가 똑같이 힘을 상징한다고 해도, 백상아리는 훨씬 원초적이고 선천적입니다. 자연에게는 이런 원대한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거대 로봇보다 거대 괴수는 훨씬 로망입니다.)
백상아리가 강력한 야생이기 때문에, 백상아리가 자연 생태계에 속하기 때문에, 백상아리는 자연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 이외에 자연에는 여러 가치들이 있습니다. 자연은 특별한 화학 질서를 구축하고, 새롭게 진화하고, 스스로 발생합니다. 적어도 아직 생물학은 생명 현상이 스스로 발생한다고 추측합니다. 아무도 생명 현상을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엔지니어 외계인이 지구 생명체들을 만들었다고 말하나, 그렇다고 해도 자연은 감탄스럽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우주선에서 메레디스 비커스 선실에는 자연 동영상 화면이 있습니다.
선실 배경 화면은 여러 자연 풍경들을 보여줍니다. 왜 선실에서 배경 화면이 여러 자연 풍경들을 보여주나요? 메레디스 비커스는 외계 탐사 후원자입니다. 왜 후원자가 이런 사치를 누리나요? 다른 우주선 승무원들은 어떨까요? 다른 승무원들 역시 자연 풍경 동영상들을 감상하나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 <에일리언 2>에서 우주 기지에는 자연 풍경 홀로그램이 있습니다. 삭막한 우주 기지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자연 풍경 홀로그램을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승무원들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데이빗이 자연 풍경 동영상을 감상하나요? 데이빗이 초원과 숲과 산호초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영화 홍보 영상 속에서 데이빗은 권력 욕구, 폭력, 탐욕을 향해 눈물들을 흘립니다. 데이빗이 폭력을 향해 눈물들을 흘리는 것처럼, 데이빗이 초원과 숲과 산호초가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있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은 자신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관객들은 데이빗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데이빗은 생명 현상을 향해 어떤 특정한 감정을 내비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대자연에게 머리를 숙이기보다 자연을 이용해 뭔가를 만들고 지배하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대자연에게 감탄한다고 해도, 이런 감탄과 상관없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대자연을 찬양하는 심리와 자연을 정복하는 행위는 뒤섞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 인간에게는 자연을 찬양하는 심리 이외에 다른 것들이 필요합니다. 싸이파이 채널 <듄>에서 챤니가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처럼,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타크베르가 다양한 관계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인간은 관계들에 감탄해야 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관계들을 맺고 다른 생물종들과 관계들을 맺습니다.
자연은 그저 규모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규모와 함께 관계들에 감탄해야 합니다. 인간이 이런 관계를 외면한다면,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생명을 만들고 신이 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흔한 오해와 달리, 신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은 생명을 창조하고 동시에 생명에게서 멀어져야 합니다. 신(창조주)과 생명(피조물)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건 꽤나 모순적인 개념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엔지니어와 인간과 데이빗이 자연을 이용하고 생명을 만든다고 해도, 엔지니어와 인간과 데이빗은 신이 되지 못하고 모순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자연에게 머리를 숙이고 생명 현상을 존중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대자연과 생명 현상을 쉽게 존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숭배합니다. 자본주의는 생명 현상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생명 현상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원합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은 이것을 지적해야 하나,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을 세뇌시키고, 생태적인 상상력 역시 지배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설 <진 매퍼>는 개조 생명체들과 유전 공학 기술들을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진 매퍼>는 자본주의를 절대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얄팍한 환경 운동을 강조하고, 자유 시장 경제에 충성하고, 헛소리들을 늘어놓습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환경 오염들을 일으킴에도, <진 매퍼>는 자본주의 사회가 유전 공학 기술을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다고 망상을 꿈꿉니다. 김창규 작가는 이런 헛소리가 경이로운 SF 소설이라고 칭찬합니다. 아이고, 세상에. 고작 이런 헛소리 따위가 경이로운 SF 소설이라니…. 생태적인 상상력이랍시고 이런 헛소리를 읽는 것보다 <니치> 같은 생태계 비디오 게임은 훨씬 나을 겁니다.
뭐, SF 작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자본가 지배 계급이 민중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진 매퍼>와 김창규 작가는 헛소리들을 떠들고, SF 독자들은 헛소리를 읽어야 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가 사라진다고 해도, 생명 현상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한 욕구는 여전히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데이빗은 자본가 계급이 아닙니다. 이윤 축적을 위해 데이빗은 생명 현상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 <프로메테우스>(와 속편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분위기는 암울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