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최고의 공룡 아이돌, 티라노사우루스 본문
[제목은 티-렉스이나, 그림은 트리세라톱스…. 얼마나 뿔용 역시 아름답나요. 공룡은 살육 기계가 아니죠.]
소설 <공룡과 춤을>은 <멸종>의 개정판입니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는 것처럼 두 판본은 모두 티라노사우루스를 표지 그림으로 삼았습니다. <공룡과 춤을>의 표지 그림은 수많은 티라노사우루스 골격들입니다. 흐음, 솔직히 표지 그림이 좀 괴악하지 않나 싶기도…. <멸종>은 '멸종'이라는 타이포그라피와 티라노사우루스를 합쳤습니다. 꽤나 근사한 표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멸종>의 영문판 역시 티라노사우루스를 이용했죠. 거대한 수각류가 타임 머신을 바라보거나 물가를 돌아다니거나….
물론 다른 공룡들이 등장하는 표지 그림이 없지 않으나, 티라노사우루스 그림이 제일 유명한 듯합니다. 사실 이상한 현상은 아닐 겁니다. 이 폭군룡은 예전부터 공룡 팬들과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공룡을 대표하는 대표 주자입니다. <쥬라기 공원> 역시 티라노사우루스 골격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누군가가 "왜 백악기 공원이 아니라 쥬라기 공원에 티-렉스가 나오는가?"라고 물었을 때, 마이클 크라이튼은 "그저 티-렉스가 멋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뜬소문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티-렉스가 유명하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티-렉스의 인기는 식지 않는 듯합니다. 영화 <쥬라기 월드>가 개봉했을 때, 영화는 인도미누스를 주연 공룡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기를 독차지한 공룡은 티-렉스라고 합니다. <쥬라기 공원 III>는 스피노사우루스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스피노사우루스는 이런저런 화제를 일으켰으나, 수많은 공룡 팬들이 분노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설 <메그>는 티-렉스를 물어뜯는 거대한 상어를 표지 그림으로 묘사했습니다. 소설 첫머리에서 메갈로돈이 물에 잠긴 티라노사우루스를 물어뜯고요.
저는 작가가 아주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의 제왕' 티라노사우루스와 '바다의 제왕' 메갈로돈을 비교하기 위해서요. 티-렉스는 최고의 수각류이고, 메갈로돈이 티-렉스를 물어뜯는다면, 그만큼 메갈로돈의 위상이 높아지겠죠. 작가는 메갈로돈이 화려하게 데뷔하기 원했고, 그래서 일부러 저런 장면을 넣었을 겁니다. 고전 영화 <킹콩> 역시 킹콩과 (고증이 꽤나 고전적인) 티라노사우루스의 싸움을 보여줍니다. 영화가 티라노사우루스를 선택한 이유는 그만큼 이 수각류가 인기 스타이기 때문입니다.
SF 창작물에서 시선을 돌리고 일반 고생물학 서적을 보면, 사정이 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공룡 서적들이 줄창 티-렉스만 우려 먹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티-렉스는 분명히 최고의 아이돌이지만, 다른 공룡들을 표지 그림으로 이용하는 책들도 많습니다. 아무거나 사례를 들어볼까요. 스콧 샘슨의 <공룡 오딧세이>는 알로사우루스를 표지 그림으로 삼았습니다. BBC의 <공룡 대탐험>은 디플로도쿠스를 표지 그림으로 삼았습니다. 윌리엄 스타우트의 <공룡: 그 매혹적인 세계>는 (스타우트 본인의 유려한 그림으로) 파라사우롤로푸스를 묘사했어요.
게다가 모든 공룡 팬들이 티-렉스만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트리세라톱스를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스테고사우루스를 좋아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스피노사우루스에게 관심이 좀 있습니다. 생김새와 습성이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의 돛은 무슨 용도일까요. 이 공룡은 정말 수중에서 살았을까요. 이 공룡은 물고기들을 자주 잡아먹었을까요. 이런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 고생물학의 재미 중 하나지만, 증거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참 섭섭하군요.
어쨌든 티-렉스만 공룡이 아닙니다. 티-렉스 이외에도 멋진 공룡들은 넘치고 넘칩니다. 사실 사람들이 티-렉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이 놈이 크고 포악하기 때문일 겁니다. 살육 기계이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호전적이기 때문에. 서열 싸움에서 상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하지만 (티라노사우루스를 비롯한) 공룡은 살육 기계가 아닙니다. 비단 공룡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삶을 꾸립니다. 그런 독특한 삶들이 거대한 자연 환경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뭐, 징그러운 기생 생물들도 수두룩하지만) 그래서 생물 다양성은 아름답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물 다양성보다 그저 포악하고 자극적인 살육 기계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동물 서열 싸움과 애니멀 파이트가 얼마나 인기인가요. 사람들이 싸움박질보다 그 생명체의 삶과 자연 생태계의 상호작용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싶습니다. 그런 관심은 환경 보호와 생태 사회주의로 이어질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