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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지하 버섯 숲의 드워프 레인저 본문

SF & 판타지/혼이 깃든 야생

지하 버섯 숲의 드워프 레인저

OneTiger 2017. 5. 11. 20:00

[이런 게임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직 풍성한 녹색 숲만 판타지 자연 생태계가 아닐 겁니다.]



검마 판타지에서 '레인저'는 흔히 궁병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레인저가 궁병의 상위 등급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숲 속에서 장궁을 조준하는 모습은 레인저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일 겁니다. 하지만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레인저는 그저 막강한 궁병이 아닙니다. 레인저는 전통적으로 쌍검술을 익혔고, 3.5판 이후에도 여전히 쌍검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위 궁병으로서의 레인저는 3.5판 이후에 생겼죠. 물론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레인저만이 레인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게임은 검마 판타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따라서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레인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레인저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궁병으로 자리를 잡은 까닭은 아마 로빈 후드나 레골라스 그린리프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인물들은 대중적인 창작물에서 상당히 유명하고, 그런 까닭에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레인저마저 저런 인물들의 이미지를 덮어썼다고 할 수 있겠죠. 사실 레인저가 활을 쏘든 쌍검을 휘두르든, 게임 속에서 레인저의 진정한 역할은 정찰병일 겁니다. '숲 속의 정찰병'이죠.



레인저는 날렵하고 은밀한 사냥꾼이고, 몰래 흡혈귀나 해골 병사들의 뒤를 쫓을 수 있습니다. 비단 <던전스 앤 드래곤스>만 아니라 다양한 창작물들에서 레인저는 정찰병으로 활약합니다. 울창한 덤불에 몸을 숨기거나 악당들의 발자국을 쫓습니다. 가령, 존 플래너건의 <레인저스>는 그런 레인저를 소재로 삼았죠. 덕분에 레인저는 종종 자연의 보호자가 됩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환경과 생태계를 연구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레인저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레인저가 숲 속에서 정찰을 잘 한다는 것과 레인저가 숲을 아낀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창작물의 레인저들 중에서는 그저 숲을 이용할 뿐이고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는 인물들이 있을 겁니다. 소설 <레인저스>의 레인저들은 숲 속에서 활약하지만, 딱히 숲을 사랑한다거나 아끼는 듯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인저의 주된 무대는 숲이기 때문에 어떤 레인저들은 숲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씁니다. 게임 <네버윈터 나이츠>에는 숲을 너무 아꼈기 때문에 사람들을 살해하고 현상금 수배범으로 쫓기는 레인저가 등장합니다. 그런 드루이드 같은 면모 역시 레인저의 이미지를 장식합니다.



따라서 창작물 속의 레인저들은 엘프일 경우가 많습니다. 엘프들은 숲에 익숙하고, 그래서 레인저의 길을 걷습니다. 엘프 레인저는 엘프로서, 레인저로서 숲을 사랑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노움은 자연 친화적인 종족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노움 역시 흔히 레인저의 길을 걷습니다. 반면, 드워프 레인저는 드물다고 합니다. <플레이어 핸드북 3.5>를 보면, 드워프 레인저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지만 그 수는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아마 지하 동굴의 드워프는 숲 속의 레인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지하 동굴에는 숲이 없고, 따라서 레인저 역시 존재하지 않겠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레인저가 울창한 숲만 아끼고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싱그러운 녹색 숲만 자연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저 친환경 광고와 다르지 않은 생각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평면적인 생각이죠. 자연은 우리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황량한 모래 사막도 자연이고, 기이한 심해 열수구도 자연이고, 혹독한 극지방도 자연입니다. 지하 동굴의 생태계도 자연입니다. 녹색당처럼 녹색 나뭇잎을 상징으로 삼을 수 있지만, 녹색 숲만 자연일 까닭이 없습니다.



녹색당의 녹색 나뭇잎이나 해바라기가 잘못된 상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도안은 간단해야 하고, 녹색당은 자신들의 정책을 보다 간결하게 드러내기 위해 녹색 해바라기를 이용했을 뿐이겠죠. 중요한 점은 녹색 숲만 아니라 마른 사막과 깊은 열수구와 차가운 빙산과 어두운 동굴도 얼마든지 자연에 속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 인간도 자연적입니다. 우리도 어디 다른 곳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죠.) 드워프들 중에서도 지하 동굴의 생태계에 매료된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이들은 지하 동굴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드루이드가 되거나 동굴 속에서 은밀하게 잠복하는 레인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드워프 드루이드나 드워프 레인저는 녹색 숲 속의 엘프 레인저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드워프들은 질서와 전통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드루이드와 레인저를 별로 배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레인저들은 자주 무질서적인 성향으로 등장하죠.) 그보다 저는 이게 대중적인 자연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환경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녹색 숲만을 자연으로 바라봅니다. 대기업들이 친환경 광고에서 실제 자연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아, 그리고…. 검마 판타지의 동굴이 무조건 삭막할 이유는 없겠죠. 검마 판타지에서 동굴 속의 생태계는 지상의 숲 속 생태계만큼 울창하고 복잡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나무들이 삼림을 이루는 것처럼 지하 동굴에서 버섯들이나 포자들이 삼림을 이룰 수 있잖아요. 그런 버섯 숲 속에서 잠복하고 쇠뇌의 방아쇠를 당기는 다부진 지하 레인저…. 이것도 정말 로망이 아닐까요. 오히려 저는 숲 속의 엘프 레인저보다 버섯 숲의 드워프 레인저가 더 멋지게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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