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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좀비와 살상 로봇과 윤리적인 제약들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좀비와 살상 로봇과 윤리적인 제약들

OneTiger 2017. 10. 26. 20:00

수많은 SF 소설들은 좀비를 이야기합니다. 원래 좀비는 판타지에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요소이나, SF 작가들은 여러 설정들을 이용해 좀비를 상상 과학으로 바꿨습니다. 뭐, 드래곤이 사이언스 픽션에 등장할 수 있다면, 좀비가 등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좀비가 매력적인 이유는 좀비들이 사방팔방에서 무수히 출몰하기 때문일 겁니다. 종종 SF 소설들은 좀비를 전염병에 비유합니다. 아니, 검마 판타지 역시 좀비들을 비롯한 언데드들을 전염병에 비유하죠. 전염병 아포칼립스 소설들 속에서 전염병은 엄청나게 퍼지고 아무도 그걸 막지 못합니다.


<최후의 인간> 같은 고전적인 소설부터 최근 블록버스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은 인류가 막지 못하는 폭주 기관차입니다. 좀비들은 사방에서 쉬지 않고 튀어나오고, 덕분에 인류는 엄청난 위기에 처하고, 주인공들 역시 급박한 긴장 속으로 몰립니다. 아무리 주인공들이 좀비들을 처치해도 좀비들은 끊임없이 몰려옵니다. 좀비 하나는 약할지 모르나, 좀비들은 엄청난 무리를 짓기 때문에 쉽게 처치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폭력을 연이어 전개할 수 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좀비 소설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좀비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습니다. 좀비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저 산송장에 불과하죠. 어쩌면 특정한 미생물이나 바이러스가 좀비를 조종할지 모르나, 일반적인 좀비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취급하는 사이언스 픽션은 드물 겁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좀비를 처치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움직이는 산송장을 쓰러뜨렸을 뿐이죠. 이는 아주 강력한 윤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사람처럼 생긴 뭔가를 처치했으나, 결국 그건 살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아주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폭력을 휘둘렀으나 살생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덕분에 작가는 마음껏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좀비는 다른 악당들과 다릅니다. 아무리 사악한 외계인이나 돌연변이나 괴수가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생명체입니다. 인간 병사가 그런 외계인이나 돌연변이나 괴수를 죽이는 순간, 그 병사는 살생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살생은 상당히 부정적인 행위입니다. 적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인다면, 뒷맛이 씁쓸할 겁니다. 게다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인다면, 당연히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변명들을 늘어놔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 만화 속의 초인 영웅들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온갖 꼼수들을 동원합니다. 살인은 돌이키지 못하는 악행이고, 초인 영웅들은 그런 악행에 빠지기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살인은 금물입니다. 가끔 어떤 작가들은 이를 비꼬거나 응용하나, 근본적으로 초인 영웅들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좀비들은 이런 윤리적인 제약에서 매우 자유롭습니다. 좀비는 생명체가 아니고, 작가들은 좀비들을 신나게 죽일 수 있습니다.


물론 좀비들이 저런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좀비로 변하는 과정은 분명히 괴롭게 보일 겁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로 변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살인이 더 나을지 모르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한 개인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타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타인들이 좀비들로 변한다면, 소설 주인공은 그런 좀비들을 신나게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한때 그들은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소설 주인공은 거기에 연연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신나고 화끈한 폭력입니다. 쾌감이 분출하는 순간입니다. 죄다 때려잡으면 그만입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는 좀비에 준하는 적대 대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살상 로봇이죠. 살상 로봇은 윤리적인 제약에서 훨씬 자유로울 겁니다. 적어도 한때 좀비는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속성은 변해도 겉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쨌든 좀비는 사람처럼 생겼죠. 하지만 살상 로봇은 그런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살상 로봇은 그저 기계입니다. 냉장고나 세탁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냉장고나 세탁기를 부쉈다고 해도 아무도 윤리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만약 살상 로봇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면, 그런 설정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주저할지 모릅니다. 그 로봇을 처치하기가 꺼림칙할지 모르죠. 하지만 살상 로봇이 그저 사람들을 없애는 기계에 불과하다면, 사람들 역시 전혀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살상 로봇에게 아끼지 않고 총알을 박겠죠.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리 살상 로봇이 윤리적인 제약에서 자유롭다고 해도 폭력은 폭력입니다. 인간이 살상 로봇에게 총알을 박는다면, 그건 폭력적인 행위입니다. 비록 다른 살생보다 윤리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울지 모르나, 폭력적인 행위 자체는 남습니다. 신나고 화끈하게 살상 로봇들을 때려잡고 싶은 작가라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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