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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임신, 사랑, <블러드 차일드>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임신, 사랑, <블러드 차일드>

OneTiger 2017. 6. 30. 20:00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이 말은 여자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고백입니다. "너는 내 것이야. 누구한테도 빼앗길 수 없어." 이 말은 남자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고백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철이 지난 말들일 뿐입니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저런 말들을 보고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군요. 예전에, 그러니까 대략 10년 전까지 저런 말들이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꽤나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너무 가부장적인 틀에 묶어놓는다고 할까요. 저 고백 속에서 여자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소유합니다. 여자는 아이를 배고, 남자는 여자(와 그 아이)를 소유합니다. 임신, 사랑, 소유…. 글쎄요, 이거 아주 전형적인 가부장적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부는 반려자이고 동반자입니다. 그렇다면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반려나 동반에 관계된 이야기를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 고백 속에는 딱히 반려나 동반, 돌봄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랑의 징표가 임신이라는 것은 여자를 무슨 임신하는 기계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사랑의 언약으로 여자와 섹스하고, 임신한 여자를 버리곤 하죠. 어차피 그런 남자들은 섹스의 쾌락을 바랐을 뿐이고, 동반이나 반려 따위에는 눈꼽만큼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미혼모는 사회적 문제가 되곤 합니다. 흠, '미혼부'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나 싶군요. 저는 이런 부분에 별로 지식이 없지만, 어쩌면 미혼부도 심각한 문제일 수 있죠. 여자들도 남편과 아이를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육아는 여자의 몫으로 넘어오고, 그래서 여자들은 아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여자들은 임신하는 기계가 되고 아이를 생산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여자들은 노동력을 위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생산합니다. 아이로 노동력을 채운다거나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 같으나, 아직도 많은 개발 도상국은 여자를 저런 방식으로 이용합니다. 아니, 뭐, 우리나라도 그리 예외적이지 않군요. 그래서 여러 전문가들은 여자들이 교육을 받을수록 인구 압박이 줄어든다고 말하죠.



SF 소설 쪽에서 임신과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블러드 차일드>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소설에서 인간 남자 주인공은 외계인의 알을 임신합니다.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내용은 굉장히 충격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인류 사회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사례입니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임신합니다. 여자들은 임신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 때문에 신세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사랑을 믿고 임신합니다. 소설은 그런 이야기를 전할 뿐입니다. 그 관계가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인간 남자와 외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러브 스토리입니다. 저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저 자신도 페미니즘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해석하면 좋을지, 어떻게 페미니즘을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너무 페미니즘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외계인의 알을 사랑으로 임신한다는 설정은 페미니즘을 넘어 보다 원대한 상상 과학으로 뻗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도 출산이 힘겹고 매우 아프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도 여자들은 사랑을 위해 임신(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블러드 차일드>의 세계 속에는 외계인을 위해 알을 끊임없는 임신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게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출산이 여자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했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심지어 대를 잇지 못하는 며느리는 강제로 쫓겨나야 했죠. 저는 성 평등의 가장 큰 숙제가 '남자들의 강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많은 남자들은 강간을 별로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메갈리아 논란이 불거진 이후에도 강간 문제는 별로 수면 위에 올라오지 않더군요.)


하지만 여자와 임신도 여전히 문제입니다. 한때 여자들은 '아이를 생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고, 지금도 그런 여자들은 많습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도 그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겠어요. "나는 몸이 허약하기 때문에 그대의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미안해요, 연인이여." 외계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남자도 있겠죠. 생각해 보면, <블러드 차일드>의 설정은 장편 소설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현실의 여러 임신 문제들을 외계인의 방식으로 치환한다면 그거 꽤나 기발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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