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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이갈리아>는 1.5도 시나리오를 피하지 못한다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이갈리아>는 1.5도 시나리오를 피하지 못한다

OneTiger 2024. 6. 26. 09:35

[이갈리아 사회는 1.5도 시나리오를 피하지 못합니다.]



"'El que hace trofeos de los hombres' means 'the demon who makes trophies of man'." 안나 곤살베스는 '인간 두개골을 수집하는 악마'를 언급합니다. 으악…, 이 끔찍한 악마는 프레데터입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무서운 외계 사냥꾼이라고 해도, 다행히, 현실에서 이 악마는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건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 외계 사냥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게 절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프레데터는 현실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외계 사냥꾼은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만약 <프레데터>(1987년 실사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다면, 이 외계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외계 사냥꾼은 <프레데터>에 속합니다. 이 영화처럼, 오직 사이언스 픽션(SF)에서만 프레데터는 존재합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해도, 오직 판타지에서만 이 외계인은 존재합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무서운 사냥꾼이라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이 외계인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건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현실과 <프레데터>는 다릅니다. 양쪽이 다르기 때문에, <프레데터>는 '다른 세계'가 됩니다. 다른 세계로서, 현실과 <프레데터>가 아무 관계가 아닌가요? 그 자체로서, 이 판타지가 존재하나요?



비록 안나 곤살베스가 무서운 악마를 언급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프레데터는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처럼, 오직 사이언스 픽션(사이언스 판타지)에서만 이 외계 사냥꾼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프레데터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프레데터>에서 이 외계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과 <프레데터>는 다릅니다. 양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프레데터>가 존재하나요? 이 사이언스 픽션이 100% 독립적인 세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든, 사이언스 판타지가 되든, 이 세계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현실에서 이 판타지(세계)는 독립하지 않습니다.

 

<프레데터>는 안나 곤살베스가 빵을 먹는다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등장인물은 빵을 먹을 겁니다. 적어도, 영양분들을 섭취하기 위해 안나 곤살베스는 어떤 것을 먹을 겁니다. 현실에서 영양분들을 섭취하기 위해 인간은 어떤 것을 먹습니다. 현실처럼, <프레데터>에서 안나 곤살베스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이게 타당한 해석인 것처럼, <프레데터>는 100% 독립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아무리 현실과 <프레데터>가 다르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모방합니다. (적어도, 이 사이언스 판타지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현실에서 재규어는 존재합니다. 아메리카 열대 밀림에서 이 얼룩덜룩한 야수는 최고 포식자(알파 프레데터)입니다. <프레데터>는 어떤가요?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아메리카 밀림은 주된 배경입니다. 현실처럼, 이 밀림에서 재규어가 살아가나요? 아니면, <프레데터>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재규어가 존재하지 않나요? 대답은 후자보다 전자일 겁니다. 비록 현실과 <프레데터>가 다르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재규어는 존재할 겁니다. 만약 <프레데터>에서 재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실과 달리) <프레데터>에서 생명 진화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을 겁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생명 진화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다른 세계라고 해도, 이 외계 사냥꾼 이외에, <프레데터>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이 사이언스 픽션이 현실을 모방한다고 의도했을 겁니다. <프레데터>가 현실을 모방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재규어가 살아가는 것처럼,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이 야수는 존재할 겁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재규어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극장 관객들은 이 야수가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재규어처럼, <프레데터>는 100% 독립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서구 백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비극 없이, 미국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끔찍한 피무덤들 위에서 미국은 서있습니다. 비단 아메리카 인디언들만 아니라 흑인 노예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비단 흑인 노예들만 아니라 제3세계 사회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이 인디언들을 학살했던 것처럼, 미국이 흑인 노예들을 착취했던 것처럼, 이 국가는 제3세계 사회들을 수탈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제3세계 사회들을 도왔기 때문에, 제국주의로서, 미국은 공산주의를 탄압했습니다. 흠, <프레데터>는 어떤가요? 안나 곤살베스는 공산주의 게릴라입니다.

 

적어도, <프레데터>는 안나 곤살베스가 공산주의 게릴라에 속한다고 묘사합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이 '제3세계+공산주의 게릴라'를 묘사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공산주의는 제3세계를 지원하는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던 것처럼, <프레데터>는 다르지 않은지 모릅니다. 아, 물론, 영화 제작자들은 공산주의가 좋은 이념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반공주의가 커다란 부분이 아니라고 해도, <프레데터>는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묘사합니다. 더치 분대가 공산주의 게릴라 병사들을 학살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 영화는 반공주의를 보여줍니다.



◈ <프레데터>는 100%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다. 이갈리아 사회는 다르지 않다.

비록 <프레데터>가 반공주의를 묘사한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프레데터>가 벗어난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판타지는 100% 독립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프레데터>가 현실을 모방한다고 의도했을 겁니다. 이 외계 사냥꾼 이외에, <프레데터>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현실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고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했습니다. 현실처럼, <프레데터>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비록 영화 제작자들이 공산주의가 좋은 이념이라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프레데터>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합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현실과 <프레데터>는 연결됩니다.

 

<프레데터>에서 더치 소령은 주인공입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이 주인공을 담당합니다. 이 영화 배우는 현실에 속합니다. 만약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 배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배우는 더치 소령을 담당하지 못합니다. 비단 아놀드 슈왈제네거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 역시 똑같습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처럼, 영화 제작자들은 현실에 속합니다. 만약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프레데터>를 제작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프레데터>가 다른 세계라고 해도, 현실 덕분에, 이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합니다. 현실은 첫 번째 세계입니다.



<프레데터>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현실은 존재합니다. 만약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프레데터>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현실은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이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프레데터>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비단 이 사례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비슷합니다. 비단 <프레데터>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비슷합니다. (심지어 판타지들조차 다르지 않습니다.) 게르 브란텐베르그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 유토피아입니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이 소설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현실에서 프레데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 이갈리아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처럼, 오직 사이언스 픽션에서만 이 외계 사냥꾼은 존재합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오직 다른 세계에서만 이갈리아 사회는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인간과 프레데터는 조우하지 못합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이갈리아 사회로 가지 못합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프레데터>와 <이갈리아의 딸들>은 비슷합니다. 양쪽이 비슷하기 때문에, <프레데터>가 현실에 종속되는 것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아무리 이 유토피아가 다른 세계라고 해도.



<이갈리아의 딸들>은 '스파크스주의'를 묘사합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를 암시합니다. 게르 브란텐베르그는 클라라 스파크스가 카를 마르크스의 여자 판본이라고 의도했을 겁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투쟁이 가장 중요하다고 분석합니다. 비록 카를 마르크스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성 해방보다 계급 투쟁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비단 소비에트 연방만 아니라 다른 공산주의 사회들 역시 비슷했습니다. 아니, 이미 카를 마르크스의 페미니즘에게는 커다란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훨씬 낫다고 해도, 음…, 비단 카를 마르크스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시 비슷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스파크스주의는 성 해방보다 계급 투쟁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아무리 스파크스주의가 성 해방을 주장한다고 해도, 계급 투쟁보다 이건 우선하지 않습니다. 스파크스주의가 계급 투쟁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이 이념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양쪽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갈리아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일 겁니다. 현실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경제가 너무 악랄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중요한 이념이 되었습니다. 현실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클라라 스파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겁니다.



만약 카를 마르크스와 클라라 스파크스가 비슷하다면, 만약 마르크스주의와 스파크스주의가 비슷하다면,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일 겁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이기 때문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이 경제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 경제를 타파하기 위한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라면,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너무 악랄한 것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이 경제는 너무 악랄할 겁니다. 현실에서 미국은 자본주의를 주도합니다. 이 국가는 인디언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국가는 흑인들을 착취했습니다.

 

현실에서 미국은 제3세계를 억압했습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프레데터>에서 미국이 제3세계를 억압하는 것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미국은 제3세계를 억압할 겁니다. 아무리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도, 아무리 이 사이언스 픽션이 다른 세계라고 해도, 이 세계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100% 독립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이 소설은 '제한된' 독립적인 세계입니다. <프레데터>에서 미국이 제3세계를 억압하는 것처럼,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더치 분대가 공산주의 게릴라 병사들을 학살하는 것처럼, <이갈리아의 딸들>, 이 '제한된' 세계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 아무리 <이갈리아>가 다른 세계라고 해도, 이건 제한된 세계이다.

현실에서 자본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주도합니다. 이 국가는 서구에 속합니다. 아니, 서구에서 미국은 가장 커다란 부분입니다. 이 국가는 제3세계를 억압합니다. 이 억압처럼, 자본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양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회들에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라면, 이 사회들은 제국주의에 속할 겁니다. 비록 이 사회들이 다른 사회들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이 사회들은 제국주의를 위한 앞잡이들이 될 겁니다. 남한 사회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남한은 서구 제국주의를 위한 앞잡이입니다.

 

남한이 미국을 위한 앞잡이가 되는 것처럼, 이갈리아 사회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사회는 제국주의를 위한 앞잡이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남한과 이갈리아가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한은 가부장 제도입니다. 남한과 달리, 이갈리아에서 가부장 제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가부장 제도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남한과 이갈리아는 아주, 아주, 아~~~주 다를 겁니다. 양쪽은 절대 비슷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양쪽이 아주, 아주, 아~~~주 다르다고 해도, 남한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남한처럼, 이 경제는 이갈리아를 지배합니다.



적어도,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만약 이 경제가 지배하지 않는다면, 클라라 스파크스는 중요한 철학자가 아닐 겁니다. 스파크스주의는 중요한 이념이 아닐 겁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이기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이 악랄한 경제를 타파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는 중요한 이념이 됩니다. 현실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프레데터>에서 제3세계 공산주의가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이갈리아의 딸들>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양쪽은 비슷합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비단 제국주의만 아니라 지구 가열화이기도 합니다. 이 경제는 많은 돈들에게 집착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을 벌기 원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석탄들, 석유들, 가스들은 많은 돈들을 벌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많은 돈들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이 경제와 석탄들, 석유들, 가스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해 이 경제는 너무 많은 석탄들, 석유들, 가스들을 태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이 연료들을 태우기 때문에, 지구 평균 온도는 상승합니다. 이 행성급 재앙은 지구 가열화입니다.



<프레데터>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지구 가열화이기 때문에, <프레데터>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일 겁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오직 20세기 후반만 보여준다고 해도, 비록 이 사이언스 픽션이 21세기 초반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프레데터>가 현실을 모방하기 때문에,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21세기 초반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일 겁니다. <프레데터>와 <이갈리아의 딸들>은 비슷합니다. 이 소설에서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일 겁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들이라고 해도,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에게 집착합니다.

 

언제나 이 경제는 많~은 돈들에게 집착합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들이라고 해도, 이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영리 기업 경영자들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라면, 이 '여자' 경영자들이 매출 그래프를 무시할 수 있나요? 이 여자들이 이윤 극대화를 무시할 수 있나요? 으음…, 그건 아닙니다. 영리 기업들은 자본주의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기업들은 매출 그래프가 상승하기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가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아무리 어떤 영리 기업 경영자들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라고 해도, 이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윤 극대화는 규칙입니다.



아무리 어떤 영리 기업 경영자들이 여자들이라고 해도, 이 경영자들은 매출 그래프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 여자들은 이윤 극대화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영리 기업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가 많~은 돈들에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프레데터>는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21세기 초반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21세기 초반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일 겁니다. <프레데터>처럼, 아무리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들이라고 해도,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일 겁니다. 이 악랄한 경제는 지질학적인 행성급 재앙입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분석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가부장 제도는 얽혔습니다. 이 경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을 착취합니다. 비록 자본가 계급이 남자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남자 노동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비극적인 피해자들입니다. 임금 노동자부터 가정 주부까지, 자본주의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비극적인 피해자들입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 제도가 얽혔기 때문에, 만약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들이라면, 만약 가부장 제도가 사라진다면, 자본주의는 바뀔 겁니다. 아무리 이 경제가 바뀐다고 해도, 이 변화는 상구 구조에 속합니다. 이윤 극대화, 이 규칙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지구 가열화이다.

아기는 성장하고 어른이 됩니다. 만약 아무도 아기를 돌봐주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종할 겁니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아는 원초적인 노동입니다. 아무리 육아가 아주 중요하다고 해도, 자본주의에서 육아 노동자는 아무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이건 자본주의가 육아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이건 착취입니다. 많은 육아 노동자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이건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한다는 뜻입니다. (요리, 빨래, 청소처럼, 비단 육아만 아니라 가사 역시 비슷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이건 가부장 제도입니다. 구조적으로, 양쪽은 얽혔습니다.

 

가부장 제도와 자본주의는 머나먼 관계, 얕은 관계가 아닙니다. 아무리 현실과 <프레데터>가 다르다고 해도, 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할 겁니다. 현실과 달리, <프레데터>와 달리,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육아 노동자들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입니다. 아무리 남자들이 육아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아무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프레데터>처럼, 여전히,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아무리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가부장 제도가 사라졌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육아 노동자들의 성별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묘사합니다.



아무리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도, 현실처럼,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성별과 상관없이, 이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지구 가열화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에게 집착할 겁니다.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해 이 경제는 너무 많은 석탄들, 석유들, 가스들을 태울 겁니다. 아무리 생태학자들이 경고한다고 해도, 아무리 환경 활동가들이 방해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비록 생물 다양성이 감소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훨씬 많은 돈들을 향해 돌진할 겁니다. 이 악랄한 경제는 폭주 기관차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훨씬 많은 돈들을 향해 돌진하기 위한 폭주 기관차입니다. 비록 지구 가열화가 행성급 재앙이라고 해도, 이 기관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현실처럼, <프레데터>에서 자본주의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사이언스 판타지)처럼,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본주의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에코토피아 비긴스>를 썼습니다. 이 생태 유토피아(솔라펑크)는 새로운 재생 에너지를 논의합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와 달리,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새로운 재생 에너지는 커다란 부분이 아닙니다. 이 소설 세계는 1.5도 상승을 피하지 못합니다.



※ 사진 <Pxclimateaction, …> 출처: EL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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