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유토피아 논의는 미래보다 과거에게 기반한다 본문
"저는 과학자를 좋아해요. 저는 열심히 공부하고 과학자가 되기 원해요." 이건 어렵습니다. 만약 17세기 서구 사회에서 어떤 소녀가 과학자를 꿈꾼다면, 이 꿈은 어려울 겁니다. 17세기 서구 사회에서 소녀는 과학자가 쉽게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녀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17세기 서구는 공식적인 여자 과학자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소녀가 상류층이라면, 적어도 소녀는 여러 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만약 소녀가 하류층이라면, 소녀는 공부하기보다 지배 계급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소녀가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소녀는 공식적인 과학자가 쉽게 되지 못합니다.
17세기 서구 사회라는 현실에서 소녀는 공식적인 과학자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소녀가 과학자를 꿈꾼다면, 현실이 이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현실에서 소녀는 벗어나야 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소녀가 벗어난다면, 더 이상 현실이 여자를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소녀는 과학자가 될지 모릅니다. 현실보다 비(非)현실 세계에서 소녀는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비현실 세계에서 소녀가 꿈을 이루는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이상을 원할 때, 종종 사람들은 현실보다 비현실 세계를 설정합니다. 이상이 비현실 세계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상적인 사회는 비현실 세계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사회가 비현실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종종 이상적인 사회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들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비현실 세계에서 이상적인 사회는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여자들은 과학자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사회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들이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유토피아 문학이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은 판타지 장르에 속합니다. 적어도 두 가지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장르는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 장르에서 다른 무엇보다 비현실 세계는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현실에서 반인반수 종족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노오오력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사람들은 반인반수 종족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은 이 종족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서 반인반수 종족들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판타지 소설은 비단 반인반수 종족들만 아니라 식물 종족들 역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자체로서 식물 종족들은 테라포밍 전문가들일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서 인간과 반인반수가 토론하는 것처럼, 판타지 장르에서 비현실 세계는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유토피아 문학과 판타지 장르에게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토피아 문학과 판타지 장르에게 커다란 공통점(비현실 세계)이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은 판타지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렛 캐번디시가 <불타는 세계>를 썼던 것처럼, 비현실 세계에서 여자는 과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현실 세계는 판타지 세계입니다. 비현실 세계 속의 여자 과학자는 판타지 장르에 속합니다. 여자 과학자가 반인반수 종족들과 토론하기 때문에, 이건 판타지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현실 세계에서 17세기 여자가 열심히 공부하고 과학자가 된다고 해도, 이건 17세기 사회를 뛰어넘지 않습니다. <불타는 세계>와 17세기 사회는 똑같은 시대입니다.
여러 유토피아 문학들은 시대를 뛰어넘지 않습니다. 토마소 캄파넬라는 <태양의 도시>를 썼습니다. <태양의 도시>가 시대를 뛰어넘고 미래 사회를 묘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태양의 도시>는 시대를 뛰어넘지 않습니다. 이 문학은 어디에서 이상적인 사회가 존재한다고 묘사하나, 이 이상적인 사회는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 판타지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해도, 이 사회는 17세기에 속합니다. <태양의 도시>가 17세기를 뛰어넘지 않는 것처럼, 여러 유토피아 문학들은 미래 사회를 예상하지 않습니다. <태양의 도시>처럼, 오랜 동안, 인류 문명에서 '시대 격차'는 친숙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동안, 인류 문명은 아주 느리게 바뀌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서구) 중세가 1,000년에 달한다고 설명합니다.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서구) 중세는 1,000년에 달합니다. 비록 우리가 (서구) 중세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인류 문명이 빨리 바뀌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조선 사회가 500년 왕조를 자랑하는 것처럼, 시대는 빨리 바뀌지 않습니다. 시대가 빨리 바뀌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래 사회를 예상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빨리 바뀌지 않기 때문에, 미래 사회, 시대 격차는 친숙한 개념이 아닙니다. 특히, 지배 계급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개념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지배 계급에게 시대 격차(미래 사회)는 위험한 개념입니다. 미래 사회는 시대가 바뀐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1443년 조선 사회에게 1752년 조선 사회는 미래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미래는 군주 제도 사회입니다. 1443년 사회와 1752년 사회가 군주 제도 사회이기 때문에, 이 미래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은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고, 군주는 혈통 계승, 왕권 신수설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면, 2021년은 다릅니다. 1752년 조선 사회에게 2021년 남한 사회는 미래입니다. 1443년 사회와 1752년 사회와 달리, 1752년 사회와 2021년 사회는 아주 크게 다릅니다. 이건 너무 위험한 미래입니다.
2021년 남한 사회는 혈통 계승, 왕권 신수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국왕이 되고 문씨 가문이 한반도를 계속 통치한다면, 많고 많은 남한 사람들은 반대할 겁니다. 2021년 남한 사회가 문재인 국왕보다 문재인 대통령을 인정하는 것처럼, 1752년 사회와 2021년 사회는 아주 크게 다릅니다. 두 사회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지배 계급(군주)은 권력을 잃습니다. 비록 1443년 조선 사회와 1752년 조선 사회가 완벽하게 똑같지 않다고 해도, 두 사회에서 군주 제도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으나, 1752년 사회와 2021년 사회가 아주 크게 다르기 때문에, 군주 제도는 권력을 잃습니다.
2021년 남한 사회가 왕권 신수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1752년 지배 계급에게 2021년 미래 사회는 너무 위험합니다. 2021년 남한 사회가 군주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만약 미래 사회가 찾아온다면, 시대는 아주 크게 바뀔지 모르고, 지배 계급은 권력을 잃을지 모릅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근대 사회는 다른 시대들과 아주 크게 다릅니다. 근대 사회가 다른 시대들과 아주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미래 사회를 꿈꾸기 시작합니다. (1752년 조선과 달리, 2021년 남한은 근대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미래 사회를 꿈꾸기 때문에, 비현실 세계 역시 시대 격차를 포함하기 시작합니다.
비현실 세계가 시대 격차를 포함하고, 유토피아 문학이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 역시 미래 사회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미래 사회입니다. 현실에서 미래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021년 현실에서 2734년 미래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021년 사람들에게 2734년 사회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만약 어떤 유토피아 문학이 2734년 사회를 묘사한다면, 이 유토피아 문학과 <불타는 세계>에게는 공통점(이상적인 사회, 비현실 세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타는 세계>는 미래를 예상하지 않습니다. 반면, 2734년 이상적인 사회는 미래에 속합니다.
2734년 이상적인 사회가 미래에 속하기 때문에, 이 유토피아 문학과 <불타는 세계>는 다릅니다. <불타는 세계>와 달리, 어떤 유토피아 문학들은 미래 사회를 묘사합니다. 이건 모든 유토피아 문학이 똑같은 미래 사회를 묘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미래 사회는 현재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내가 깨어났을 때>를 썼습니다. 이 문학은 미래 사회를 묘사하나, 이 미래 사회는 현재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썼습니다. 이 문학은 우주선이 외계 행성으로 날아간다고 묘사합니다. 이 미래 사회는 현재와 크게 다릅니다.
<내가 깨어났을 때>와 <안드로메다 성운>은 미래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묘사하고, 이건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내가 깨어났을 때>와 달리, <안드로메다 성운>은 과학 기술들이 진보하고 지구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방문한다고 묘사합니다.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방문하기 때문에, <안드로메다 성운>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비슷합니다. 이 유토피아 문학과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슷한 것처럼, <안드로메다 성운>은 비단 이상적인 미래 사회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우주 항해 역시 묘사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주 항해를 묘사하는 것처럼, 이 유토피아 문학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이상적인 사회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이 유토피아 문학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아니, 비단 <안드로메다 성운>만 아니라 <내가 깨어났을 때> 역시 SF 장르에 속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과 달리, <내가 깨어났을 때>는 우주 항해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나, 분명히 이 유토피아 문학이 미래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내가 깨어났을 때> 역시 SF 장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깨어났을 때>와 SF 장르에게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가 깨어났을 때>가 미래 사회를 묘사하는 것처럼, 유토피아 사회는 미래에 속합니다. 유토피아 개념은 미래를 포함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심지어 유토피아 문학이 우주 항해조차 묘사한다고 보여줍니다. 유토피아 문학이 SF 장르에 속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유토피아가 미래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말할 때, 이 단어는 미래를 설정합니다. 이건 오직 SF 장르만 이상적인 미래를 묘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 (중세) 종교인들 역시 이상적인 미래를 꿈꿨습니다. "언젠가 천년 왕국은 도래할 테고, 신은 강림하실 거야." 이 문구는 이상적인 미래(언젠가, 천년 왕국)를 언급합니다. 과거 종교인이 언젠가 천년 왕국이 도래한다고 꿈꿨던 것처럼, 과거 사람들 역시 이상적인 미래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미래는 신에게 기반합니다. 신이 강림하기 때문에, 천년 왕국은 도래합니다. 인류는 이상적인 사회를 스스로 이룩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신에게 필연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래서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는 다릅니다. 반면, SF 장르는 신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깨어났을 때>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신은 지상으로 강림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중세 사람들이 이상적인 미래를 언급했다고 해도, 이 이상적인 미래와 <내가 깨어났을 때>, <안드로메다 성운>은 다릅니다. 미래가 가깝든, 멀든, <내가 깨어났을 때>, <안드로메다 성운>은 미래 인류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한다고 묘사합니다.
미래 인류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때문에, 심지어 이상적인 미래 사회가 SF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유토피아 개념이 미래를 포함한다고 느낍니다. "자기야~♡, 오늘 나 뭐 달라진 게 없어?"라는 물음이 "자기야, 오늘 나 예쁘다고 칭찬해줘."라는 의도를 포함하는 것처럼, 비록 사람들이 미래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언급할 때, 이미 유토피아는 미래를 포함합니다. 이미 유토피아가 미래를 포함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논의할 때, 사람들은 미래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유토피아 개념이 오직 미래만 중시해야 하나요? 시대 격차가 전부인가요?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방문하기 때문에, <안드로메다 성운>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비슷합니다. 만약 문학 작가가 유토피아를 논의하기 원한다면, <안드로메다 성운>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는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스페이스(우주) 항해를 묘사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 기술들이 엄청나게 진보한다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소설이든, 보드 게임이든,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과학 기술들을 과장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과학 기술들을 과장하기 때문에,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장르를 좋아합니다.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래 사회를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대규모 개척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장착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개척 우주선은 불모지 외계 행성으로 항해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3D 생체 프린터는 생체 재료들을 가공하지 않고, 유전자 지도를 참고하지 않고, 수마트라 호랑이를 복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는 대규모 개척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하고, 개척 우주선이 불모지 외계 행성으로 항해하고, 3D 생체 프린터가 수마트라 호랑이를 복제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개척 우주선은 불모지 행성을 어머니 행성으로 바꿉니다.
불모지 외계 행성이 풍요로운 행성 생물권을 자랑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는 찬란한 미래 과학이 진보한다고 과장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찬란한 미래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SF 팬들이 이 장르를 논의할 때, SF 팬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문화가 오직 미래만 중시해야 하나요? 만약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만약 19세기 근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과학 기술들은 발달하지 않았을 겁니다. 과학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을 과장하지 못합니다. 19세기 근대 없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19세기 근대 산업 사회가 나타났기 때문에, 과학 기술들은 발달했고, 사람들은 우주를 꿈꿨고, 이 상황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롯했습니다. 이건 19세기 근대 산업 사회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롯했다는 뜻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래 세계를 중시하나, 19세기 근대 산업 없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타나지 못하고, 거의 유일하게 스팀펑크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스팀펑크는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가 과거(어떻게 과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는가)를 과장하기 때문에, 이 그림(링크)에게는 아주 고유한 매력이 있습니다.
8월 21일 게시글(링크)이 설명하는 것처럼, SF 장르에서 스팀펑크는 고유한 매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SF 장르가 미래 세계를 중시한다고 해도, 스팀펑크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고 고유한 매력을 자랑하는 것처럼, 유토피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토피아 역시 비단 미래 사회만 아니라 과거 사회를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스팀펑크 없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 사회 없이, 미래 사회가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몇 백 년 이후, 어쩌면 28세기 미래 사회는 페미니즘 사회일지 모릅니다. 28세기 미래 사회는 아주 이상적인 페미니즘 유토피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28세기 미래 사회가 아주 이상적인 페미니즘 유토피아라고 해도, 이 유토피아는 과거를 보상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 역사는 아주 유구하나, 아주 유구한 인류 문명은 가부장 제도입니다. 많고 많고 많고 많은 사회들은 가부장 제도 사회(였고 가부장 제도 사회)입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 역시 폭력적이고 악랄한 가부장 제도 사회입니다.) 이제까지 인류 문명이 가부장 제도였기 때문에, 너무 너무 오랜 동안, 너무 너무 많고 많은 여자들은 고통에 빠졌습니다. 만약 28세기 사회가 페미니즘 유토피아라면, 28세기 페미니즘 유토피아가 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보상하나요?
만약 28세기 사회가 페미니즘 유토피아라면, 과거 여자들이 부활하고 성 해방 사회를 만끽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28세기 사회가 페미니즘 유토피아라고 해도, 이건 야만적인 과거를 절대 보상하지 못합니다. 야만적이고 끔찍한 무덤 위에서 28세기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서있습니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매트 리들리가 떠들어대는 것처럼) 얄팍한 낙관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무시하나, 이 과거는 미래 유토피아를 외치기 위한 근거가 됩니다. 28세기 페미니즘 사회가 과거를 인식하는 것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는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스팀펑크가 19세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과거 사회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19세기 식민지 수탈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한창 발달하는 동안, 서구 사회는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폭력적입니다. 자본주의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구 생물권에게 기생합니다.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너무 심각한 환경 오염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과거(19세기 산업 사회, 식민지 수탈)를 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오직 현재만 바라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현재가 번쩍 나타났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은 19세기 식민지 수탈을 외면하고 오직 부유한 자본주의 사회만 인식합니다. 이현우(로쟈) 평론가가 문학동네 <닥터 지바고>를 강연했을 때, 이현우 평론가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선택했어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볼셰비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현우 평론가는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합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나, 이현우 평론가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이현우 평론가가 옳다면, 이건 식민지 수탈이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현우 평론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현우 평론가는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했습니다. 이현우 평론가가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과거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너무 위험한 착각에 빠지고 착취, 수탈, 오염을 떠받들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판타지는 아주 고유한 매력을 자랑합니다.
스팀펑크 판타지가 아주 고유한 매력을 자랑하는 것처럼, 유토피아는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유토피아 개념이 오직 미래만 포함하나요? 유토피아 논의에서 미래가 전부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진보는 앞을 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한다고 해도, 뒤에서 세찬 바람이 불기 때문에, 범선이 세찬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것처럼, 우리는 비단 앞만 아니라 뒤를 함께 인식해야 합니다. 유토피아는 그저 이상적인 미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배적인 관념이 끔찍한 폭력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정당화한다고 해도, 유토피아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과거를 증명해야 합니다.
21세기 초반, (이현우 평론가를 비롯해) 많은 남한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합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지배적인 관념은 추악한 과거를 정당화합니다. 만약 유토피아 사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왜곡에서 과거 피해자들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유토피아 사회가 나타난다면, 지배적인 관념이 약해지고 사라지기 때문에, 유토피아 사회는 왜곡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 사회는 과거 피해자들을 애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직 유토피아 사회만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이건 유토피아에게 과거를 증명하기 위한 사명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 게임 <세컨드 갤럭시> 스크린샷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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