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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어떻게 <서브머지드>와 고래 상어를 바라보는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그 여자와 그 남자의 논의들

어떻게 <서브머지드>와 고래 상어를 바라보는가

OneTiger 2018. 12. 22. 18:38



[대학교 주변의 먹자 골목. 기말 고사가 끝나고 아직 방학이 시작하지 않은 12월 중반. 크리스마스가 멀었음에도, 수많은 상가들은 이미 캐롤송들을 틀고,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걸고, 연말 이벤트들을 진행하는 중이다. 반면, 먹자 골목의 어떤 탁주 술집은 그런 분위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술집 안에서 여러 학생들은 이런저런 탁주들을 마시는 중이다. 약간 구석진 탁자에서 어떤 여학생과 어떤 남학생 역시 동동주를 마시는 중이다. 동동주를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작은 태블릿 PC 화면을 들여다본다.]


남학생: (태블릿 PC 화면에서 시선을 뗀다) 자, 봤지? <서브머지드>는 이런 게임이야. 게임 플레이어는 소녀를 조종하고, 물에 잠긴 폐허를 돌아다니고, 각종 물품들을 찾아야 해. 사실 게임 플레이는 까다롭지 않아. 너는 비디오 게임에 익숙하지 않겠으나, 얼마든지 <서브머지드>를 플레이할 수 있을 거야. 이건 사격 게임이나 전략 게임이나 액션 게임과 달라. 아무도 너를 없애기 원하지 않아. 아무도 너를 공격하지 않아. 시간 제한이나 자원 제한 역시 없지. 너는 느긋하게 물에 잠긴 폐허를 돌아다니고 다양한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어.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겠지. 다양한 풍경들. 이질적인 적막함. 폐허를 뒤덮은 녹색 자연. 광대한 바다. 각종 해양 동물들과….


여학생: (두 어깨를 움찔거린다) 아, 씨발, 존나 깜짝…. 어머, 내가 무슨…. 아니, 아니, 갑자기 고래 상어가 쪽배를 밀쳤기 때문에…. <서브머지드>에서 정말 고래 상어와 혹등고래는 바다 괴수가 될 수 있는 것 같아. 가끔 수면 위로 고래 상어가 거대한 몸뚱이를 내밀 때, 고래 상어가 쪽배를 밀칠 때, 혹등고래가 장대하게 솟구칠 때, 혹등고래가 거대한 꼬리 지느러미를 펄럭거릴 때, 이런 장면들은 바다 괴수로 이어질 수 있겠지. 만약 내가 쪽배를 타는 소녀라면, 고래 상어가 쪽배를 밀치고 거대한 몸뚱이를 내밀 때, 나는 내가 거대 바다 괴수를 본다고 생각할 거야. 거대 괴수를 바라보는 감성은 이런 것이겠지. 어떤 거대하고 살아있는 존재가 움직이는 것. 그래서 거대 괴수는 신비롭지. 아무리 인류가 부르즈 할리파를 높이 지을 수 있다고 해도, 고층 건물에는 이런 느낌이 없어. 아무리 인류가 니미츠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다고 해도, 항공모함에는 이런 느낌이 없지. (태블릿 PC를 끈다)


남학생: 그래, 맞아. 고래 상어, 고층 건물, 항공모함. 모두 거대하나, 고층 건물과 항공모함은 고래 상어와 다르지. 고층 건물과 항공모함에는 이런 느낌, 거대하고 살아있는 것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없지. 거대 로봇과 거대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야. 숱한 SF 게임들에는 숱한 거대 로봇들과 거대 우주선들이 있어. 그것들이 움직이는 장면들은 정말 대단해. 최신 게임들은 웅장한 그래픽을 자랑하고, 그래서 거대 우주선들은 정말 장대한 위용을 자랑할 수 있지. (동동주를 마시고 돼지 고기 안주를 집는다) 게임 <헤일로: 리치>에서 필라스 오브 오톰이 발진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웅장해. 하지만 아무리 필라스 오브 오톰이 웅장하다고 해도, 그건 고래 상어보다 신비롭지 않아. 필라스 오브 오톰이 신비롭다고 해도, 그건 고래 상어가 선사하는 감성과 많이 달라. 어쩌면 필라스 오브 오톰이 고래 상어보다 훨씬 거대함에도, 오히려 필라스 오브 오톰보다 고래 상어는 훨씬 웅장하고 신비로울지 몰라. 이유가 뭘까? (안주를 먹는다.)


여학생: 예상 외로 이유는 간단해. 고래 상어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이야. 고래 상어는 생명체야. 고래 상어는 생명 현상이야. (동동주를 마신다) 필라스…, 아, 그래, 가을 우주선은 생명 현상이 아니라 기계야. 아니, 잠깐, 왜 우주선 이름이 필라스 오브 오톰이야? <헤일로> 시리즈에서 우주선 이름들은 좀 독특한 것 같아. 세이 마이 네임, 포워드 언투 던, 인 앰버 클래드…. 뭐, 포워드 언투 던은 정말 멋진 이름이야. 어떻게 번지 제작자들은 이런 멋진 이름을 우주선에 붙일 수 있었을까.


남학생: 아이고, 그건 오해야. 필라스 오브 오톰과 포워드 언투 던은 그저 유명한 우주선일 뿐이야. <헤일로> 시리즈에는 평범한 우주선 이름들이 많아. 나 역시 포워드 언투 던이 정말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해. 디스커버리나 엔터프라이즈 같은 이름들은 너무 무난하지. (두 술잔에 동동주를 따른다) 하지만 포워드 언투 던은 정말 우주선이 장대하게 여명으로 날아가는 느낌을 풍기지. 이런 이름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 하지만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이름 때문에 <헤일로> 시리즈는 훨씬 독특한 감성을 풍길 수 있었을지 모르지. 종종 사소한 것들은 커다란 것을 좌우하지. 그래서 포워드 언투 던은…. 어, 잠깐, 왜 우리가 포워드 언투 던을 이야기하지? 우리는 고래 상어와 바다 괴수를 이야기하는 중이었어.


여학생: 아, 그랬지. 미안. 필라스 오브 오톰과 포워드 언투 던은 기계야. 이것들은 생명 현상이 아니야. 반면, 고래 상어는 야생 동물이고 생명체이고 생명 현상이지. 그래서 아무리 필라스 오브 오톰과 포워드 언투 던이 거대하고 웅장하다고 해도, 이것들보다 고래 상어는 신비로워. (볶은 김치를 먹는다) 형, 생각해 봐. 필라스 오브 오톰과 포워드 언투 던은 인간들이 만든 우주선이야. 인간들 때문에 필라스 오브 오톰과 포워드 언투 던은 존재할 수 있어. 인간들이 없다면, 인간들이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았겠지. 코버넌트 우주선들 역시 마찬가지야. 산 시움, 상헬리, 후라곡, 지랄하네, 기타 외계 종족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코버넌트 우주선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겠지. 지랄하네의 기술 등급이 별로 높지 않다고 해도, 지랄하네 역시 뭔가를 만들 수 있지. 결국 우주선들은 기계들이고, 기계들은 인공적인 결과야. 지랄하네가 거대한 기계 망치를 휘두를 때, 우리는 누군가가 기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 반면, 생명 현상은 달라. 인류 이전에 생명 현상은 이미 존재했어.


남학생: 그래, 이미 35억 년 전에, 어쩌면 그것보다 옛날에 이미 생명체는 나타났지. (동동주를 마신다)


여학생: 우리는 생명체를 만들지 않았어. 우리는 생명체를 만들지 못해. 우리가 새로운 생물종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창조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모방할 뿐이야. 자연 생태계가 이미 생명체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모방할 수 있어. 아무리 인간이 우주선과 개조 동물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우주선과 개조 동물이 똑같이 인공적인 결과라고 해도, 개조 동물은 우주선과 달라.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 (동동주를 마시고 젓가락으로 돼지 고기를 자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생명 현상이 나타났는지 아직 알지 못해. 언젠가 우리는 그 비밀을 밝힐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그 비밀을 밝힌다고 해도, 인류 이전에 생명 현상이 이미 나타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그렇게 생명 현상은 원대해. 인류는 생명 현상에 손대지 못해. 그것은 우리를 초월했어. 어쩌면 화성이나 유로파에는 외계 생명체들이 있을지 몰라. 우리는 그것들을 만들지 않았어. 자연 생태계는 그것들을 만들었어. 우리 역시 자연 생태계에 속했고 자연 생태계를 벗어나지 못해. 생명 현상은 인간을 초월했고, 고래 상어는 그런 생명 현상에 속해. 포워드 언투 던에는 이런 감성이 없어.


남학생: (두 술잔에 동동주를 붓는다) 음, 생명 현상은 인류보다 훨씬 원대해. 그래서 고래 상어는 신비로워. 네 주장이 이거야?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류보다 훨씬 원대한 거대 현상들이 많아. 폭풍, 해일, 화산, 지진. 이런 것들은 인류보다 훨씬 원대한 거대 현상들이야. 하지만 이런 것들과 고래 상어는 서로 다른 느낌을 풍기지. 나는 폭풍과 해일과 화산보다 고래 상어가 훨씬 신비롭고 웅장하다고 생각해. 물리적인 규모에서 고래 상어는 폭풍과 해일과 화산을 따라가지 못해. 이것들은 고래 상어보다 훨씬 웅장해. 이것들은 얼마든지 고래 상어를 없앨 수 있어. 폭풍이 몰아친다면, 고래 상어 역시 목숨을 잃을 거야. 고래 상어는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하지. 아무리 고래 상어가 거대하다고 해도, 고래 상어는 야생 동물이고 폭풍을 이기지 못해. 그렇다고 해도 나는 폭풍보다 고래 상어가 훨씬 웅장하고 신비롭다고 생각해. 나는 왜 필라스 오브 오톰보다 고래 상어가 웅장하고 신비로운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왜 폭풍보다 고래 상어가 웅장하고 신비로운지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상하지? 이유가 뭘까? (동동주를 마신다)


여학생: 폭풍은 살아있지 않아. 고래 상어는 살아있지. 생명이 뭘까? 살아있음이 무엇을 뜻하지? 이건 쉽지 않은 대답이야. 과학자들은 이런 물음에 함부로 대답하지 못할 거야. 이건 과학자들이 생명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야. 생명을 정의하기는 다소 난해하나, 과학자들은 생명을 정의할 수 있어. 게다가 과학자들은 몇몇 사항을 합의할 수 있겠지. 생명체는 먹어야 하고, 번성해야 하고, 진화해야 해. 영양분을 얻기 위해 생명체는 일정한 화학 체계를 조성해야 해. 폭풍과 달리,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는 영양분을 얻고 싶어해. 생명체는 적극적으로 일정한 화학 체계를 조성하지. 여기 술집에서 우리가 저녁을 먹는 것처럼. (동동주를 마시고 돼지 고기를 먹는다) 생명체는 번성하고 싶어해. 미생물들은 분열할 테고, 나와 형처럼, 고등 동물들은 짝을 짓겠지. 만약 나와 형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생명 현상이 될 거야. 어머, 형, 왜 얼굴이 빨개? 동동주를 너무 많이 마셨어? 이건 그저 과학 이론일 뿐이야. 과학자들은 생명체가 번성하기 원한다고 말할 거야. 폭풍과 달리, 생명체는 후손을 낳기 원해. 그리고 생명체들은 진화하지. 생명체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체들은 상호 작용하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형질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나와 형이 아이를 낳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형질을 아이에게 물려주겠지. (두 술잔에 동동주를 붓는다)


남학생: 그래, 우리 아이는…. 아니, 이건 아니지. (고개를 몇 번 젓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생명 현상을 정의하지 못해. 타이곤은 후손을 낳지 못해. 하지만 타이곤은 생명체야. 모든 생명체가 번성한다는 정의는 옳지 않아. 타이곤과 노새와 다른 여러 생명체들은 후손을 낳지 못하고 진화하지 못해.


여학생: 아, 나는 생명을 정의하지 않았어. 나는 그저 생명 현상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특성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생명을 정의하고 싶다면, 나는 훨씬 복잡한 개념으로 파고들어야 할 거야. 하지만 <서브머지드>를 이야기하기 위해 구태여 생명을 정의할 필요는 없을 거야. 하지만 폭풍과 고래 상어를 봤을 때, 우리는 고래 상어에게 의지가 있다고 이해할 수 있어. 폭풍에는 그게 없지.


남학생: 결국 너는 생명 현상에 '의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구나. 그래, 생명 현상에는 '의지'가 있어. 영양분을 얻고 번성하기 위해 생명 현상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폭풍과 해일과 화산에는 이런 의지가 없어. 아무리 화산이 웅장하고 압도적이라고 해도, 화산은 그저 물리적인 규칙을 따를 뿐이야. 화산은 적극적으로 마그마를 흘리거나 용암들을 뿌리거나 누군가를 없애지 않아. 하지만 고래 상어는 적극적으로 작은 동물들을 먹고 싶어하겠지. (돼지 고기를 먹는다) 고래 상어는 적극적으로 이성과 교미하기 원하겠지. 진화는 '의지'와 아무 관계가 없으나, 생명체들이 적극적으로 번성하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번성하는 동안 그것들은 진화하지. 진화는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낳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의지들을 구경할 수 있어. 생물 다양성은 '수많은 의지들의 집합'이야. 그래서 생물 다양성은 놀랍지. 고래 상어는 그런 생물 다양성에 속했어. 포워드 언투 던과 화산에는 이런 감성이 없어. 내 말이 맞아? 내가 제대로 파악했어?


여학생: 나는 형에게 동의해. 나는 형이 옳다고 생각해. 생명 현상은 인류를 초월해. 생명 현상에는 의지가 있어. 생명 현상은 다양성들을 키우지. 그런 의지들은 아주 다양한 형태들로 이어질 수 있어. 인간과 갑오징어는 똑같은 지구 동물이야. 하지만 갑오징어는 나와 아주 다르지. 이 세상에는 갑오징어를 비롯해 수많은 차이들이 있어. 그런 차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그런 차이들을 볼 때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어. 보색이 있을 때 색깔이 뚜렷해지는 것처럼, 다양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생물 다양성이 정말 신비롭다고 생각해. 그것이 모두 살아있음에도,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법들과 형태들로 살아가지. 아무도 이걸 만들지 않았어. 적어도 우리는 아무도 이걸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해도 생명 현상은 엄청나게 다양해질 수 있지.


남학생: 맞아, 수많은 생명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그게 경이롭다고 생각해. 아무리 거대한 항성이나 폭풍이나 해일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의지들, 차이들, 다양성이 없어.


여학생: 그래서 포워드 언투 던과 화산보다 고래 상어는 웅장하고 신비로워. 고래 상어는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생명 현상들 중에서 하나야. 그래서 고래 상어는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어. 거대 괴수에게 감탄할 때, 우리는 그것이 움직이는 커다란 생명 현상이라고 느낄 거야. 게다가 <서브머지드>에는 다른 커다란 배가 없어. 소녀는 오직 쪽배를 탈 수 있을 뿐이야. (돼지 고기를 먹는다) 고래 상어에 비해 쪽배는 아주 작아.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고래 상어가 훨씬 거대하다고 느낄 거야. 고래 상어가 아주 쉽게 쪽배를 밀치고 뒤집을 수 있기 때문에. <서브머지드>에서 고래 상어는 쪽배를 뒤집지 않으나, 만약 내가 소녀가 된다면, 나는 언제 고래 상어가 쪽배를 뒤집을지 두려워하겠지. 물론 이 게임에서 주된 감성은 공포가 아니라 웅장함과 적막함과 신비로움이야. <서브머지드>는 쪽배를 이용해 고래 상어를 훨씬 웅장하게 과장할 수 있어.


남학생: <서브머지드>에서 고래 상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웅장한 생명 현상이지. 그래서 수많은 거대 괴수들은 동물 형체일 거야. 각종 공룡들과 상어들과 두족류 괴수들은 당연히 야생 동물들이야. 고지라와 모스라와 가메라는 초자연적이나, 결국 그것들 역시 동물 형체야. 고지라는 공룡과 비슷하고, 모스라는 나방이고, 가메라는 거북이지. 물론 우리는 온갖 거대하고 파괴적이고 괴상한 것들을 괴수라고 부를 수 있어. 하지만 그건 파생적인 개념이야. 근본적으로 거대 괴수는 생명 현상이야. 거대 괴수는 야생 동물이야. 만약 지구 생태계에 동물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가 유일한 동물이었다면, 거대 괴수라는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몰라. 공룡과 나방과 거북이 없다면, 어떻게 인류가 고지라와 모스라와 가메라를 상상할 수 있겠어? 거대 괴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야생 동물을 빼놓지 못할 거야. 아니, 거대 괴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야생 동물들과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해야 하겠지. (볶은 김치를 먹는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여학생: (두 술잔에 얼마 남지 않은 동동주를 따른다) 형이 뭐를 이해하지 못해?


남학생: 예전에 너는 <서브머지드>가 거대 괴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어. 하지만 <고지라> 시리즈와 달리, <서브머지드>에서 고래 상어는 주된 소재가 아니야. <고지라>에서 고지라는 주된 소재야. 고지라가 없다면, <고지라>는 아무 사건을 진행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서브머지드>에서 고래 상어는 주된 소재가 아니야. 고래 상어가 없다고 해도, <서브머지드>에서 소녀는 쪽배를 타고 얼마든지 물에 잠긴 폐허를 돌아다닐 수 있어. 고래 상어 덕분에 <서브머지드>는 훨씬 웅장하고 신비로울 수 있어. 하지만 고래 상어가 없다고 해도, <서브머지드>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 반면, 고지라가 없다면, <고지라>는 존재할 명분을 잃어. 아무리 고지라가 많이 출현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지라는 핵심 소재야. 2014년 <고지라>에서 고작 10분 동안 고지라는 나올 뿐이야. 하지만 출현 시간이 고작 10분에 불과하다고 해도, 고지라는 핵심 소재야. 반면, <서브머지드>는 그렇지 않아. 따라서 <서브머지드>는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니야. <서브머지드>는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일 뿐이고 거대 괴수 이야기가 되지 못해. 왜 너는 <서브머지드>가 거대 괴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여학생: 바다 괴수가 아주 커다란 감성을 담당하기 때문이야. 형, 만약 <서브머지드>에 고래 상어와 혹등고래가 없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른 감성을 느꼈을 거야. 아무도 바다 속에 거대한 뭔가가 돌아다닌다고 느끼지 못했겠지. 방금 전에 우리가 태블릿 PC 화면으로 본 것처럼, <서브머지드>에서 종종 소녀는 고래 상어나 혹등고래와 마주치지. 그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감탄하거나 깜짝 놀라지. 이런 경험 덕분에 <서브머지드>는 훨씬 장대하고 신비로운 게임이 될 수 있어. 형, 방금 전에 동영상 사이트에서 형이 <서브머지드> 게임 플레이 동영상을 찾았을 때, 수많은 동영상들의 썸네일들은 혹등고래 그림이었어. 왜 썸네일들이 혹등고래 그림이었을까? 혹등고래와 고래 상어 같은 거대 야생 동물들이 <서브머지드>를 훨씬 장대하게 포장하기 때문이야. 아무리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이 주된 내용이라고 해도, 고래 상어가 없었다면, <서브머지드>는 완전히 다른 감성을 풍겼을 거야. 아무리 <서브머지드>가 광활한 바다를 자랑한다고 해도, 거기에 거대한 고래 상어가 없다면, <서브머지드>는 다소 단조로웠을 거야. 아무리 우주가 넓다고 해도, 거기에 외계 생명체가 없다면, 우리는 우주가 밋밋하고 시시하다고 느끼겠지. <서브머지드> 역시 마찬가지야. <고지라>와 <서브머지드>가 다르다고 해도, <서브머지드>에서 거대 괴수는 중요해.


남학생: 좋아, 나는 거기에 동의해. 하지만 아직 나는 <서브머지드>가 거대 괴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브머지드>는 그저 거대 괴수를 보여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일 뿐이야. <서브머지드>는 허먼 멜빌이 쓴 <백경> 같은 소설이 아니야. <백경>에서 향유 고래는 주된 소재이나, <서브머지드>에서 고래 상어는 주된 소재가 아니야. 아무리 고래 상어가 신비롭다고 해도.


여학생: <백경>에서 이스마엘은 말했지. 풍부한 물이 있기 때문에 대양은 신비로워. 나이아가라 폭포가 모래 폭포라면,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신비롭다고 여기지 않겠지. 하지만 결국 <백경>은 향유 고래 이야기야. 바다 속에 거대한 뭔가가 헤엄치기 때문에 <백경>은 바다가 아니라 그걸 이야기하지. <서브머지드> 역시 마찬가지야. 고래 상어가 몸뚱이를 내밀지 않는다면, <서브머지드>에서 바다는 너무 시시하게 보일 거야.


남학생: 그렇다고 해도 <서브머지드>는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네가 잘못 말했다고 생각해.


여학생: 하지만 이 게임에서 고래 상어는….


남학생: 그래, 그래. 이 게임에서 고래 상어는 분위기를 웅장하게 연출할 수 있지. 그래서, 뭐? 고래 상어가 없다고 해도, <서브머지드>에서 서사는 크게 바뀌지 않아. 아무리 고래 상어가 분위기를 웅장하게 연출한다고 해도, 고래 상어는 서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아. 고래 상어는 주된 요소가 아니라 보조적인 요소야. 너는 보조적인 요소를 주된 요소라고 이야기했어. 그건 왜곡이야. 너는 사실을 왜곡했어. 나는 네가 거대 괴수를 좋아하기 때문에 네가 <서브머지드>를 거대 괴수 이야기라고 왜곡했다고 생각해. 내 생각이 틀릴까?


여학생: 하지만 나는, 나는….


남학생: 잘 생각해 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과장하기 위해 누구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왜곡하지. 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과 논리가 아니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원하지. 심지어 종종 사람들은 왜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해. 너는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을지 몰라. <서브머지드>가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님에도, 너는 그걸 거대 괴수 이야기라고 왜곡했어. 내가 틀렸어?


여학생: (대답하지 않고 동동주를 마신다) 아니, 틀린 사람은 나야. 맞아, 나는 잘못했어. 하지만 나는 완전히 틀리지 않았어. 형은 고래 상어 덕분에 <서브머지드>가 훨씬 장대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된다고 생각하지. 형이 거기에 동의한다면, 나 역시 거기에 만족할 수 있어. 사실 <서브머지드>가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그게 중요할까? 나는 틀렸어. 나는 잘못 말했어. 그렇다고 해도 고래 상어는 웅장하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야. <서브머지드>는 거대 괴수 같은 고래 상어를 멋지게 보여주지. 장르를 규정하고 비평하는 행위에는 가치가 있겠으나, 그것보다 우리는 <서브머지드>가 무엇을 보여주는지 파악해야 해. <서브머지드>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들은 고래 상어가 웅장하고 신비롭다고 느끼겠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야.


남학생: 맞아, 고래 상어는 웅장하고 신비롭지. 자연 생태계에는 이런 웅장한 것들이 많아. 그것들은 살아있는 웅장함이지. 하지만 <서브머지드>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기후 변화를 암시하는 것 같아. 그래서 바다는 도시를 덮쳤고, 인류 문명은 멸망했지. 이건 그저 게임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아. 이미 현실에서 자연 생태계는…. (동동주를 마신다)


여학생: (한숨을 쉬고 젓가락으로 돼지 고기 조각들을 헤집는다) 자연 생태계는 심각한 오염들에 시달리는 중이지. 인류 사회가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류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현상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다들 이윤을 추구하고, 이윤을 위해 다들 자연 생태계를 상품화하지. 설사 누군가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원한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상품화를 중시해. 자연 생태계가 상품이 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가차 없이 상품으로 만들지. 아무리 그게 폭력적이라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아.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얼마든지 폭력을 휘두를 수 있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권력자들은 거대 독점 자본가들이야. 민중들이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원한다고 해도, 민중들에게는 권력이 없어.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왕이야. 따라서 우리가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인류가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때, 수많은 약자들 역시 고통스러워하겠지. 웅장한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수많은 약자들을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뛰어넘어야 해.


남학생: 그래,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뛰어넘어야 하지. 우리는 사회 구조를 혁명해야 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할까? 나는 아직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겠어. 나는 여전히 혁명 같은 용어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해. 나는 어떻게 우리가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어. 분명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문제야. 하지만 우리가 정말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지…. 나는 너에게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겠어. 미안해.


여학생: 괜찮아. 괜찮아. 나는 형이 당장 사고 방식을 바꾸기 원하지 않아. 오히려 그건 위험할지 몰라. 갑자기 형이 사고 방식을 바꾼다면, 그건 아주 위험할지 몰라. 이제까지 형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사람이 사고 방식을 바꿀 수 있겠어? 하지만 형은 내 의견을 거부하지 않았어. 형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고민하기 시작했어. 게다가 형은 기본 소득, 시민 배당 정책에 동의하지. 그건 당장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정책이고 동시에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디딤돌이 될지 몰라. 물론 시민 배당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야. 계급 투쟁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시민 배당은 불가능할 거야. 계급 투쟁이 없다면, 시민 배당은 보수 우파적인 정책이 되겠지. 그건 상황을 악화시킬지 몰라. 그래서 나는 형이 계속 고민하기 원해. 우리가 완전히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함께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그것이야. 그래서 나는 형이 좋아. 형이 고민할 수 있기 때문에. (술잔을 든다)


남학생: (술잔을 들고 여학생의 술잔과 부딪힌다. 동동주를 마신다) 우리가 서로 사귀는 사이인데도, 우리가 완전히 합의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서글플지 모르지. 가끔 나는 네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내가 네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지 몰라. 설사 공감 장치가 나타난다고 해도, 사이버펑크가 현실이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완전히 이해할 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겠지. 너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수 있겠지. 아무리 우리가 사랑하고 섹스한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야. 우리는 서로 수렴할 수 있으나,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할 거야. 하루 종일 우리가 몸을 섞고 섹스한다고 해도, 오르가즘을 느끼며 우리가 하나를 인식한다고 해도, 그건 완전한 합일이 아니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가 계속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원해. 그래서 나는 너에게 끌리는지 모르지.


여학생: 그래, 나는 이런 문제들을 계속 떠들고 싶어. 환경 오염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야. 우리가 자본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우리는 환경 오염들에 이바지하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폭염을 떠들고 취업을 떠들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이바지하고 환경 오염들에 이바지하지. 폭염과 취업은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는 문제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떠든다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본주의를 따른다면, 그런 문제들은 훨씬 심각해질 거야.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저도 모르게 폭력과 수탈에 이바지하겠지. 다들 취업이 문제라고 말해. 심지어 취업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들을 끊어. 해고 노동자 자살은 별로 놀랍지 않은 뉴스야. 하지만 왜 취업이 문제가 될까? 그 자체로서 취업이 문제일까? 그건 아니야.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자본가들이 임금 노동자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취업은 문제야. 임금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매달리기 때문에 취업은 문제야. 그래서 해고 노동자들은 스스로 목숨들을 끊지. 그건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인 타살이야. 따라서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취업이 문제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런 사회적인 타살에 이바지하겠지. 우리는 이걸 바꿔야 해.


남학생: (젓가락으로 돼지 고기를 대충 헤집는다) 그래, 사실 해고 노동자 자살은 자살이 아니겠지. 그건 타살이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해고 노동자들을 없애지.


여학생: 해고 노동자 자살이 사회적인 타살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인식하지 못해. 오히려 우리는 이런 사회적인 타살 제도를 떠받들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예전에 어떤 편의점에서 내가 아르바이트할 때, 편의점 점장은 나를 성추행하기 원했어. 편의점 점장은 그런 의도를 품을 수 있었어. 편의점 점장이 중년 남자이고, 내가 여대생이기 때문에. 동시에 편의점 점장이 사장이고, 내가 비정규 임금 노동자이기 때문에. 나는 얼마든지 편의점 점장에게 대들 수 있었어. 거기에서 아르바이트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얼마든지 학비를 낼 수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가난한 여자들이 쉽게 일자리를 버릴 수 있을까? 아무리 성 추행이 심각하다고 해도, 먹고 살기 위해 가난한 여자들은 일자리들에 매달려야 해. 심지어 여자들은 매춘업 행위에 뛰어들어야 해. 이렇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끔찍함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취업이 문제라고 운운하지. 남자들이 성 추행하기 원할 때, 여자들은 당당하게 거기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해. 여자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서는 안 돼. 다른 약자들 역시 마찬가지야.


남학생: (젓가락을 다소 거칠게 내려놓는다) 잠깐, 씨발, 편의점 성 추행? 그런 일이 있었어? 무슨 편의점에서?


여학생: 아, 진정해, 형. 그 편의점 점장은 떠났어. 여기 학교 알바 노조가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이야. 노동 조합이 있다면, 노동자들은 보호를 받을 수 있어.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 조합을 깨뜨리기 원하고, 계속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고, 노동 조합 간부들을 회유하거나 압박하지. 문제는 이거야. 이렇게 먹고 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삶이 팍팍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겠어?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연 생태계를 고려할 수 있을까? 자본가들이 고용한다면, 그 자본가들이 핵 폐기물들을 버린다고 해도, 비정규 노동자들은 감지덕지할 거야. 사회 구조는 평등해져야 해. 시민 배당은 그걸 도울 수 있을지 몰라. 평등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함께 자연 생태계를 관리해야 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매달리지 말고,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매달리지 말고, 개발도상국들은 강대국들에게 매달리지 말아야 해.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취업이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돼. 그건 사회적인 타살에 이바지할 거야. 이건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고, 그래서 나는 계속 떠들고 싶어. 하지만… 내가 계속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걸림돌이 될지 모르지.


남학생: 그게 무슨 뜻이야? 걸림돌? 무슨 걸림돌?


여학생: 저기, 형, 생각해 봐. 우리 학과에서 나는 아싸에 가까워. 다들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내가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야. 특히, 몇몇 남자애는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하지. 형이 아는 것처럼, 나는 몇 번 그런 남자애들과 크게 싸웠어. 심지어 여자애들 역시 내가 너무 까탈스럽다고 생각해. 형이 나와 사귄다면, 우리 학과는 형을 따돌릴지 몰라. 나는 그런 따돌림에 상관하지 않아. 뭐, 나는 그런 년이야. 하지만 형은….


남학생: 나 역시 그런 따돌림에 상관하지 않아. 학과 전체가 우리를 따돌린다면, 우리는 아싸 커플이 되겠지. 그게 뭐 어때? 나는 아싸 커플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너 없는 인싸보다 너와 함께 아싸가 되고 싶어. 예전에 내가 말했지? 우리는 크게 떠들어야 해. 너처럼 나는 떠들고 싶어. 우리가 열심히 떠든다면, 어쩌면 몇몇 학과생은 문제를 깨달을지 몰라. 나는 모두가 우리에게 동의하기 바라지 않아. 심지어 나조차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너를 좋아함에도,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어떻게 학과 전체가 우리를 이해할 수 있겠어? 나는 그저 너처럼 떠들고 너와 함께 떠들기 원할 뿐이야. 나는 그런 과정이 좋아. 나는 결과가 아니라 그저 과정을 겪을 수 있을 뿐이겠지.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다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계속 아싸 커플이 될지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크게 떠든다면, 그건 세상을 조금 바꾸는 과정이 될지 몰라.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해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 꿘 후배님. 아싸 커플은 아주 독특한 경험일지 몰라. 하하, 아싸 커플은 휘귀종이겠지.


여학생: 형은 이게 재미있다고 생각해? 형은 모르지 않겠지. 우리 학과에서 형은 인기가 많아. 하지만 학과생들이 우리 관계를 눈치채기 시작한다면, 형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할 거야. 형은 손가락질을 받고, 눈총을 받고, 욕을 먹을 거야. 그게 두렵지 않아?


남학생: 왜 내가 그걸 두려워해야 해? 나는 손가락질을 받고, 눈총을 받고, 욕을 먹을 거야. 너와 함께.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손가락질을 받고 싶어. 네가 눈총을 받기 때문에 나 역시 눈총을 받고 싶어. 네가 욕을 먹을 때, 나는 너와 함께 욕을 먹고 싶어.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여학생: (남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형, 형은 정말….


남학생: 정말 내가 대단한 남자 친구지? 왜, 너는 내가 떠나기 바라니? 내가 떠날까?


여학생: 아니, 아니. 나는…. 나 역시 형과 함께 있고 싶어. 응, 나 역시 형과 함께 있고 싶어.


남학생: 그래, 우리 앞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함께 걸을 수 있겠지. (술잔을 들고 여학생의 술잔과 부딪힌다. 동동주를 마신다. 술병을 든다) 아, 이런, 전부 비었나….


여학생: 이리 줘. 이런, 정말 비었네? (술병을 기울인다) 어머, 형, 이것 봐. 하얗고 걸쭉한 물방울들은 주르륵 떨어지는 중이야. 하얗고, 걸쭉한, 물방울들은, 똑똑똑, 떨어진다…. 하얗고, 걸쭉한….


남학생: (고개를 흔든다) 또 시작이야. 아, 이 아가씨, 지랄하네.


여학생: 뭐? 냐하하, 형, 그게 무슨 뜻이야? 지랄?


남학생: 그렇게 째리지 마세요, 아가씨. 나는 그저 <헤일로> 시리즈의 외계인 종족 이름을 말했을 뿐이야. 더 마시고 싶지 않다면, 이제 슬슬 일어날까? 아, 오늘 좀 많이 마신 것 같아. 머리는 알딸딸하고, 배는 부르고….


여학생: 흠, 그렇게 알딸딸한 상태로 집에 갈 수 있겠어? 전철에서 형은 계속 서있어야 할지 몰라. 뭐, 훨씬 좋은 방법이 있어. 나는 바닥을 빌려줄 수 있어. 저기, 있지, 형, 오늘 아침에, 학교에 오기 전에 나는 원룸을 청소했어. 여기에서 원룸은 훨씬 가깝지.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고, 뭐, 늦잠은 문제가 되지 않을 테고….


남학생: 야, 너, 그건…. 그건 좀….


여학생: 어머, 싫다고 말하지 않네? 그래, 알아, 알아. 형 역시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지? 가까운 원룸에서 자고 싶지? 걱정하지 마. 깔끔하게 내가 청소했다니까. 머리카락들과 뒹굴 필요는 없을 거야. 왜 내가 스티커 광고들을 많이 모으겠어. 머리카락들을 청소할 때, 그것들이 최고이기 때문이지. 형, 생각해 봐. 이제 연말은 얼마 남지 않았어.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밖으로 나돌아다녀….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손을 빠르게 휘젓는다) 상관하지 마. 아무것도 아니야. 자, 일어날까?


[여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남학생 역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학생과 남학생은 술값을 계산하고 술집 밖으로 나간다. 여학생은 콧노래를 부르고, 남학생은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눈송이들이 내리고 캐롤송들이 울려퍼지는 금요일 밤에 학교 주변의 먹자 골목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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