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불타는 세계>와 미래 생태 도시, 소급 적용 본문
[미래 생태 도시가 19세기 유토피아 로망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나요? 네,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이른바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변증법이 유물론에 기반한다는 뜻입니다. 변증법은 세계가 계속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정(thesis)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에게는 반(antithesis)이 있고, 정과 반은 합(synthesis)을 만듭니다. 다시 합은 정이 되고, 다시 정에게는 반이 있고, 다시 정과 반은 합을 만듭니다. 또 다시 합은 정이 됩니다. 그리고 정-반-합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오직 정으로서만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합이 되고, 다시 합이 되고, 또 다시 합이 되고, 계속 합이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연이어 바뀝니다.
여기에서 세계를 바꾸기 위한 원인, 동력이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인간 정신이 세계를 바꾼다고 설명합니다. 계몽주의처럼, 찬란한 인간 의식이 깨어나고 고양될 때, 인간 의식은 세계를 바꿉니다. 하지만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이게 관념론이라고 비판합니다.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물질 상황, 먹고 사는 문제가 세계를 바꾼다고 설명합니다. "씨바, 못 살겠다! 갈아엎자!" 이 외침은 하늘에서 갑자기 인간 의식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고 증명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 의식은 깨어나고 세계를 바꾸기 원합니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가 세계를 바꾸고 바꾼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 2020>에서 로날도 뭉크는 카를 마르크스가 변증법적인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말한 적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비단 로날도 뭉크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이것을 지적합니다. 이건 사실, 팩트입니다. 분명히 카를 마르크스는 이 용어를 직접 말한 적이 없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변증법적인 유물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변증법적인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 용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 철학과 변증법적인 유물론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변증법적인 유물론이 잘못된 용어인가요?
<자본론> 둘째 판본 후기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을 논의합니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내 변증법은 헤겔과 정반대이다. 헤겔은 사고 과정이 현실의 창조자라고 주장한다. 현실은 그저 이념의 외부 현상에 불과하다. 반면, 나는 물질적인 것이 인간 사고에 반영되고 이게 관념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헤겔 변증법은 거꾸로 서있다.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 나는 헤겔을 똑바로 세운다." 이렇게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이 헤겔 변증법을 뒤집는다고 주장합니다. 헤겔이 물질적인 것보다 관념적인 것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카를 마르크스는 물질에서 관념이 비롯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카를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이용합니다. 이 변증법은 유물론에 기반합니다. 물질에서 관념이 비롯하기 때문에, 이건 유물론입니다. 비록 카를 마르크스가 변증법적인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해도, 분명히 카를 마르크스는 이 개념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역사 유물론을 주장했고,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변증법적인 유물론을 주장했습니다.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왜곡이 아닙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것을 인식했습니다.
비록 카를 마르크스가 특정한 명칭(변증법적인 유물론)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이미 카를 마르크스가 이 개념을 인식했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특정한 명칭을 '소급 적용'했습니다. <자본론> 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소급 적용'은 주관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로날도 뭉크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적하나, 오히려 로날도 뭉크는 오해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정확합니다. 아무리 이오시프 스탈린이 뻘짓거리들과 무참한 삽질들을 반복했다고 해도, 소급 적용(변증법적인 유물론)은 타당합니다. 만약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거나 왜곡이라면, 오직 이오시프 스탈린만 문제가 아닐 겁니다.
마가렛 캐번디시는 <불타는 세계>를 썼습니다. SF 평론가들은 <불타는 세계>가 원형적인 SF 문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모든 SF 평론가가 마가렛 캐번디시를 원형적인 SF 작가라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불타는 세계>는 원형적인 SF 요소들을 드러냅니다. 어떤 서평에서 듀나님이 이 문학을 SF 장르에 집어넣은 것처럼, <불타는 세계>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마가렛 캐번디시는 SF 장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가렛 캐번디시는 17세기 작가이고, SF 장르는 20세기 (중반) 용어입니다. 마가렛 캐번디시는 자신이 SF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렛 캐번디시는 특정한 명칭(SF)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평론가들이 <불타는 세계>를 SF 장르에 집어넣는다면, 이건 '소급 적용'일 겁니다. 듀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렛 캐번디시가 특정한 명칭(SF)을 알지 못했고, 듀나님이 <불타는 세계>를 SF 장르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듀나님은 <불타는 세계>를 소급 적용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급 적용한 것처럼, 듀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날도 뭉크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적했습니다. 만약 이오시프 스탈린이 틀렸다면, 듀나님 역시 틀렸을 겁니다. 다른 SF 평론가들 역시 틀렸습니다. 그래서 <불타는 세계>가 SF 문학이 아닌가요?
비단 마가렛 캐번디시와 <불타는 세계>만 아니라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 역시 문제가 됩니다. 아니, 마가렛 캐번디시보다 메리 셸리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본격적인 SF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생태학자들이 에른스트 헤켈을 생태학 시초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SF 평론가들은 <프랑켄슈타인>이 SF 시초라고 평가합니다. 에른스트 헤켈이 생태학 시초가 되는 것처럼, 메리 셸리는 SF 시초가 됩니다. 하지만 SF 장르가 20세기 (중반) 용어이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이 명칭을 알지 못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자신이 SF 소설 시초를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메리 셸리는 특정한 명칭(SF)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평론가들이 <프랑켄슈타인>을 SF 장르에 집어넣는다면, 이건 '소급 적용'일 겁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급 적용한 것처럼, SF 평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서평에서 듀나님은 메리 셸리가 SF 시초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듀나님 역시 SF 장르를 소급 적용했습니다. 로날도 뭉크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적했습니다. 만약 이오시프 스탈린이 틀렸다면, 듀나님 역시 틀렸을 겁니다. 다른 SF 평론가들 역시 틀렸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이 SF 소설이 아닌가요? <불타는 세계>와 <프랑켄슈타인> 양쪽이 SF 장르에 속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급 적용'은 가능합니다. 이건 틀린 해석,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평론가들은 <불타는 세계>와 <프랑켄슈타인>을 SF 장르에 얼마든지 집어넣을 수 있고, 이건 타당한 분류입니다. 마가렛 캐번디시와 메리 셸리는 SF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꼰대 평론가들은 <프랑켄슈타인>이 유치한 SF 소설보다 점잖은 주류 문학이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꼰대 평론가들(과 꼰대 독자들과 꼰대 작가들)은 SF 소설이 오직 외계인과 번쩍거리는 광선총과 지구 침략만 이야기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SF 장르가 시작했는지 파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장르는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7~19세기 서구 근대화는 환상 문학, 사변 문학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건 SF 장르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SF 평론가들은 마가렛 캐번디시와 메리 셸리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유구한 인류 문화에서 환상 문학, 사변 문학은 주류였습니다. 온갖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비(非)현실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이것들은 환상 문학, 사변 문학이 됩니다. 창조신이 홍수를 퍼부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라마 떼와 함께 동굴 속에 숨습니다. 홍수는 세상을 휩쓸었고 물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땅으로 나가고, 새로운 땅에서 라마 떼는 새롭게 번성합니다. 이 전형적인 홍수 신화는 고대 환상 문학, 사변 문학입니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인류 문화들은 사변 문학들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17~19세기 이후, 환상 문학은 서구 근대화를 덧붙입니다. 사회 철학과 자연 철학이 새로운 뭔가를 설명했기 때문에, 환상 문학은 이것을 덧붙입니다. 이제 환상 문학은 인조인간을 이야기하거나 만능 잠수함을 이야기하거나 화성 식물이 지구를 테라포밍한다고 이야기하거나 미래 사회주의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이 흐름은 20세기로 이어지고, 20세기 환상 문학들은 SF 소설이 됩니다. 이렇게 SF 장르는 나타났습니다. 환상 문학이 서구 근대화를 덧붙이는 동안, 마가렛 캐번디시와 메리 셸리는 이 뚜렷한 흔적을 드러냈습니다.
아무리 평론가들이 마가렛 캐번디시와 메리 셸리를 SF 장르에 집어넣고 소급 적용한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과잉 해석하지 않은 것처럼, 메리 셸리는 SF 작가가 됩니다. 비단 메리 셸리만 아니라 SF 생태학 역시 타당한 소급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윌리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자연과 문명 관계를 고민합니다. 소설 영어 원제는 <News from Nowhere>이나, 번역자 박홍규 교수는 이 소설이 자연과 문명을 깊게 고민하기 때문에 번역 제목이 '에코토피아'라고 설명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19세기 대표적인 자연 문학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비디오 게임 문화는 어떻게 자연과 문명이 영향을 미치는지 묘사합니다. <산소 미포함>에서 우주 개척자들은 지속 가능한 자연 환경을 조성하고 살아남습니다. <산소 미포함>에서 자연(어스름갓, 는지렁이, 꼬집후추콩, 기끌이, 골무갈대, 기타 등등)이 문명(우주 개척 기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자연 속에서 문명이 먹고 살기 때문에, <산소 미포함>은 자연과 문명 관계를 묘사합니다. 특히, <산소 미포함>에서 우주 개척 기지라는 문명과 어스름갓 같은 생태계 구성 요소가 비현실이기 때문에, <산소 미포함>은 자연과 문명을 특별하게 묘사합니다.
21세기 초반 게임 <산소 미포함>이 19세기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로 이어질 수 있나요?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무산자 민중 계급은 산업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환경 오염들을 해결하고, 야생 삼림을 보호합니다. 목가적인 미래 중세 마을은 비(非)현실입니다. 자연과 문명을 논의하기 위해 <에코토피아 뉴스>는 비현실을 제시합니다. 독자는 비현실(미래 사회주의 마을)을 읽고 환경 오염을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산소 미포함>이 비현실을 제시하고 자연과 문명을 묘사하는 것처럼, <에코토피아 뉴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자연 문학들보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특별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산소 미포함>에게 비현실과 자연-문명과 SF 장르는 커다란 공통점, 유사성입니다. 그래서 <산소 미포함>이 <에코토피아 뉴스>로 이어질 수 있나요?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21세기 초반 비디오 게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우주 개척 기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산소 미포함>에서 여자 개척자들은 열심히 노동하나, <에코토피아 뉴스>는 성별 고정 노동을 묘사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급진적이었고 선구적이었으나, 시대적인 한계(가부장 편견)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수구 꼴통입니다.
19세기 수구 꼴통 작가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습니다. 21세기 초반 비디오 게임이 19세기 꼴통 소설로 이어질 수 있나요? 이게 과잉 해석이 아닌가요?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타당하게 소급 적용한 것처럼, 메리 셸리가 최초 SF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산소 미포함>은 <에코토피아 뉴스>로 이어집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산소 미포함>에게 비현실과 자연-문명과 SF 장르가 커다란 유사성이기 때문에, 이 '소급 적용'은 유사성의 함정이 아닐 겁니다. SF 생태학 범주는 <에코토피아 뉴스>와 <산소 미포함>을 묶을 수 있습니다. SF 문학 <불타는 세계>처럼, 이 소급 적용은 오류가 아닙니다.
<에코토피아 뉴스>가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이건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민주 사회주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이른바 '녹색 뉴 딜'을 벼르는 중입니다. 버니 샌더스는 신자유주의가 기후 변화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사회주의 정책들이 기후 변화를 막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대표적인 Cli-Fi 작가 역시 녹색 뉴 딜을 지지합니다. 급진적인 노동당 당수 제러미 코빈이 참패를 겪었기 때문에, 버니 샌더스 역시 아슬아슬하나, 만약 버니 샌더스가 사회주의 정책들을 정말 적용한다면, 이건 기후 변화에 대처할지 모릅니다.
물론 미국 민주 사회주의 정당(DSA)에게는 너무 치명적인 한계들이 있습니다. 기후 정의는 그저 기온 변화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기후 정의는 어떻게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회적인 약자들과 자연 환경을 식민화했는지 비판합니다. 나오미 클라인이 고백한 것처럼, 기후 변화는 단순한 자연 과학 문제가 아니고 국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기후 변화는 지구 생물권을 포괄하고 제3세계를 포괄합니다. 버니 샌더스가 이것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나요? 미국 민주 사회주의 정당이 총체적인 시각을 드러내나요? DSA 당원들이 비단 미국 상황만 아니라 지구 생물권과 제3세계를 함께 바라보나요? 그들이 그렇게 하나요?
20세기 중반부터 신자유주의 시작까지, 이 기간은 유럽 복지 국가들에게 전성기였습니다. 많은 진보 진영들은 이 기간이 유럽 사회 민주주의 전성기라고 예찬합니다. 하지만 유럽 사회 민주주의가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암울한 고통에서 제3세계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식민지 수탈이 서구 복지 국가들을 뒷받침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것을 지적했고, 이것을 변명하기 위해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문명화 사명을 들먹였습니다. 사회 민주주의는 절대 평화롭지 않습니다. 사회 민주주의는 끔찍한 열대 밀림 파괴에 기반합니다. DSA는 어떤가요? DSA가 오직 서구 문명만 떠받들지 않나요?
녹색 뉴 딜이 오직 미국을 비롯해 몇몇 강대국 상황만 해결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해도 만약 DSA가 기후 변화에 정말 대처한다면, 이건 <에코토피아 뉴스>가 옳다는 뜻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사회주의가 환경 오염들을 막는다고 묘사합니다. DSA가 사회주의 정책들을 적용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한다면, 이 환경 운동과 <에코토피아 뉴스>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을 겁니다. 이게 타당한 해석인가요? 윌리엄 모리스는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를 알지 못했습니다. 19세기 꼴통 윌리엄 모리스는 여자가 과감한 정치에 뛰어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SF 장르가 마가렛 캐번디시에게 소급할 수 있는 것처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와 민주 사회주의 정당은 <에코토피아 뉴스>에게 소급할 수 있습니다. SF 생태학 범주는 19세기 후반 윌리엄 모리스와 21세기 초반 킴 스탠리 로빈슨을 묶을 수 있습니다. 비록 킴 스탠리 로빈슨이 윌리엄 모리스의 가부장 편견을 비판한다고 해도, 윌리엄 모리스와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슷한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 소급 적용은 오류가 아닐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쓴 것처럼, 킴 스탠리 로빈슨 역시 <오로라>를 썼습니다. 이 하드 SF 소설은 자연과 문명을 고민합니다.
하드 SF 소설 <오로라>에서 장거리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하기 때문에, 우주선은 문명이 되고, 바이오 돔은 자연이 됩니다. 무엇보다 이건 폐쇄 생태계입니다. <오로라>는 비현실(폐쇄 생태계)을 제시하고 자연(바이오 돔)과 문명(우주선)을 고민합니다. 이 기준에서 <에코토피아 뉴스>와 <오로라>는 비슷합니다. 흠, 만약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가 <에코토피아 뉴스>와 <오로라>를 읽는다면, 알렉산드리아는 생태 사회주의가 두 사변 문학을 묶을 수 있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생태 사회주의가 <에코토피아 뉴스>와 <오로라>를 묶는 것처럼, 소급 적용은 <에코토피아 뉴스>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종종 어떤 비디오 게임들은 미래 생태 도시를 묘사합니다. 미래 생태 도시는 첨단 기술입니다.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을 좋아했습니다. 적어도 <에코토피아 뉴스>는 첨단 미래 도시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미래 첨단 도시가 <에코토피아 뉴스>로 이어질 수 있나요? 비록 윌리엄 모리스가 미래 첨단 도시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래 첨단 도시는 유사성을 드러냅니다. 자연과 문명, 환경 보호, SF 장르는 커다란 유사성입니다. 이 유사성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래 첨단 도시를 묶을 수 있습니다. 이건 소급 적용이나, 이 소급 적용은 틀리지 않습니다.
박문영 작가는 <지상의 여자들>을 썼습니다. 문학 평론가가 이 소설을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을까요? 네, 이건 가능합니다. 비록 샬롯 퍼킨스 길먼이 21세기 초반 수구 꼴통 헬조선을 알지 못했다고 해도,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과 <지상의 여자들>이 여자 공동체를 묘사하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샬롯 퍼킨스 길먼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는 샬롯 퍼킨스 길먼과 <지상의 여자들>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이 샬롯 퍼킨스 길먼에게 소급 적용하는 것처럼, 미래 첨단 생태 도시는 <에코토피아 뉴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소급 적용'은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이건 타당한 분류입니다. 게다가 이 소급 적용은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SF 독자들은 이 소급 적용을 분류하고 기후 변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한때 역사의 종언은 유행어가 되었으나, 이제 이 유행어는 엉터리가 되었습니다. 기후 변화가 여섯째 대멸종을 부추길지 모르고, 이게 진짜 (홀로세) 역사의 종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홀로세) 역사의 종언을 부추깁니다. 이 '소급 적용'은 알렉산드리아 코르테스(와 DSA)가 기후 변화에 대처할지 모른다고 시사합니다.
19세기 후반 <에코토피아 뉴스>부터 21세기 초반 생태 도시 게임까지, 이 '소급 적용'은 SF 생태학, SF 환경 사회학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캐롤린 머천트는 토마소 캄파넬라와 <태양의 도시>가 이 분류에 속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에코토피아 뉴스>와 생태 도시 게임이 다르다고 해도, 첨단 생태 도시 게임은 <에코토피아 뉴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에코토피아 뉴스>와 생태 도시 게임은 단점들(가부장 편견, 관념론, 시장 경제, 과학 만능주의, 얄팍한 환경 운동)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이런 소급 적용들입니다.
17세기 문학 <태양의 도시>부터 21세기 초반 <산소 미포함>까지, SF 환경 사회학은 소급 적용합니다. 이 소급 적용은 SF 장르가 자연과 문명을 특별하게 고민한다고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SF 팬들은 여섯째 대멸종을 새롭게 논의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아직 국내 SF 문화는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를 내놓지 못하고 SF 환경 사회학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다들 한국 SF 전성기를 떠드나, 기후 변화 시대에서 한국 SF 전성기는 환경 사회학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내 SF 문화가 새로운 소급 적용(SF 환경 사회학)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게임 <아노 2070> 스크린샷 출처: Blade.D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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