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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마스 콜로니 빌더>, 기후 허구, 인구 증가 본문

SF & 판타지/바이오 돔과 테라포밍

<마스 콜로니 빌더>, 기후 허구, 인구 증가

OneTiger 2022. 10. 18. 14:10

[외계 바이오 돔들은 많은 인구를 부양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라탕을 좋아합니다. 마라탕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마라탕은 얼큰합니다. 마라탕과 달리, 초콜릿 케이크는 얼큰하지 않습니다. 초콜릿 케이크는 달달합니다. 마라탕이 얼큰하고 초콜릿 케이크가 달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마라탕과 초콜릿 케이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마라탕+초콜릿 케이크'는 너무 어색한 조합일 수 있습니다. 마라탕+초콜릿 케이크처럼, 어떤 조합들은 너무 어색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 역시 비슷한지 모릅니다. 이 블로그 역시 어색한 조합인지 모릅니다. 이 블로그는 사이언스 픽션과 생태학을 연결합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블로그는 '사이언스 픽션(SF)+생태학, 환경 사회학'입니다. 사이언스 픽션(SF)과 생태학, 환경 사회학이 어울리나요? 어떤 사람들은 이 조합을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SF 범주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SF 범주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가장 커다란 범주조차 차지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미래 문명, 첨단 기술들을 강조합니다. 우주 미래 문명, 첨단 기술들과 생태학, 환경 사회학이 어울리나요? 글쎄요, 두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우주 미래 문명과 환경 사회학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우주 미래 문명과 환경 사회학이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를 어색한 조합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마라탕과 초콜릿 케이크처럼, 두 가지는 너무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두 가지가 어색한 조합이라고 해도, 많은 사례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생태학이 이어질 수 있다고 보여줍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미래 문명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도 우주 탐사, 우주 개척은 주된 주제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우주 탐사, 우주 개척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왜 미래 인류 문명이 우주 탐사, 우주 개척을 추진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환경 오염, 자원 고갈일 수 있습니다.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자원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구는 풍요롭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인류 문명은 지구에게 의지하지 못합니다. 인류가 지구에게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는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원합니다. 인류가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원하기 때문에, 인류는 우주 탐사를 추진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행성급 오염은 우주 개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현실에서 과학자들, 기업가들조차 이것을 주장합니다. 기후 변화가 위험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나고 외계 행성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가 우주 개척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환경 사회학은 어울릴 수 있습니다. 2022년 오늘날, 환경 오염+우주 개척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비록 사이언스 픽션이 우주 개척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과 환경 사회학은 어울릴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어떻게 인류 문명이 멸망하는지 묘사합니다. 사악한 외계인들이 침략하고,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고, 거대 괴수가 상륙하고, 화산들이 폭발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확장하고, 다른 여러 이유들 때문에, 인류 문명은 멸망합니다.

 

여러 이유들은 환경 오염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 역시 이유일 수 있습니다. 만약 환경 오염들이 너무 위험한 수준이라면, 더 이상 인류 문명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환경 아포칼립스는 가장 현실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인지 모릅니다. 2022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문명 멸망이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멸망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유엔(UN) 보고서조차 인류 문명이 멸망할지 모른다고 (우회적으로) 예상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오로라>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대규모 개척 우주선을 묘사합니다. 왜 대규모 개척 우주선이 항해하나요? 기후 변화가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대기권 온실 가스 농도는 500ppm을 넘어섰고 지구 생물권을 파괴했습니다. <오로라>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는 우주 개척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단 <오로라>만 아니라 <뉴욕 2140> 역시 썼습니다. <뉴욕 2140>은 우주 개척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우주 개척 없이, 이 소설은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환경 아포칼립스를 현실적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뉴욕 2140>처럼, 기후 허구가 (가장) 현실적인 환경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기후 허구(소설)들은 독립적인 범주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 변화를 걱정하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 내부에서 기후 허구(Climate Fiction)는 독립적인 범주가 됩니다. 기후 허구가 독립적인 범주인 것처럼, 우주 개척 없이, 사이언스 픽션은 환경 사회학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환경 사회학은 어색한 조합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라탕과 초콜릿 케이크를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마라탕+초콜릿 케이크와 달리, <뉴욕 2140>은 사이언스 픽션+환경 사회학이 어울린다고 증명합니다.

 

 

[마라탕+초콜릿 케이크와 달리, SF+환경 사회학은 어울립니다.]



이건 환경 사회학을 논의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이 필수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기후 소설들을 읽어야 하나요?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읽어야 하나요?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필수적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조롱할 수조차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미래 오염들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미래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래는 현실이 아닙니다. 미래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보다 현실은 훨씬 중요합니다. 미래보다 현실은 훨씬 커다란 가치를 얻습니다.

 

만약 현실이 바뀐다면, 미래 역시 바뀔 겁니다. 현실이 미래를 바꾸기 때문에, 미래보다 현실은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현실보다 미래를 보여줍니다. (비단 환경 아포칼립스들만 아니라 스페이스 오페라들 역시 미래를 보여줍니다.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래를 보여주기 원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미래를 보여주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잘못된 미래를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구체적인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유명한 철학자들, 과학자들조차 구체적인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엉터리라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미래보다 현재는 중요합니다. 분명히 환경 아포칼립스는 구체적인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환경 아포칼립스가 미래를 보여주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는 환경 오염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대기권 온실 가스 농도는 500ppm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달리, 환경 아포칼립스는 온실 가스 농도가 800ppm을 넘어선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온실 가스 농도가 800ppm을 넘어서기 때문에, 대규모 이상 기후들은 인류 문명을 습격합니다. 살인적인 폭염부터 초강력 태풍까지, 아아…, 대규모 이상 기후들은 많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처절한 고통들, 끔찍한 죽음들에 빠뜨립니다.

 

현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처절한 고통들이 많은 사람들을 덮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환경 오염을 '과장'하기 때문에, 현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훨씬 무서운 경고일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훨씬 무서운 경고이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는 지구 생물권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재촉할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없이, 우리는 지구 생물권이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환경 운동을 재촉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환경 아포칼립스가 환경 오염을 '과장'한다고 해도, 비단 환경 아포칼립스만 아니라 다른 문학들 역시 '과장'을 좋아합니다.



"우와~, 호수에서 나는 집채만한 물고기를 봤어." 이 표현은 호수 물고기가 건물 크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호수 물고기가 건물 크기일 수 있나요? 현실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실에서 호수 물고기는 건물 크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물고기 크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물고기를 크다고 과장합니다. 비록 현실에서 호수 물고기가 건물 크기가 아니라고 해도, 이 표현이 과장이기 때문에, 이 표현은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호수 물고기가 건물 크기가 아니라고 해도, 비록 이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물고기를 과장하기 위해 이 표현은 그저 불가능을 동원할 뿐입니다.

 

물고기를 과장하기 위해 이 표현이 불가능을 동원하는 것처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문학은 불가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불가능들을 동원합니다. 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불가능들을 좋아합니다. 문학이 과장을 좋아하는 것처럼, 과장은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환경 아포칼립스가 환경 오염을 과장한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는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아니, 뭐야? 800ppm? 아직 현실에서 온실 가스는 500ppm을 넘어서지 않았어! 기후 소설은 황당무계해! 우리는 기후 소설을 읽어서는 안 돼!" 그건 아닙니다. 800ppm은 황당무계한 망상보다 문학적인 과장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단 문학적인 과장일 뿐만 아니라 사고 실험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미래 관점에서 우리가 현실을 파악한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우리는 살아갑니다. 현실에서 미래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래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미래 관점은 새로운 관점입니다. 만약 미래 관점에서 우리가 현실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겁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인구 증가가 긍정적인가요? 만약 인구가 늘어난다면, 이건 많은 노동력들이 늘어난다는 뜻일 겁니다. 만약 많은 여자들이 많은 아기들을 낳는다면, 인구는 늘어날 겁니다. 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에, 노동력들 역시 늘어날 겁니다. 노동력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적은 인구, 적은 노동력들보다 많은 인구, 많은 노동력들은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룩할 겁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 문장은 협력을 긍정합니다. 협력은 긍정적입니다. 만약 인구가 많고 노동력들이 많다면, 협력하기는 훨씬 쉬울 겁니다. 인구 증가는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무한한 증가는 어떤가요?

 

 

[외계 행성 개척은 많은 노동력들을 부양할지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의식주(衣食住)가 필요합니다. 특히, 의식주 중에서 먹거리(食)는 가장 중요할 겁니다. 다른 많은 생명체들처럼, 인간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육체를 유지합니다. 인간이 얼큰한 마라탕을 먹든,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를 먹든, 만약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인간에게 먹거리는 필수적입니다. 많은 인구는 많은 먹거리들을 요구할 겁니다. 만약 인구가 늘어난다면, 먹거리들 역시 늘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지구는 유한한 행성입니다. 얼마나 많은 먹거리들을 유한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나요? 만약 인류 문명이 너무 많은 먹거리들을 생산한다면, 이건 심각한 환경 오염일지 모릅니다.

 

너무 많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 문명이 너무 많은 먹거리들을 생산한다면, 유한한 지구에게 이건 심각한 환경 오염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인구 증가가 긍정적이라고 해도, 아무리 많은 노동력들이 많은 것들을 이룩한다고 해도, 너무 많은 먹거리들은 심각한 환경 오염일 겁니다. 너무 많은 먹거리들이 심각한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인구 증가는 불가능합니다. 유한한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인구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 개척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SF 범주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대표적인 것처럼, SF 범주에서 우주 개척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외계 행성이 먹거리들을 선사할 수 있다면? 만약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곡물들, 야채들, 열매들, 버섯들, 꿀들을 얻을 수 있다면? <마스 콜로니 빌더>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 비디오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은 인류 문명이 화성을 개척한다고 묘사합니다. 화성에서 개척자들은 바이오 돔을 건설하고 먹거리들을 얻습니다. 만약 바이오 돔이 자급자족을 넘어선다면, 만약 바이오 돔이 잉여 먹거리들을 생산한다면, 잉여 먹거리들은 인구 증가를 뒷받침할 겁니다. 만약 바이오 돔들이 훨씬 많은 먹거리들을 생산한다면, 훨씬 많은 먹거리들은 훨씬 많은 인구를 뒷받침할 겁니다.

 

<마스 콜로니 빌더>처럼, 만약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개척한다면, 이 개척은 훨씬 많은 인구를 뒷받침할 겁니다. 우주 개척이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들은 많은 것들을 이룩할 겁니다. 그래서 우주 개척은 긍정적입니다. 바이오 돔보다 생태계 테라포밍은 훨씬 긍정적일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단 바이오 돔만 아니라 생태계 테라포밍 역시 묘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마스 콜로니 빌더>가 생태계 테라포밍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테라포밍 마스>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 행성이 풍요로운 생물권을 자랑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풍요로운 외계 생물권이 가능하다면?



만약 외계 행성이 풍요로운 생물권을 자랑한다면, 외계 행성은 훨씬 훨씬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할 겁니다. 훨씬 훨씬 많은 먹거리들은 훨씬 훨씬 많은 노동력들을 부양할 수 있습니다. 훨씬 훨씬 많은 노동력들은 훨씬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룩할 겁니다. 오오~, 생태계 테라포밍은 아주 긍정적입니다. 비록 화성이 유한하다고 해도, 지구보다 지구+화성은 훨씬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할 겁니다. 만약 외계 소행성들이 풍요로운 생물권을 자랑한다면, 지구보다 지구+화성+소행성들은 훨씬 훨씬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할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만약 생태계 테라포밍이 아주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면?

 

과학자들은 구체적인 시간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생태계 테라포밍은 100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생태계 테라포밍은 500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태계 테라포밍은 1,000년조차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생태계 테라포밍이 300년을 요구한다면, 300년 동안, 인류 문명은 인구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계 시장 경제가 인구 한계를 인정할 수 있나요? 시장 경제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윤 축적입니다. 시장 경제는 이윤 축적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윤 축적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시장 경제는 분노할 겁니다. 이윤 축적은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시장 경제가 무한한 이윤 축적을 원하기 때문에, 시장 경제는 무한한 경제 성장을 원합니다. 시장 경제가 무한한 경제 성장을 원하기 때문에, 시장 경제는 많은 인구가 늘어나기 원합니다. (시장 경제가 많은 인구를 원하기 때문에, 시장 경제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들을 소유물이라고 지껄입니다. 시장 경제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세계 시장 경제는 인구 한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특히, 시장 경제는 많은 상품들을 판매하기 원합니다. 많은 상품들은 많은 소비자들을 요구합니다. 만약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소비자들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필연적으로 인구는 늘어나야 합니다.

 

시장 경제는 필연적으로 인구가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장 경제는 인구 한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시장 경제는 무한 경쟁입니다. 우파 지식인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시장 경제는 무한 경쟁입니다. 시장 경제가 무한 경쟁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자본가들은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원합니다. 시장 경제는 빠른 성장을 추구합니다. 시장 경제는 느린 성장, 탈성장, 역성장, 제로 성장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시장 경제가 인구 한계, 느린 성장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경제와 유한한 지구는 대립합니다. 시장 경제와 지구가 대립하기 때문에, 이 대립은 혼란을 유발할 겁니다.

 

 

[빠른 경제 성장과 지구 생물권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10월 17일 게시글(링크)이 설명했던 것처럼, 만약 매 년마다 세계 시장 경제가 3% 성장 비율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300년 이후, 지구는 불모지가 될 겁니다. 하지만 세계 시장 경제는 오직 빠른 성장만 원합니다. 환경 운동은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환경 운동은 지구 생물권을 보호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불가능할 수조차 있습니다. 만약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불가능하다면, 유한한 지구 생물권에서 인류 문명은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지구 생물권에서 인류 문명은 느린 성장, 인구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빠른 경제 성장, 빠른 인구 증가와 느린 성장, 인구 한계는 대립합니다. 두 가지가 대립하기 때문에, 세계 시장 경제는 훨씬 커다란 혼란을 유발할 겁니다. 만약 미래 첨단 기술들이 아주 적은 자원들을 아주 많은 먹거리들로 바꾼다면, 미래 시장 경제는 유한한 지구 생물권을 극복하고 성장 비율을 유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 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래 첨단 기술들이 아주 적은 자원들을 아주 많은 먹거리들로 바꾼다고 해도, 아직 이 미래 기술들은 그저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세계 시장 경제는 미래 첨단 기술들이 빠른 경제 성장을 보장한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아직 이 미래 기술들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전히 느린 성장은 커다란 가치를 얻습니다. 시장 경제(빠른 성장)와 느린 성장이 대립하기 때문에, 환경 운동은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이 보여주는 것처럼,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는 환경 사회학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표준적인 환경 사회학은 생태계 테라포밍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표준적인 환경 사회학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고 우주 탐사물이 아닙니다. 표준적인 환경 사회학보다 SF 생태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과 생태학이 만날 때, 오호~, 이 만남은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SF 생태학을 흥미롭다고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라탕과 초콜릿 케이크가 어색한 조합일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환경 사회학을 어색한 조합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소설 해석들이 다양할 수 있는 것처럼, 문화·예술은 다양한 해석들을 보장합니다. 문화·예술이 다양한 해석들을 보장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환경 사회학을 흥미롭다고 느끼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행성급 환경 오염은 우주 개척으로 이어지고, 환경 아포칼립스는 위험한 경고이고, SF 생태학은 새로운 관점입니다.



※ 게임 <Mars Colony Builder>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403850/Mars_Colony_Builder/

※ 사진 <Appetizing cake …> 출처: SHVETS production,
https://www.pexels.com/photo/appetizing-cake-with-cream-7525193/

※ 사진 <Green Forest> 출처: Stokpic,
https://www.pexels.com/photo/wood-nature-sunny-forest-6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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