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리셋>과 모래벌레, 이야기 자치성 본문
[이야기에는 자치성(自治性)이 있습니다. 모스라에서 다른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독립적인지 모릅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는 전래 동화입니다. 대부분 이런 전래 동화들이 그러는 것처럼, '은혜 갚은 두꺼비'에게는 여러 판본들과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판본들에게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마을에서 착한 소녀는 두꺼비를 돌봅니다. 두꺼비가 찾아올 때마다, 착한 소녀는 두꺼비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소녀가 잘 먹였고 잘 돌봤기 때문에, 점차 두꺼비는 커지고, 나중에 두꺼비는 황소 크기에 이릅니다. 이건 두꺼비보다 거대 양서류 괴수입니다. 어느 날, 커다랗고 못된 왕지네는 마을을 습격합니다. 못된 지네는 제물을 요구하고, 소녀를 지네 제물이 됩니다.
소녀는 지네 동굴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소녀는 닭똥 같은 눈물들을 뚝뚝 흘리고 가족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소녀는 비단 가족만 아니라 거대 두꺼비에게도 작별을 고합니다. 부엌에서 소녀는 더 이상 자신이 두꺼비를 먹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소녀는 지네 동굴을 향해 떠나고, 놀랍게도 두꺼비는 소녀와 동행합니다. 마침내 소녀와 두꺼비는 동굴에 도착합니다. 아니, 이럴수가! 동굴에서 왕지네는 스물스물 기어나옵니다. 왕지네 역시 황소 크기에 이릅니다. 못된 지네는 소녀에게 기어가나, 그 순간, 두꺼비는 독가스를 뿜습니다. 왕지네는 깜짝 놀라나, 왕지네 역시 독가스를 뿜습니다.
두 거대 괴수는 상대를 향해 독가스를 계속 뿜습니다. 당장 두꺼비는 쓰러질 것 같으나, 두꺼비는 꾹 참고 독가스를 뿜습니다. 독가스는 동굴 주변을 채우고, 소녀는 기절합니다. 얼마 후, 다시 소녀는 깹니다. 소녀는 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나, 세상에! 징그러운 거대 지네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거대 두꺼비 역시 지네 독가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엉엉 울고 두꺼비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거대 양서류 괴수, 아니, 두꺼비는 은혜를 갚았습니다. 동화 <은혜 갚은 두꺼비>는 이런 줄거리를 전개합니다. 아무리 판본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이런 줄거리는 근본적인 유사성입니다.
이 전래 동화에서 교훈이 무엇인가요? 많은 독자들은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훈을 찾습니다. 교훈을 배우기 위해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만약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면, <은혜 갚은 두꺼비>에게도 교훈이 있을 겁니다. 두꺼비는 동물이나, 소녀가 두꺼비를 돌봤기 때문에, 두꺼비는 은혜를 갚았습니다. 이건 돌봄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에서 교훈은 돌봄입니다. 인류 사회는 돌봄을 중시해야 합니다. 두꺼비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두꺼비는 자연을 상징하는지 모릅니다. 소녀가 두꺼비를 돌보기 때문에, 이건 인간이 자연 환경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소녀는 여자입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여자는 돌봄 노동을 맡습니다. 두꺼비는 야생 동물입니다. 여자는 야생을 돌봅니다. 이건 여자들이 자연 환경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에코 페미니즘에게 <은혜 갚은 두꺼비>는 고전적인 교훈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은혜 갚은 두꺼비>를 읽고 세 가지 교훈들을 배웁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교훈을 배우기보다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기기 원할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교훈을 반드시 배워야 하나요? 독자들에게 이게 의무인가요? 이야기가 교훈을 반드시 포함해야 하나요? 교훈 없이,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나요?
또 다른 독자들은 <은혜 갚은 두꺼비>가 교훈을 가르치기보다 가부장 편견을 세뇌한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부엌에서 소녀는 두꺼비에게 밥을 먹입니다. 소녀는 여자입니다. 부엌, 여자(소녀), 밥은 가부장 편견입니다. 아주 오랜 동안, 인류 문명에서 가부장 편견은 여자가 육아와 살림을 맡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자본주의 사회 역시 여자가 육아와 살림을 맡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자본주의는 최신 판본 가부장 제도입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는 여자와 육아와 살림을 연결하고, 이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에게는 교훈이 없습니다. 이 동화에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전래 동화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교훈을 배우고, 어떤 독자들은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기고, 어떤 독자들은 가부장 편견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이 옳은가요? 독자가 교훈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나요? 만약 독자가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긴다면, 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나요? 동화가 가부장 편견을 부추기나요? 어떤 소설 작가들, 문학 평론가들은 둘째 유형 독자가 옳다고 지지할지 모릅니다. 둘째 유형 독자는 이야기 그 자체를 즐깁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는 존재합니다. 이야기는 교훈이 아니고 편견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이야기가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둘째 유형 독자는 교훈을 배우지 않고 편견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둘째 유형 독자는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여러 소설 작가들, 문학 평론가들 역시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이야기는 교훈과 편견이 아니다. 우리는 교훈을 직접 배우고 편견을 직접 지적할 수 있다. 교훈을 배우고 편견을 지적하기 위해 우리가 이야기를 듣는가? 그건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로서 이야기를 바라봐야 한다." 여러 소설 작가들, 문학 평론가들은 이야기와 교훈/편견을 분리하고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모든 소설 작가와 모든 문학 평론가가 이 관점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 문학 평론가들에게 둘째 유형 독자는 뜨거운 논쟁이었습니다. 여전히 둘째 유형 독자는 뜨거운 논쟁입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이야기가 존재하나요? 이야기가 거울인가요? 이야기가 뭔가를 반영하나요? 아니면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에게 자치성(自治性)이 있나요? 만약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있다면,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겁니다. 반면, 만약 이야기가 뭔가를 반영한다면, 이야기는 뭔가에 기반할 겁니다. 어떻게 독자가 전래 동화를 해석할 수 있나요? 독자가 전래 동화에게 자치성, 독립성이 있다고 간주해야 하나요?
아니면 전래 동화가 무엇을 반영하는지 독자가 찾아야 하나요? 만약 독자가 전래 동화를 거울이라고 간주한다면, 거울이 뭔가를 비추는 것처럼, 이야기가 뭔가를 비추기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보다 다른 뭔가를 훨씬 중시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는 뭔가에 의존합니다. 이야기는 의존적입니다. 독립적인 것과 의존적인 것은 다릅니다. 양쪽은 대립합니다. 만약 어떤 평론가가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고, 또 다른 평론가가 이야기가 뭔가에 기반한다고 간주한다면, 두 평론가는 대립할 겁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가들에게 이건 뜨거운 논쟁이 됩니다.
분명히 이야기에는 자치성이 있습니다. 독자는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은혜 갚은 두꺼비>를 읽는 동안, 독자는 두 거대 괴수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비록 독자가 교훈을 찾지 않고 편견을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없다면,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한때 아이유 노래 <제제>는 커다란 논란이 되었습니다. 아이유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아이유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 자체로서 노래 가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제제>는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제>가 소아성애를 반영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만약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있다면, 노래 가사에게도 자치성이 있을 테고, 그 자체로서 노래 가사 속의 세계는 존재할 겁니다. 노래 <제제> 속의 세계에서 소아성애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소아성애)에서 이야기는 독립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아성애를 <제제>에 집어넣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소아성애를 <제제>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제제>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솔직히 <제제>는 소아성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제>는 설명문이 아닙니다.
[노래 가사는 설명문이 아닙니다. 노래 가사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되고 자치성을 얻습니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에서 제일 어린 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어떤 사람들은 이 가사가 야릇하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가사는 소아성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골백번 듣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소아성애라는 단어를 찾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제제>를 골백번 듣는다고 해도, <제제>는 아이가 성적 대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제제> 속의 세계에서 소아성애라는 개념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작가들은 곤경에 빠질 겁니다.
특히, SF 작가들은 너무 커다란 곤경에 빠질 겁니다. 정세랑 작가는 중편 소설 <리셋>을 썼습니다. <리셋>은 SF 소설,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리셋>에서 거대 지렁이들은 산업 폐기물들을 먹어치우고 산업 자본주의 도시들을 무너뜨립니다. 거대 지렁이들은 엄청난 분변토들을 배설합니다. 거대 지렁이들이 환경 오염들을 '리셋'하기 때문에, 지구 환경은 정화되고, 생물 다양성은 번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거대 지렁이들은 산업 폐기물들을 먹어치우지 않고, 엄청난 분변토들을 배설하지 않고, 지구 환경을 정화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거대 지렁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허구'입니다.
거대 지렁이들은 허구이나,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리셋>에서 그 자체로서 허구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거대 지렁이들? 이게 무슨 김말이 옆구리 터지는 헛소리야! 나는 생태학자야. 하지만 나는 200m짜리 거대 지렁이를 관찰한 적이 없어. 나는 200m짜리 지렁이가 산업 폐기물을 정화한다고 연구하지 못해. 거대 지렁이는 헛소리야! 정세랑 작가는 엉터리 사기꾼이야!" 이렇게 생태학자는 정세랑 작가와 <리셋>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리셋>에게는 자치성이 있고 독립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거대 지렁이들은 존재하지 않으나, 현실에서 <리셋> 속의 세계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현실 없이, 그 자체로서 소설 속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태학자는 <리셋>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없다면, 그 자체로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면, 생태학자는 정세랑 작가를 비난할 테고, 정세랑 작가는 <리셋>을 쓰지 못할 겁니다.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다른 작가들 역시 SF 소설들을 쓰지 못할 겁니다. 현실에서 거대 지렁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 지렁이는 비(非)현실입니다. 거대 지렁이가 비현실인 것처럼, 많은 SF 설정들은 비현실입니다. 근력 강화복은 비현실입니다.
보행 장갑차는 비현실입니다. 변신 전투기는 비현실입니다. 인간 형태 로봇은 비현실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비현실입니다. 장거리 유인 우주선은 비현실입니다. 초공간 도약과 시간 여행 장치와 차원 이동 실험은 비현실입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어마어마한 뭔가를 떠벌인다고 해도, 아무리 SF 소설이 어마어마한 평행 우주와 어마어마한 다이슨 스피어를 장황하게 떠벌인다고 해도, 평행 우주와 다이슨 스피어는 비현실입니다. 이것들은 그저 비현실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세랑을 비롯해 SF 작가들은 엉터리 사기꾼들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SF 소설 속에서 허구적인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소설 속의 세계가 자치적이기 때문에, 현실은 자치적인 세계에 간섭하지 못합니다. 비록 현실에서 200m짜리 지렁이가 핵 폐기물을 먹어치우지 않는다고 해도, 정세랑 작가는 환경 아포칼립스와 거대 괴수를 쓸 수 있습니다. 200m짜리 지렁이가 거대 괴수인 것처럼, 모스라는 거대 괴수입니다. 거대 지렁이가 자연 환경을 정화하는 것처럼, 모스라는 자연 환경을 정화합니다. <리셋>은 '여성스러운' 향기를 내뿜고, 엄마 괴수로서 모스라는 원주민 여자와 교감합니다. <리셋>과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정세랑 작가가 <모스라>를 참고했나요? <리셋>과 <모스라>가 비슷하기 때문에, 정세랑 작가가 <모스라>를 참고했다고 독자가 해석할 수 있나요? 자연 친화적인 거대 괴수 선배로서 <모스라>가 <리셋>에게 영향을 미쳤나요? SF 독자들은 정세랑 작가가 <모스라>를 참고했거나 <모스라>가 <리셋>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모스라>와 <리셋>은 독립적입니다. <리셋> 속의 세계에서 엄마 괴수 모스라는 열대 밀림 여자와 소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200m짜리 지렁이를 읽고 모스라를 연상할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200m짜리 지렁이를 읽고 모스라를 필연적으로 연상할 겁니다. 선구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거대 괴수로서 모스라는 200m짜리 지렁이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선구적인 엄마 괴수 모스라가 200m짜리 지렁이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가 논리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모스라 없이, 그 자체로서 200m짜리 지렁이는 핵 폐기물을 먹어치울 수 있습니다. 200m짜리 거대 지렁이에게 자치성이 있는 것처럼, 근력 강화복과 보행 장갑차와 변신 전투기와 인간 형태 로봇에게는 자치성이 있습니다.
상급 인공 지능과 장거리 유인 우주선과 초공간 도약과 시간 여행 장치와 차원 이동 실험과 평행 우주와 다이슨 스피어에게는 자치성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정세랑 작가는 소설을 쓰나, 모스라 없이, 200m짜리 지렁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많은 SF 설정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생태학자는 정세랑 작가가 엉터리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지 못합니다. 생태학자는 다른 많은 SF 작가들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과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과 외계 행성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얼마든지 창작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들은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다고 증명합니다.
그래서 이게 논란을 잠재울 수 있나요? "와, 맞아! 이야기 속의 세계에는 자치성이 있어. 그 자체로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현실에서 거대 지렁이가 핵 폐기물을 먹어치우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속의 세계에서 거대 지렁이는 존재해. Q.E.D. 증명 종료~!!" 이렇게 문학 평론가들이 증명을 종료하고 논란을 종료해야 하나요?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에게 자치성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 문학 평론가들은 그 자체로서 셜록 홈즈가 존재할 수 있는지 실험합니다. 문학 평론가들에게 셜록 홈즈는 인기 만점 실험 대상입니다. 존 왓슨은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성적 대상이라고 노래 <제제>가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많은 소설들 속에서 존 왓슨은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제>가 설명문이 아닌 것처럼, 단편 소설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은 설명문이 아닙니다. <제제> 속의 세계에서 소아성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 속의 세계에서 셜록 홈즈에게는 방광이 없는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인간에게는 방광이 있으나,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고, 현실이 이야기 속의 세계에 간섭하지 못하기 때문에, 셜록 홈즈에게는 방광이 없는지 모릅니다. 소설 독자는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소설 독자가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한다면, 다른 많은 셜록 홈즈 팬들은 반박할 겁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이것을 주장한다면, 문학계에서 이 평론가는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분명히 이야기 속의 세계에는 자치성이 있고, <제제>가 나이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셜록 홈즈에게는 방광이 없는지 모릅니다. 왜 많은 셜록 홈즈 팬들이 이 해석에 반박하나요? 왜 문학 평론가가 웃음거리가 되나요? 비단 셜록 홈즈만 아니라 다른 많은 SF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 새틀러에게 방광이 있나요? 영화 <쥬라기 공원>은 엘리 새틀러에게 방광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오, 그렇습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은 엘리 새틀러가 쉬아한다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엘리 새틀러에게는 방광이 없을 겁니다. 현실에서 인간에게는 방광이 있으나, 그 자체로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 <쥬라기 공원> 속의 세계에서 엘리 새틀러에게는 방광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쥬라기 공원>은 바이오펑크 영화입니다. <쥬라기 공원> 속의 자치적인 세계에서 과학 기술은 트리케라톱스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학 기술이 트리케라톱스를 복제할 수 있다면, 왜 과학 기술이 인간 방광을 제거하지 못하나요? 엘리 새틀러는 생체 개조 수술을 거쳤고 방광을 제거했을 겁니다. 이건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만약 영화 관객이 <쥬라기 공원>을 관람하고 엘리 새틀러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한다면, 다른 많은 영화 관객들은 반박할 겁니다. 만약 영화 평론가가 엘리 새틀러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한다면, 다른 많은 평론가들에게 이 평론가는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분명히 이야기 속의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인간에게는 방광이 있으나,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고, 현실이 자치적인 세계에 간섭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 속의 세계에서 엘리 새틀러는 쉬아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건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영화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이 논리적인 해석에 반박할 겁니다.
[이 그림은 엘프 검사와 야생의 마법사와 화석 발굴 현장을 함께 보여줍니다. 해석은 골치가 아파집니다.]
위 그림을 보세요. 위 그림은 두 엘프 지정 사수, 세 엘프 검사들, 야생의 마법사(Wild Magus)를 보여줍니다. 엘프 지정 사수와 엘프 검사와 야생의 마법사는 중세 유럽 판타지 설정입니다. 위 그림은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위 그림은 오직 중세 유럽 판타지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위 그림은 화석 발굴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현실에서 공룡들이 멸종한 것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공룡들이 멸종했나요?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이 진화 역사를 거치는 것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생물 다양성이 진화 역사를 거치나요? 고식물학자 엘리 새틀러는 진화 이론을 연구합니다.
'야생'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의 마법사는 야생에 친숙할 겁니다. 어쩌면 야생의 마법사는 자연 환경을 연구하는지 모릅니다. 엘리 새틀러가 자연 환경을 연구하는 것처럼, 야생의 마법사는 자연 환경을 연구하는지 모릅니다. 엘리 새틀러는 진화 이론을 연구합니다. 야생의 마법사가 진화 이론을 연구하나요? 위 그림에서 야생의 마법사는 싱그러운 녹색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의 마법사는 자연 친화적일 겁니다. 그래서 야생의 마법사가 생물 다양성을 연구하나요? 야생의 마법사가 어떻게 중생대 공룡들이 멸종했고 홀로세 동물들이 진화했는지 연구하나요?
아니,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홀로세'가 존재하나요? 엘리 새틀러는 지질학적인 연대들을 구분하나, 야생의 마법사가 지질학적인 연대들을 구분할 수 있나요? 만약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공룡들이 멸종했다면, 왜 공룡들이 멸종했나요? 거대한 운석이 행성 지면과 충돌했고, 엄청난 먼지 구름들이 항성을 가렸고, 식물들이 광합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대 생태계가 멸종했나요? 아니면 사악한 리치 마법사가 생명 현상을 증오했기 때문에, 리치 마법사가 중생대 생태계를 없앴나요? 진화 이론은 과학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진화 이론은 발달했습니다. 엘리 새틀러는 근대화를 인식합니다.
야생의 마법사가 근대화를 인식하나요? 근대화 없이, 진화 이론이 발달할 수 있나요? 19세기 서구 과학자들은 식민지 자연 환경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근대화에서 진화 이론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절대 평화롭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끔찍한 식민지 수탈과 진화 이론은 함께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나요? 많은 지식인들은 다양한 대답들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본격적인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끔찍한 식민지 수탈들과 함께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지 않았다면, 2차 세계 대전 역시 터지지 않았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학살자, 전쟁 범죄자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식민지 학살자, 전쟁 범죄자입니다. 서구 근대화 속에서 이런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 이론은 존재합니다. 야생의 마법사는 어떤가요? 야생의 마법사가 서구 제국주의를 인식하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엘리 새틀러 같은 고식물학자가 존재하나요? 야생의 마법사가 고식물학자인가요?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은 비디오 게임 <킹덤 러시 프론티어> 스크린샷입니다. 스크린샷은 거대한 모래벌레를 보여줍니다. 지하에서 모래벌레는 불쑥 솟아오르고 유닛들을 집어삼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유닛들을 조종하고 모래벌레 아가리를 피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도전 과제 무앗딥(Mua'Dib)을 달성할 겁니다. 사막, 거대한 모래벌레, 무앗딥…. 이것들은 소설 <듄>입니다. 스크린샷 속의 거대한 모래벌레는 샤이-훌루드일 겁니다. 샤이-훌루드는 테라포밍 생명체입니다. 샤이-훌루드는 주변 환경을 사막으로 바꿉니다. 샤이-훌루드들은 아라키스 행성을 사막 행성으로 테라포밍합니다.
생태학자들은 비버가 댐을 건설하고, 수위를 조절하고, 주변 환경을 대대적으로 바꾼다고 설명합니다. 비버는 대표적인 테라포밍 생명체입니다. 비버보다 샤이-훌루드는 훨씬 대대적인 테라포밍 생명체입니다. 샤이-훌루드는 행성 환경 전체를 바꿉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건 테라포밍이 아닐 겁니다. 샤이-훌루드에게 사막은 아늑한 환경이나, 인간에게 사막은 아늑한 환경이 아닙니다. 인간은 녹색 자연을 좋아합니다. 인간에게 테라포밍은 싱그러운 녹색 행성입니다. 그래서 프레멘 원주민들은 이슬 수집 장치들을 퍼뜨리고 삼림 행성을 조성하기 원합니다. 이슬 수집 장치들은 충분한 수분을 모을 겁니다.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나, 이미 제국 행성학자 리예트 카인즈는 아라키스에 충분한 수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프레멘 원주민들이 수분을 모을 수 있다면, 그들은 녹색 삼림 행성을 조성할 겁니다. 이렇게 테라포밍과 생태학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테라포밍이라는 개념은 생태학을 포함합니다. <듄>은 비단 테라포밍 문학일 뿐만 아니라 생태 문학입니다. 문제는 <킹덤 러시 프론티어>입니다. <킹덤 러시 프론티어> 속의 세계에서 샤이-훌루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샤이-훌루드는 주변 환경을 사막으로 바꿀 겁니다. 사막은 계속 넓어지고, 행성 전체는 사막이 될 겁니다. 이건 '건조한' 테라포밍입니다.
하지만 <킹덤 러시> 시리즈 속의 세계에는 우드 엘프들이 있습니다. 화석 발굴 현장을 보여주는 그림 역시 <킹덤 러시 오리진> 스크린샷입니다. <킹덤 러시 오리진> 스크린샷에서 야생의 마법사는 녹색 기운을 뿜습니다. 야생의 마법사는 사막보다 삼림을 좋아할 겁니다. 만약 샤이-훌루드가 '건조한' 테라포밍을 시도하고, 사막이 넓어진다면, 야생의 마법사는 이것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우드 엘프들 역시 이것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샤이-훌루드와 우드 엘프들은 충돌합니다. 건조한 테라포밍과 야생의 마법사는 대립합니다. 그래서 야생의 마법사가 샤이-훌루드와 건조한 테라포밍을 싫어하나요?
샤이-훌루드가 건조한 테라포밍을 시도하기 때문에, 프레멘 원주민들은 충분한 수분을 모으고 사막화에 저항합니다. 만약 야생의 마법사가 건조한 테라포밍을 싫어한다면, 야생의 마법사는 충분한 수분을 모으고 사막화에 저항해야 합니다. 충분한 수분을 모으기 위해 야생의 마법사는 생태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리예트 카인즈처럼, 엘리 새틀러는 생태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행성학자 리예트 카인즈가 생태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고식물학자 엘리 새틀러는 생태학을 연구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해양 생태학자 타크베르는 생태학을 연구합니다. 당연히 해양 생태학자에게 연구 분야는 생태학입니다.
리예트 카인즈가 행성 수분 분포도를 그리는 것처럼, 엘리 새틀러와 타크베르는 근대 생태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리예트 카인즈, 엘리 새틀러, 타크베르가 서구 근대화를 거쳤기 때문에, 그들은 생태학이 무엇인지 인식합니다. 반면, 야생의 마법사는? 아무리 야생의 마법사가 '야생'에 친숙하다고 해도, 아무리 야생의 마법사가 녹색 기운을 뿜는다고 해도, 야생의 마법사가 생태학을 인식하나요? 타크베르가 서구 근대화를 거쳤기 때문에, 타크베르는 생태학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서구 근대화와 자본주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타크베르는 자본주의를 경계합니다. 야생의 마법사가 자본주의를 경계하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존재하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는 중세를 가공합니다. 중세는 근대가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중세 유럽이 자본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로버트 브래너와 린 화이트는 대조적이나, 양쪽 모두 중세 유럽이 자본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블로트는 여기에 반박하고 식민지 수탈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제임스 블로트는 로버트 브래너와 린 화이트가 유럽 중심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합니다. 유럽 중심주의는 너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핵심이라고 착각합니다.
제임스 블로트는 이런 지배적인 관념을 산산조각 깨뜨립니다. 마리아 미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자본주의를 스스로 만들었다고 착각하나, 그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여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유럽 중심주의는 오직 백인, 남자, 서구만 중시하고 제3세계와 여자들을 배제합니다. 심지어 페미니즘조차 유럽 중심주의에 빠지고 오직 백인, 남자, 서구만 중시합니다. 수많은 자칭 페미니스트들을 보세요. 얼마나 열심히 그들이 유럽 중심주의를 떠받드나요? 마르크스주의자 로버트 브래너가 유럽 중심주의에 빠지는 것처럼,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유럽 중심주의를 떠받듭니다.
유럽 중심주의가 너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심지어 지배적인 관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조차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훨씬 지독합니다.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임스 블로트와 마리아 미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제3세계들과 여자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하지만 수구 꼴통들은 서구 산업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고 해도, 수구 꼴통들은 서구 산업 자본주의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랑스러운 반공 국가 헬조선은 수구 꼴통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헬조선에서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우상입니다.
[종종 <듄>은 SF 장르보다 판타지 장르에 속하나, 행성학자 리예트 카인즈는 근대화를 인식합니다.]
유럽 중심주의에서 헬조선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리아 미스와 제임스 블로트가 옳다면, 중세 유럽은 자본주의를 스스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만약 마리아 미스와 제임스 블로트가 옳다면,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못하거나 다르게 나타납니다. 중세 유럽이 자본주의를 스스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도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못하거나 다르게 나타날 겁니다. 만약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타나지 못한다면, 서구 근대화 역시 나타나지 못할 테고, 근대 생태학 역시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서구 근대화 없이, 근대 생태학이 나타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어쩌면 <킹덤 러시> 시리즈에서 이건 가능한지 모릅니다. <킹덤 러시>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중세 유럽 판타지)는 존재하고, 또 다른 세계에서 서구 근대화 없이 근대 생태학은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야생의 마법사는 '근대' 생태학을 연구하고 건조한 테라포밍을 막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킹덤 러시> 시리즈에서 샤이-훌루드가 건조한 테라포밍을 정말 시도하나요? 이 거대 괴수가 정말 샤이-훌루드인가요? <킹덤 러시 프론티어>는 거대한 모래벌레가 샤이-훌루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듄>과 <빼앗긴 자들>과 <킹덤 러시 프론티어>를 비교하고 샤이-훌루드, 건조한 테라포밍, 근대 생태학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야기는 독립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킹덤 러시 프론티어>는 독립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킹덤 러시 프론티어>가 독립하고, <킹덤 러시 프론티어>가 거대한 모래벌레가 샤이-훌루드라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모래벌레는 샤이-훌루드가 아닌지 모릅니다. 거대한 모래벌레가 샤이-훌루드가 아니기 때문에, 모래벌레는 건조한 테라포밍을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도전 과제 무앗딥이 그저 이스터 에그, 스테이지 기믹에 불과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아니,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도전 과제 무앗딥이 그저 이스터 에그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오직 현실에서만 게임 플레이어들은 도전 과제가 이스터 에그라고 해석합니다. 현실에서 <킹덤 러시 프론티어>는 독립할 수 있고, 도전 과제 무앗딥은 이스터 에그보다 중세 판타지 설정이 될 수 있습니다. 도전 과제 무앗딥은 소설 등장인물 폴 무앗딥보다 다른 뭔가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거대한 모래벌레는 건조한 테라포밍을 시도하지 않을 테고, 야생의 마법사는 모래벌레를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도전 과제 무앗딥이 이스터 에그, 스테이지 기믹보다 중세 판타지 설정이라고 해석한다면, 다른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 플레이어를 비웃을 겁니다. 소설 독자가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하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은 이 독자를 비웃습니다. 영화 관객이 엘리 새틀러에게 방광이 없다고 해석하기 때문에, 다른 관객들은 이 관객을 비웃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도전 과제 무앗딥이 이스터 에그보다 중세 판타지 설정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다른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 플레이어를 비웃습니다. 만약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다면, 왜 그들이 자치성을 비웃나요?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게시글이 고작 이스터 에그, 스테이지 기믹, 개그 요소 따위를 너무 열심히 분석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다면, 거대한 모래벌레는 이스터 에그보다 중세 판타지 설정인지 모릅니다. 아니, 잠깐. 거대한 모래벌레가 중세 판타지 설정인가요? '중세 유럽 판타지'라는 용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나요? 게임 플레이어는 <킹덤 러시 프론티어>가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중세 유럽 판타지라는 용어가 존재하나요? 만약 그 자체로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서 중세 유럽 판타지라는 용어가 존재할 수 있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야생의 마법사는 자신이 중세 유럽 판타지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야생의 마법사는 중세와 유럽과 판타지를 알지 못할 겁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킹덤 러시 오리진>을 바라보기 때문에, <킹덤 러시 오리진>은 중세, 유럽, 판타지가 됩니다. 독자에게 <작은 아씨들>은 소설이나, 조 마치에게 <작은 아씨들> 속의 세계는 현실입니다. 게임 플레이어에게 <킹덤 러시> 시리즈는 중세 유럽 판타지이나, 야생의 마법사에게 <킹덤 러시> 시리즈 속의 세계는 현실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한 모래벌레를 중세 유럽 판타지 설정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거대한 모래벌레는 현실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자치성을 존중하고 거대한 모래벌레를 중세 판타지 설정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모래벌레를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모래벌레를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두 현실이 겹치나요?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나요? 만약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가요? 양쪽 모두 진정한 현실인가요? 만약 <킹덤 러시>가 현실이라면, 게임 플레이어가 현실(킹덤 러시)에 들어갈 수 있나요? 이런 논의는 너무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가들에게 자치성은 뜨거운 논란입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나요? 아니면 이야기 속의 세계가 뭔가에 기반하나요? 독자가 <은혜 갚은 두꺼비>를 읽고 교훈을 찾아야 하나요? 현실 속의 논란에서 <제제>가 독립할 수 있나요? <모스라> 없이, <리셋>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나요? 셜록 홈즈에게 방광이 있나요? 엘리 새틀러와 타크베르는 어떤가요? 소설 <듄>이 비디오 게임 도전 과제 무앗딥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요?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문학 해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문학 해석들이 다양해지는 것처럼,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는 자치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야기 속의 세계는 뭔가에 기반합니다. 양쪽 모두 옳습니다.
게임 제작자 아이언하이드는 비단 <킹덤 러시>만 아니라 <아이언 마린>을 만들었습니다. 징그러운 침략자들은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를 퍼붓고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강화복 병사들은 징그러운 침략자들을 물리칩니다. 첨단 외계인들은 인류 병사들을 지원합니다. 인류 병사들과 첨단 외계인들은 동맹을 맺고 징그러운 침략자들에게 저항합니다. <아이언 마린>에서 미래 병사들, 징그러운 침략자들,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 첨단 외계인들, 인류 문명과 외계 문명의 동맹은 아주 커다란 특성입니다. 이런 특성들은 비디오 게임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와 비슷합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에서 징그러운 제노모프들은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를 퍼붓습니다.
인류 병사들은 징그러운 제노모프들을 물리칩니다. 사이보그 린 쿠로사와, 더치 쉐퍼는 프레데터 전사/사냥꾼과 동맹을 맺고 징그러운 제노모프들에게 저항합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에서 미래 병사들, 징그럽고 어마어마한 제노모프들, 인류 진영(린과 더치)과 첨단 프레데터 진영(전사와 사냥꾼)의 동맹은 아주 커다란 특성입니다. <AvP>가 <아이언 마린>에게 영향을 미쳤나요? 하지만 <아이언 마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AvP> 없이, <아이언 마린> 속의 세계는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모스라>와 <리셋>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스라> 없이, <리셋> 속의 세계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쪽 해석은 옳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양쪽 해석이 옳다고 해도, 양쪽 해석이 대립하기 때문에, 양쪽 해석은 상대가 틀리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기 때문에, 소설 독자는 <모스라> 없이 <리셋>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테고, 이야기 속의 세계가 뭔가에 기반하기 때문에, 영화 관객은 <모스라>가 <리셋>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두 해석은 합의하지 못합니다. 만약 두 해석이 합의하기 원한다면, 훨씬 폭넓은 관점에서 두 해석은 <모스라>와 <리셋>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모스라>와 <리셋>이 비슷한가요? <모스라>와 <리셋>에서 거대 괴수는 자본주의 도시를 파괴하고, 산업 폐기물을 정화하고, 자연 환경을 돌봅니다.
<모스라>와 <리셋>에서 거대 (절지류) 괴수, 산업 폐기물, 자본주의, 환경 아포칼립스는 근본적인 유사성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중세 문학 작가들이 거대 괴수가 산업 폐기물을 정화하고 자본주의 아포칼립스에 반대한다고 상상할 수 있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고대 성직자가 크라켄을 상상한 것처럼, 중세 문학 작가들은 거대 괴수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SF 장르에서 거대 괴수는 드문 소재가 아니나, 거대 괴수는 SF 장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거대 괴수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거대 괴수가 산업 폐기물을 정화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중세 문학 작가들은 거대 괴수를 상상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거대 괴수가 산업 자본주의 도시를 습격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그 자체로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존재하고, 아무리 이야기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고, 아무리 현실에서 이야기 속의 세계가 독립적이라고 해도, 분명히 중세 문학 작가들은 거대 괴수가 핵 폐기물을 정화하고 산업 자본주의 도시를 습격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서구 근대화 이후, 핵 폐기물과 자본주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고, 중세 문학 작가들은 핵 폐기물과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21세기 초반과 달리, 중세 문학 작가들은 어머니 지구가 핵 폐기물을 비판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중세가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모스라>와 <리셋>에게 자치성이 있다고 해도, 중세 문학 작가들은 거대 괴수, 핵 폐기물, 자본주의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이 <모스라>와 <리셋>을 다양하게 해석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은 여기에 합의해야 합니다.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세랑 작가 역시 이것을 절대 부정하지 못합니다. <모스라>는 <리셋>에게 영향을 미쳤거나 미치지 않았는지 모르나, 만약 서구 근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스라>는 나타나지 못했을 테고, <리셋> 역시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폭넓은 관점에서 <모스라>와 <리셋>보다 서구 근대화는 우선합니다. 아무리 <모스라>와 <리셋>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이 있다고 해도, <모스라>와 <리셋>에게 서구 근대화는 가장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서구 근대화가 제3세계 여자들을 수탈하기 때문에, <모스라>에서 백인 남자보다 원주민 여자는 피해자가 됩니다. <리셋>에게 <모스라>보다 서구 근대화는 훨씬 중요한 생산 조건이고, <모스라>에게도 서구 근대화는 근본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모스라>가 <리셋>에게 영향을 미쳤든 아니든,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기 때문에, <모스라>와 <리셋>은 거대 괴수와 산업 폐기물과 자본주의를 연결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산 조건을 파악할 때, 사람들은 합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해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다양한 해석들과 달리, 현실은 유일합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와 <제제>와 <킹덤 러시 오리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갚은 두꺼비>와 <제제>와 <킹덤 러시 오리진>보다 생산 조건들은 우선합니다. 생산 조건으로서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기 때문에, <모스라>와 <리셋>은 나타났습니다.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과 정세랑 작가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과 정세랑 작가는 서구 근대화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세랑 작가가 이것을 인정할 수 있나요?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이 서구 근대화를 인정할 수 있나요?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가요? 누가 대답할 수 있나요? 정세랑 작가? 소설 독자들? 영화 관객들? 우리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마리아 미스와 제임스 블로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유럽 중심주의는 너무, 너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유럽 중심주의 속에서 우리가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수많은 어버이들은 수구 꼴통들입니다. 수구 꼴통들은 유럽 중심주의, 서구 자본주의를 신주 단지처럼 떠받듭니다. 하지만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미래 세대는 대대적인 행성급 환경 오염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미래 세대는 21세기 초반 세대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소설 <핵 전쟁 뒤 최후의 아이들>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핵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미래 세대 역시 21세기 초반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당신들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했어! 당신들은 서구 자본주의를 떠받들었어!" 수구 꼴통 어버이들이 유럽 중심주의를 떠받들기 때문에, 수구 꼴통 어버이들이 서구 자본주의가 좋다고 난리법석이기 때문에, 미래 세대는 행성급 환경 오염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산업 자본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구 꼴통 어버이들은 산업 자본주의가 좋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럽 중심주의에 빠지고 산업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최근에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하다고 떠드나, 제3세계 여자들은 코로나 19 사태보다 지구 온난화와 식량 위기를 훨씬 걱정할 겁니다. 아니, 마리아 미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제3세계 여자들에게 지구 온난화는 심각한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어버이날에 자랑스러운 어버이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아니, 훌륭하고 훌륭한 반공 국가 헬조선에서 자랑스러운 수많은 어버이들은 서구 산업 자본주의를 열심히 떠받드는 중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3세계 여자들이 작살이 나는 것처럼, 미래 세대는 작살이 날지 모르나, 훌륭한 반공 국가 헬조선에서 자랑스러운 수많은 어버이들은 서구 산업 자본주의를 열심히 떠받드는 중입니다. 아무리 지구 환경이 작살이 난다고 해도, 아무리 어머니 지구가 환경 오염을 비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지구 생물권보다 유럽 중심주의를 맹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