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드루이드와 산송장 퇴치, 우주 함장 성별 본문
만약 남한 표준어가 언데드를 번역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뱀파이어, 흡혈귀는 언데드입니다. 드라큐라는 언데드입니다. (아브라함 반 헬싱이 노스페라투를 언급하는 것처럼, 브람 스토커는 '언데드'라는 소설 제목을 붙이기 원했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드라큐라를 논의할 때, 남한 사람들은 언데드를 불사귀(不死鬼)라고 부릅니다. 언데드는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시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언데드입니다. 불사귀 역시 부정한 것이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언데드와 불사귀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한자어보다 순우리말은 나을지 모릅니다.
순우리말들 중에서 '산송장'은 언데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언데드는 시체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산송장 역시 시체(송장)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시체(송장)가 살아있기 때문에, 시체는 움직입니다. 언데드와 산송장은 비슷합니다. 한반도 전설들, 민담들은 뱀파이어, 흡혈귀를 이야기하지 않으나, 순우리말 산송장은 언데드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화와 한반도 문화는 다르나, 어떻게 이 번역이 가능한가요? 이건 서구 문화와 한반도 문화가 언데드, 산송장을 부정적으로 느낀다는 뜻입니다. 왜 서구 문화와 한반도 문화가 이것을 부정적으로 느끼나요?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시대와 지역과 상관없이,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극지 이누이트 할머니부터 열대 아마존 소녀까지, 아라비아 사막 여자부터 동아시아 해안 남자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부터 21세기 초반 에티오피아 사람까지, 예외 없이,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납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이 과정을 거칩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이 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이건 자연의 섭리, 서클 오브 라이프입니다. 나~주 평야~ 발바리~
많은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 대지 모신은 비단 탄생만 아니라 죽음을 함께 관장합니다. 대지 모신은 그저 자애로운 여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대지 모신이 죽음을 관장하기 때문에, 대지 모신은 얼마든지 호전적일 수 있습니다. 대지 모신이 생명체들을 낳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은 대지 모신을 왜곡하고 여자와 육아를 억지로 연결할지 모르나, 대지 모신이 비단 탄생만 아니라 죽음을 함께 관장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은 엉터리입니다. 만약 대지 모신이 오직 탄생만 관장한다면, 자연의 섭리, 살아있는 상호 작용은 순환하지 않을 겁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이 자연의 섭리는 거치는 것처럼, 탄생과 죽음은 자연적입니다. 인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지구 생물권에서 인류가 비롯했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에서 인류 역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류는 자연의 섭리를 거칩니다. 하지만 언데드는 이것을 거스릅니다.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납니다. 언데드는 이 과정을 거스릅니다. 언데드는 죽지 않습니다. 언데드가 죽지 않기 때문에, 시체(송장)는 살아있고 움직입니다. 많은 생명체들이 자연의 섭리를 거치고, 인류 역시 자연의 섭리에 속하나, 산송장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릅니다.
모든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필연적으로 속하기 때문에, 인류 문화에서 언데드, 산송장은 보편적인 부정(不正)인지 모릅니다.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가 설명하는 것처럼, 인류가 자연의 섭리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문화들에서 대지 모신들은 보편적입니다. 인류 문화에서 대지 모신이 보편적이고, 산송장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대지 모신과 산송장은 대립합니다. 대지 모신이 보편적이고, 대지 모신과 산송장이 대립하기 때문에, 산송장은 보편적인 부정인지 모릅니다. 언데드가 보편적인 부정이기 때문에, 남한 언어는 언데드를 산송장으로 번역합니다.
비록 한반도 전설들이 뱀파이어, 흡혈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데드가 보편적인 부정이기 때문에, 남한 문화에는 언데드 개념(산송장)이 있고, 남한 언어는 언데드를 산송장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남한 사람이 이 번역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남한 사람들은 이 번역이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남한 문화에서 산송장이 언데드를 가리키기보다 무기력한 사람을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산송장이 어색한 번역이라고 해도, 인류는 자연의 섭리에 속하고, 언데드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릅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비록 산송장이 언데드 개념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남한 사람은 언데드가 자연 생태계를 거스른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언데드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대지 모신과 언데드는 대립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는 대지 모신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성직자이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자연 영성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대지 모신을 숭배합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영성과 대지 모신을 숭배하고, 언데드(산송장)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대지 모신과 대립하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언데드를 싫어합니다.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드루이드가 언데드를 싫어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여러 중세 판타지들 역시 드루이드들이 언데드들을 싫어한다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대지 모신과 언데드가 대립하기 때문에, 성직자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드루이드에게는 언데드를 퇴치하기 위한 (자연) 신성 능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드루이드는 특정한 약초들을 채집하고, 끓이고, 추출하고, 약물들을 조제할 수 있습니다. 이 약물들은 언데드 전용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수가 언데드를 퇴치하는 것처럼, 이 약물들은 뱀파이어를 퇴치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디앤디>를 비롯해 여러 중세 판타지들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를 퇴치하기 위한 신성 능력이 있다고 설정하지 않습니다. 여러 중세 판타지들은 드루이드가 약물을 조제하고 언데드를 물리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직자에게는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으나, 드루이드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데드 퇴치 능력은 드루이드 전형보다 성직자 전형(성기사 전형)입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중세 판타지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를 퇴치하기 위한 신성 능력이 있다고 설정한다면, 이 설정은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대지 모신과 언데드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반 헬싱이 마늘들을 주렁주렁 걸고 노스페라투를 막는 것처럼, 만약 중세 판타지에서 드루이드가 약초를 추출하고, 약물을 조제하고, 언데드를 물리친다면, 이건 어색한 설정이 아닐 겁니다. 중세 판타지 세계 설정은 드루이드가 약물을 조제하고 언데드를 물리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 약물은 좀비와 구울과 유령과 미라와 뱀파이어를 물리칩니다. 아니면 (성직자가 성물을 들고 신성한 광휘를 뿜는 것처럼) 드루이드는 대지 모신을 외치고, 자연 성물을 번쩍 들고, 싱그럽고 풍요로운 기운을 풍기고, 언데드 퇴치 능력을 발휘할지 모릅니다.
언데드 전용 물약, 자연 성물(nature divine focus), 싱그럽고 풍요로운 기운, 언데드 퇴치 능력은 드루이드 전형이 아닙니다. 던전 탐험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보드 게임들은 드루이드에게 이 능력이 있다고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드루이드 전형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판타지 소설이 이것들을 설정한다면, 만약 어떤 던전 탐험 보드 게임이 이것들을 묘사한다면, 이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드루이드가 자연을 숭배하고, 대지 모신과 언데드가 대립하기 때문에, 대지 모신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을 부여할지 모릅니다.
비록 언데드 퇴치 능력이 드루이드 전형이 아니라고 해도, 판타지 소설 작가는 드루이드가 자연 성물을 내세우고, 싱그럽고 풍요로운 기운을 풍기고, 언데드 퇴치 능력을 발휘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여러 중세 판타지들이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다고 설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던전 탐험 게임은 드루이드가 약물을 뿌리고 구울 무리를 몰아낸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가 자연을 숭배하고, 대지 모신과 언데드가 대립하기 때문에, 대지 모신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을 부여할지 모릅니다. 왜 대지 모신과 언데드가 대립하나요?
왜 대지 모신이 언데드를 싫어하나요? 이미 위 문단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많은 생명체들이 자연의 섭리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이건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생물 다양성에서 인류가 비롯했고,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류가 살아가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는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먹고 삽니다. 이건 예외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예외 없이,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먹고 삽니다. 하지만 허공에서 먹거리는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울창한 숲 속에서 여자 채집꾼들이 열매들을 따는 것처럼,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습니다. 자연 환경 없이, 인류는 먹고 살지 못합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고 삽니다. 자연 환경 없이, 인간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풍요로운 자연 없이, 인간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이게 필연적이기 때문에, 자연 환경은 근본적입니다. 자연 환경이 근본적이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는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현실에서 자연의 섭리가 근본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는 이것을 반영합니다. 중세 판타지가 이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대지 모신은 언데드를 싫어합니다. 대지 모신은 언데드를 싫어하고, 드루이드가 대지 모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대지 모신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을 부여합니다.
판타지 소설 작가는 이것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던전 탐험 보드 게임은 이것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게 던전 탐험 전형이 아니라고 해도, 이 설정(드루이드에게는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다)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미 현실에서 자연의 섭리가 근본적인 법칙이고, 던전 탐험이 근본적인 법칙(생물 다양성)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산송장은 언데드를 가리키기보다 무기력한 사람을 비유합니다. 비록 산송장이 언데드를 번역하지 못한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이미 근본적인 법칙,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살아갑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판타지 작가는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게임 제작자는 던전 탐험 보드 게임을 만들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소설은 나타나고, 현실 속에서 보드 게임은 나타납니다. 현실에서 소설과 보드 게임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설과 보드 게임이 나타나기 전에, 중세 판타지와 던전 탐험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현실,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은 존재합니다. 소설, 보드 게임, 중세 판타지, 던전 탐험보다 현실,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은 우선합니다. 자연의 섭리라는 구조 속에서 던전 탐험 드루이드는 나타납니다.
던전 탐험보다 자연 생태계가 우선하는 것처럼, 설정보다 구조는 우선합니다. 자연의 섭리가 구조가 되고, 이 구조 속에서 던전 탐험 드루이드가 나타나기 때문에, 던전 탐험 드루이드는 근본적인 법칙,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자연의 섭리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판타지 소설 작가는 드루이드가 자연 성물을 내세우고, 싱그럽고 풍요로운 기운을 풍기고, 구울 무리를 몰아낸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던전 탐험 보드 게임은 드루이드가 약물들을 뿌리고 구울 무리가 드루이드에게 덤비지 못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 던전 탐험 설정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설정(드루이드에게는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다)이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해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만약 보드 게임이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있다고 설정한다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설정이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성물을 내세우고 풍요로운 기운을 뿜을 때, 구울들은 도망치고, 인간들은 싱그러운 삼림 향기를 맡을지 모릅니다. 만약 판타지 소설이 이 장면을 묘사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이게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모든 독자는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산송장이 어색한 번역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어떤 독자들과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 주장은 틀리지 않습니다. 언데드 퇴치 능력은 고정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심지어 판타지 소설과 던전 탐험 게임은 성직자에게조차 언데드 퇴치 능력이 없다고 설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어떤 사람들이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객관적인 구조를 인정할 겁니다.
비록 드루이드에게 언데드 퇴치 능력이 없다고 해도, 비록 드루이드가 약초를 추출하지 않고, 약물을 조제하지 않고, 좀비들을 몰아내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 자연의 섭리는 우선합니다. 생물 다양성, 자연의 섭리가 우선하기 때문에, 이건 구조가 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판타지 소설과 던전 탐험 보드 게임은 나타납니다. 뭐라고 사람들이 해석하든, 뭐라고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이 느끼든, 이 구조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설정하고 해석합니다. 설정과 해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나, 구조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소설과 보드 게임은 예술, 문화에 속합니다. 소설과 보드 게임이 예술, 문화이고,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이 소설과 보드 게임을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건 문화적인 차이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뜻입니다. 문화적인 차이는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문화적인 차이는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근본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화적인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인 차이는 표면적입니다. 이건 문화적인 차이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좋아합니다.
만약 문화적인 차이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면, 주류 문학들과 SF 소설들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SF 독자들은 주류 문학들보다 SF 소설들을 훨씬 좋아합니다. (이 블로그 역시 주류 문학들보다 SF 소설들을 훨씬 열심히 떠듭니다.) 만약 문화적인 차이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면, 왜 SF 독자들이 주류 문학들보다 SF 소설들을 훨씬 좋아하(고, 왜 이 블로그가 주류 문학들보다 SF 소설들을 훨씬 열심히 떠드)나요? 분명히 문화적인 차이, 예술 해석, 문화 해석에게는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게시글 그 자체조차 문화 해석에게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증명합니다.)
특히, 예술과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생체 비행선 대 공중 철갑함'이 아주 로망스럽다고 느낍니다. 부유 고래 비행선은 개조 맹금들을 날리고 공중 철갑함을 몰아냅니다. 제가 이것을 상상하는 동안, 저는 마음이 설렌다고 느낍니다. 생체 비행선이 제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제가 마음이 설렌다고 느끼는 것처럼, 예술과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돌 팬들이 아이돌 그룹을 덕질하고 혐생(혐오스러운 인생)을 극복하는 것처럼, 심지어 예술과 문화는 지친 인생의 위대한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보편적인 현상인가요? 아무리 아이돌 그룹이 인생의 활력소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아이돌 그룹이 인생의 활력소인가요? 아무리 제가 마음이 설렌다고 느낀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생체 비행선이 로망스러운 SF 설정인가요? 아니, 레드벨벳 팬들에게 생체 비행선보다 슬기의 멋진 춤선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심지어 레드벨벳 팬들은 생체 비행선이 시시하고 밋밋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반면, 저에게 슬기의 멋진 춤선보다 생체 비행선은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인 중요합니다. 레드벨벳 슬기와 생체 비행선처럼, 예술, 문화는 보편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문화적인 차이에게는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예술, 문화가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가 생체 비행선을 좋아하고 마음이 두근거린다고 느끼는 것처럼) 심지어 예술, 문화가 인생의 활력소이기 때문에, 예술 해석, 문화 해석에게는 아주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언어와 발성이 문화에 속하고, 남자들이 특정한 말투들로 특정한 단어들을 말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문화가 우리 감정을 뒤흔들기 때문에, 문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속에서 생체 비행선이 나타나는 것처럼, '구조 속에서 문화'는 나타납니다.
레드벨벳 팬들은 생체 비행선이 로망이라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생체 비행선이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에게 기반한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SF 작가가 생체 비행선을 설정할 때, SF 작가는 야생 동물(고래)을 참고(링크)합니다. 만약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생체 비행선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비록 레드벨벳 팬들이 생체 비행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자연 생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생체 비행선은 나타나고, 자연의 섭리는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부유 고래 비행선은 나타나고, 자연의 섭리가 근본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생체 비행선은 근본적인 법칙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부유 고래 비행선과 달리, 레드벨벳은 근본적인 법칙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가 먹고 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은 근본적(인 생산 조건)이고, 생체 비행선은 이 생산 조건에게 기반하나, 레드벨벳이 생물 다양성, 근본적인 생산 조건에게 기반하나요? 레드벨벳이 풍요로운 자연 환경, 대지 모신, 보편적인 먹고 살기를 강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레드벨벳은 이 생산 조건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레드벨벳이 빨갱이 <빨간 맛>을 부르든, <You Better Know>를 부르든, 레드벨벳은 근본적인 생산 조건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레드벨벳 팬들은 <빨간 맛>이 대지 모신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진화 생물학이 스팀펑크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부유 고래를 키우는 것처럼, <빨간 맛>보다 부유 고래 비행선은 생물 다양성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빨간 맛>보다 생체 비행선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구조(생물 다양성) 속에서 문화(생체 비행선)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레드벨벳 멤버들조차 이것을 인정할 겁니다. 심지어 슬기조차 이것을 인정할 겁니다.
심지어 훌륭한 메인 댄서 슬기조차 생산 조건(생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비단 드루이드와 언데드 퇴치와 부유 고래 비행선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르 명칭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는 스페이스 함대를 묘사합니다. 만약 SF 소설이 우주 순양 전함을 묘사한다면, SF 독자들은 순양 전함 함장이 남자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비록 SF 소설이 우주 함장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함장이 남자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만약 SF 소설이 외계 항공 모함을 묘사한다면, 비록 SF 소설이 외계인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남자 외계인이 항공 모함을 지휘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비록 SF 소설이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남자가 순양 전함을 지휘하고 남자가 항공 모함을 조종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현실에서 함선 장교들은 남자들입니다. 여자들보다 남자들은 함선 장교들이 됩니다. 기나긴 인류 문명 역사에서 여자들보다 남자들은 함선들에 탑승했고, 함선들을 운영했고, 함선들을 지휘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유명한 문구처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남자의 얼굴을 합니다. 전쟁이 남자의 얼굴을 하기 때문에, 남자들과 함선들은 가깝습니다.
현실에서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함선에 가깝기 때문에, 이 현실(전쟁은 남자의 얼굴이다)은 구조가 됩니다. 이 구조(전쟁은 남자의 얼굴이다) 속에서 SF 독자들은 순양 전함을 해석합니다. SF 소설이 나타나기 전에, 우주 순양 전함이 나타나기 전에, 구조는 우선합니다. 이 구조 속에서 SF 독자들이 해석하기 때문에, 비록 SF 소설이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순양 전함 함장은 남자가 됩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너 해링턴 함장처럼, 다른 SF 독자들은 우주 함선 함장이 여자라고 해석할 수 있으나, 그들은 객관적인 구조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앤 레키는 <사소한 정의>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성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별 대명사는 '그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정의>에서 우주 호위함(프리깃) 함장이 '그녀'라고 해도, 소설 독자들은 호위함 함장이 남자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미 현실, 구조(전쟁은 남자의 얼굴이다), 남자 함장들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앤 레키가 여자 대명사들을 주구장창 쓴다고 해도, 구조보다 앤 레키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정의>보다 구조는 우선합니다. <사소한 정의>보다 구조가 우선하기 때문에, 우주 호위함 함장은 남자일지 모릅니다.
던전 탐험 드루이드와 우주 호위함 함장처럼, 특정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해석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구조 속에서 우리는 해석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해석하는 동안, 우리는 구조 속에서 우리가 해석한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가 스팀펑크를 도입하고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한다면, 중세펑크 세계에서 드루이드가 자본주의를 좋아할까요, 아니면 싫어할까요? 해석과 설정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루이드가 자본주의를 좋아한다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루이드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과 상대적인 설정보다 현실 속의 근본적인 법칙은 우선합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인류가 먹고 살기 때문에, 풍요로운 자연 없이, 인류가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소수 지배 계급은 자연 환경을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 환경은 사유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이 그저 돈벌이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자연 환경이 그저 돈벌이 나부랭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들은 너무 심각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시장 경제보다 환경 보호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환경 보호보다 시장 경제는 우선합니다. 환경 보호보다 시장 경제가 우선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연이 그저 돈벌이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자본주의를 증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루이드가 자본주의를 좋아한다고 설정할 수 있으나, 그들은 객관적인 구조,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 하키 곡선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사소한 정의>보다 구조(전쟁은 남자의 얼굴이다)가 우선하는 것처럼, 중세펑크 드루이드보다 구조(생물 다양성, 자연의 섭리)는 우선합니다.
중세 판타지 비디오 게임들은 여자 모험가들이 갑옷들을 입지 않는다고 묘사합니다. 아무리 여자 모험가들이 갑옷들을 입는다고 해도, 이 갑옷들은 어깨, 앙가슴, 허리, 허벅지, 종아리, 기타 등등을 가리지 않습니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오직 원더 우먼만 어깨와 가슴 상단과 허벅지를 노출하는 것처럼, 중세 판타지 비디오 게임들에서 여자 모험가들은 노출합니다. 이게 가부장 편견인가요? 아니면 이게 창작과 표현의 자유인가요?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가 공공 육아를 부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악랄한 가부장 제도입니다.
악랄한 가부장 제도는 구조가 되고, 이 구조 속에서 중세 판타지 여자 모험가들은 나타납니다. 해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나, 이 구조, 악랄한 가부장 제도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건 남한 사회가 가부장 제도라는 뜻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비난하나, 가부장 제도 속에서 그들은 메갈리아를 비난합니다. 그리고 많은 남한 사람들은 환경 보호보다 시장 경제가 우선한다고 판단합니다. 지구 생물권 멸종보다 메갈리아가 심각한 폭력인가요? 아니, 우리는 어떤 구조 속에서 우리가 해석하는지 인식해야 합니다.
※ 사진 <… Falls During Daytime> 출처: Jeswin Thomas,
https://www.pexels.com/photo/falls-during-daytime-4036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