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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대혼란의 시대>와 기후 소설들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대혼란의 시대>와 기후 소설들

OneTiger 2022. 3. 17. 20:00

[주류 소설들이 거시적인 관점을 외면할 때, 주류 소설들보다 SF/판타지는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SF, 사이언스 픽션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SF,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심각한 재앙을 묘사하고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일 겁니다. 이 소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 소설에서 인류 문명이 심각한 재앙에 부딪히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드문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고대 신화에서도 인류 멸망, 세계 종말은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 신화들은 세계가 멸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기 전에, 이미 고대 문화들은 인류 멸망, 세계 종말을 상상했습니다. 이미 고대 문화들이 인류 멸망을 상상했기 때문에, 아주 오랜 동안, 인류 멸망은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19세기 이후, 과학,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신화, 종교는 힘을 잃었으나, 사이언스 픽션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찾기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인류 멸망은 커다란 관심을 끕니다. 19세기 이후,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전략 병기 폭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인류가 멸망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습니다. 세계적인 심각한 환경 오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인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들 속에서 인류는 멸망할지 모릅니다. 전략 병기 폭발과 환경 오염은 인류 멸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양대 산맥일 수 있습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오직 내부 원인만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국주의가 전략 병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만약 광역 전략 병기가 폭발하고 인류가 멸망한다면, 이 멸망 원인은 내부 원인일 겁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만약 환경 오염들 속에서 인류가 멸망한다면, 이 멸망 원인은 내부 원인일 겁니다. 전략 병기, 환경 오염과 달리, 소행성 충돌은 외부 원인입니다.

 

만약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하고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면, 전략 병기, 환경 오염과 달리, 이 멸망 원인은 외부 원인일 겁니다. 인류 문명이 소행성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악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인류를 멸종시킨다면, 소행성 충돌처럼, 이 멸망 원인은 외부 원인일 겁니다. 인류 문명이 사악한 외계인들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외계인, 소행성 충돌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단 내부 원인만 아니라 외부 원인 역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외부 원인보다 내부 원인과 현실은 가깝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환경 오염 원인인 것처럼, 내부 원인은 현실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악한 외계인들이 침략한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악한 외계인들을 황당무계한 공상, 유치한 공상이라고 비웃기조차 합니다. 사악한 외계인들은 그저 유치한 스페이스 오페라에 불과합니다. 사악한 외계인들과 달리, 전략 병기 폭발은 현실적입니다. 이미 인류 문명은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냉전을 거쳤습니다. 아무도 3차 세계 대전이 터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달리, 3차 세계 대전은 농담이 아닙니다. 새로운 파쇼주의, 네오 나치가 미쳐날뛰는 것처럼, 전략 병기 폭발, 내부적인 멸망 원인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전략 병기처럼, 환경 오염은 현실적입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많고 많고 많고 많은 사람들을 심각한 고통에 빠뜨립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울부짖고,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환경 오염이 현실적인 문제라고 증명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달리, 세계적인 환경 오염은 농담이 아닙니다. 비단 코로나 19 사태만 아니라 짙은 대기 오염, 핵 발전소 사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짙은 대기 오염이 창공을 가릴 때, 환경 오염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결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핵 발전소들이 사고를 겪었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외부 멸망 원인보다 내부 멸망 원인이 훨씬 현실적이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내부 멸망 원인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외부 원인보다 내부 원인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부 원인보다 외부 원인은 커다란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부 원인이 커다란 관심을 받는다고 해도, 코로나 19 사태처럼, 내부 원인은 훨씬 현실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계 구축함 미사일을 걱정하기보다 전염병 격리를 걱정합니다. 외계 구축함 미사일보다 전염병 격리가 무서운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2000년대 이후,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기후 변화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기후 소설(Cli-Fi)'처럼, 기후 변화는 새로운 범주, 독립적인 범주를 형성했습니다. 쇼유 라멘이 국수 요리에 속하는 것처럼, 기후 소설은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쇼유 라멘이 하위 개념이고, 국수 요리가 상위 범주인 것처럼, 기후 소설은 하위 개념이고, 환경 아포칼립스는 상위 범주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상위 범주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상위 범주입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행성급 생태학 재앙이기 때문에, 기후 소설은 새로운 범주가 됩니다.



기후 변화가 전대미문의 생태학 재앙이기 때문에, 기후 소설은 독립적인 범주가 됩니다. 기후 소설이 독립적이기 때문에, 기후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나, 어떤 독자들은 기후 소설과 사이언스 픽션을 분리하는지 모릅니다. 피터 와츠는 <사이클롭테러스>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기후 소설입니다. <에스에프널>이 <사이클롭테러스>를 포함하는 것처럼, 한편으로 이 단편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새시 로이드는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썼습니다. <카본 다이어리>는 기후 소설입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카본 다이어리>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분리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카본 다이어리>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어떤 기후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비록 어떤 독자들이 기후 소설과 사이언스 픽션을 분리한다고 해도,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기후 소설들을 포함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서 기후 소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비디오 게임 역시 기후 변화를 경고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에서 환경 아포칼립스가 커다란 관심을 끌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역시 기후 변화를 경고합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는 해수면 상승이 도시를 덮쳤다고 묘사합니다.


<카본 다이어리>와 달리, <서브머지드>는 훨씬 환상적입니다. <카본 다이어리>는 현실에 가까우나, 아주 멀리, <서브머지드>와 현실은 떨어집니다. 분명히 <서브머지드>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도시는 바다에 잠기고, 건물들 사이에서 고래 상어는 헤엄치고, 건물 꼭대기에서 커다란 나무들은 자라고, 사람들은 변이하고, 기타 등등…. <서브머지드>는 신비로운 판타지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판타지 분위기는 전대미문의 재앙, 기후 변화, 해수면 상승, 인류 멸망에게 기반합니다. <서브머지드>와 녹색 변이 고래 상어처럼, 기후 변화는 판타지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판타지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너무 비현실적인 재앙입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적인 문제이나,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비현실적인 재앙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비(非)현실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비현실 세계를 상상하고, <서브머지드>에서 녹색 변이 상어가 헤엄치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비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기후 변화가 비현실 세계로 이어지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서브머지드>와 달리, <카본 다이어리>는 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카본 다이어리>조차 '진짜 일상'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서브머지드>는 벗어납니다. 아무도 <서브머지드>가 일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서브머지드>보다 <카본 다이어리>는 일상적인 분위기에 가까우나, 심지어 <카본 다이어리>조차 '진짜 일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진짜 일상'에서 <카본 다이어리>는 벗어납니다. 전형적인 10대 로맨스 소설들을 보세요.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들은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고통,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들은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봉기하고 폭력을 휘두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10대 로맨스 소설들보다 <카본 다이어리>는 비현실 세계에 가깝습니다. 전형적인 10대 로맨스 소설들은 '진짜 일상'을 유지하나, 이 소설들과 달리, '진짜 일상'에서 <카본 다이어리>는 벗어납니다. 이 관점에서 <서브머지드>와 <카본 다이어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서브머지드>가 비현실 세계인 것처럼, <카본 다이어리>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TV 주말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를 보세요. <신사와 아가씨>는 '진짜 일상'에 가깝습니다. 이 드라마는 건물들 사이에서 고래 상어가 헤엄친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는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봉기한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신사와 아가씨>, 진짜 일상 관점에서 <서브머지드>와 <카본 다이어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진짜 일상 관점에서 <서브머지드>가 비현실 세계인 것처럼, 진짜 일상 관점에서 <카본 다이어리>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그래서 주류 소설들은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류 소설들은 비현실 세계보다 현실 일상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입니다. 주류 소설들은 진짜 일상이 엄청난 변화를 거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류 소설들은 엄청난 변화를 거부하고 진짜 일상을 유지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류 소설과 기후 소설은 다릅니다. 그래서 주류 소설과 환경 아포칼립스는 다릅니다.

 

적어도 <대혼란의 시대>는 기후 소설, 환경 아포칼립스와 주류 소설이 다르다고 분리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를 썼습니다. <대혼란의 시대>는 주류 소설들을 비판합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전대미문의 생태학 재앙이라고 해도, 주류 소설들이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소설들이 엄청난 변화를 거부하고 진짜 일상을 유지하기 원하기 때문에, <대혼란의 시대>는 주류 소설들을 비판합니다. 이 상황에서 진짜 비현실적인 허구는 환경 아포칼립스들보다 주류 소설들입니다. 이미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류 문명은 '진짜 일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기후 변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후 변화를 막기는 불가능한지 모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것을 걱정합니다. 만약 더 이상 기후 변화를 막기가 불가능하다면, 더 이상 인류 문명은 '진짜 일상'을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진짜 일상은 그저 순진한 공상, 엉터리 망상에 불과합니다. 단편 소설 <사이클롭테러스>가 묘사하는 것처럼, 만약 초강력 태풍이 도시들을 무너뜨린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진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나요? 닐 셔스터먼, 재러드 셔스터먼은 <드라이>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수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분 좀비에 가깝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수분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진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나요? 진짜 일상은 불가능합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진짜 일상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진짜 일상을 날려버립니다. 아무리 첨단 의학 기술들이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다고 해도,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끝난다고 해도, 기후 변화를 막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짜 일상은 그저 순진한 공상, 엉터리 망상에 불과합니다.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 시대에 대처해야 합니다. 비록 기후 변화 시대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가시밭길, 어려운 미래를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류 소설들은 생태학 재앙을 외면합니다. 주류 소설들이 진짜 일상을 유지하기 원하기 때문에, 주류 소설들은 순진한 공상, 엉터리 망상에 매달립니다. 주류 소설들처럼, <신사와 아가씨>는 엉터리 망상에 매달립니다. 50년 이후, 100년 이후, 500년 이후, 만약 미래 세대가 <신사와 아가씨>를 본다면, 미래 세대는 탄식을 내뱉을지 모릅니다. "아니, 세상에! 왜 심각한 기후 변화 시대에서 사람들이 그저 로맨스 드라마 따위를 촬영했지?" 어떤 사람들은 <신사와 아가씨>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TV 주말 드라마에게는 기후 변화를 비판하기 위한 의무가 없습니다.

 

<신사와 아가씨>에게 전대미문의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위한 의무가 없기 때문에, 비록 이 드라마가 기후 변화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신사와 아가씨>처럼, 비록 주류 소설들이 기후 변화를 경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주류 소설 잘못이 아닙니다. <대혼란의 시대>가 주류 소설들을 지적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가 쓸데없는 시비를 건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대혼란의 시대>에 공감하든, 반대하든, 주류 소설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기후 변화를 경고합니다. 그래서 주류 소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거시적입니다.



[이 장면은 자연 환경 변화, 야생 동물을 보여줍니다. 주류 소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거시적입니다.]



<대혼란의 시대>가 지적하는 것처럼, (주류 소설들이 엉터리 망상에 매달리기 때문에) 주류 소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거시적입니다. 주류 소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현실을 직시합니다. 이 상황에서 황당무계한 허구는 환경 아포칼립스보다 주류 소설들이고, <서브머지드>보다 <신사와 아가씨>입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신사와 아가씨>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신사와 아가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비록 이 드라마가 끔찍한 생태학 재앙을 경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이 잘못과 상관없이, <서브머지드>는 거시적입니다.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역시 <신사와 아가씨>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대혼란의 시대>, 이 문학 평론은 그저 왜 주류 소설들이 기후 변화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물을 뿐인지 모릅니다. <대혼란의 시대>는 시비를 걸기보다 의문을 제기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 판본 부제목은 '문화의 위기, 상상의 위기'입니다.) <대혼란의 시대>가 시비를 걸지 않는 것처럼, 비록 <신사와 아가씨>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도, 이 잘못과 상관없이, <신사와 아가씨>보다 <서브머지드>는 거시적입니다. <서브머지드>처럼, 환경 아포칼립스는 거시적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거시적입니다. (비록 하드 SF 우월주의가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판타지는 거시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거시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는 훨씬 매력적입니다. 주류 소설들보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는 매력적입니다. 이건 필연적으로 SF/판타지가 매력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SF/판타지보다 주류 소설이 거시적이라면, SF/판타지보다 주류 소설은 매력적일 겁니다. 주류 소설이 거시적인 관점을 외면하기 때문에, 주류 소설보다 SF/판타지는 좋습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SF/판타지를 칭찬하기 원했나요? 글쎄요, 비록 아미타브 고시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혼란의 시대>는 왜 SF/판타지가 매력적인지 증명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이 블로그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떠듭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편들기 원하나, 많은 사례들에서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 블로그는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판타지 역시 떠듭니다.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가 훨씬 유구하기 때문에, 어쩌면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는 중요한지 모릅니다.) <서브머지드>처럼, SF/판타지는 흥미롭습니다.



<대혼란의 시대>는 SF/판타지가 흥미롭다고 증명하나, 애석하게도, 이 문학 평론에게는 몇몇 단점이 있습니다. <대혼란의 시대>는 식민지가 일방적인 기후 변화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미얀마가 산업 화석 연료 경제를 추구했던 것처럼, 식민지가 산업 자본주의를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식민지가 산업 혁명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혼란의 시대>는 식민지가 기후 변화 가해자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타당한가요? 근대 사회 이후, 동남 아시아가 서구 문명을 침략했나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침략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서구 제국주의가 동남 아시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동남 아시아는 피해자입니다. 만약 동남 아시아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면, 이건 일방적으로 서구 제국주의가 동남 아시아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하지 않았다면, 비단 식민지만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 역시 안전했을 겁니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안전하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탈선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탈선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심각한 생태학 재앙을 막았을 겁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이 진실(서구 제국주의는 러시아 소비에트를 압박했다)을 간과합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러시아 소비에트를 간과하는 것처럼, 아미타브 고시는 사유 재산 제도를 간과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산업, 진보, 근대를 맹신했다고 지적합니다. 비단 아미타브 고시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역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산업, 진보, 근대를 맹신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이 타당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한형식 저자는 <처음 읽는 공산당 선언>을 썼습니다. <처음 읽는 공산당 선언>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산업, 진보, 근대를 맹신하지 않았다고 반박합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사유 재산 제도를 비판합니다.

 

지배 계급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자연 환경을 소유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지배 계급은 자연 환경을 소유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은 상품이 됩니다. 자연이 자연보다 상품이기 때문에, 환경 오염은 심각합니다. 만약 사회 구성원들이 자연 환경을 공유한다면, 만약 무산자 민중들이 자연 환경을 소유한다면, 공유지 경제는 심각한 생태학 재앙을 막을 겁니다. 하지만 <대혼란의 시대>는 사유 재산 제도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혼란의 시대>는 노동자 민중 운동보다 종교인들에게 의지하기조차 합니다. 글쎄요, 이게 실천일 수 있나요?



※ 게임 <서브머지드> 스크린샷 출처: HAKIMODO,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777169471

※ 게임 <서브머지드> 스크린샷 출처: bluez.,
https://www.youtube.com/watch?v=xzIp_FpuJ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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