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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경애의 마음>과 상식, 스테고사우루스 변신 본문

SF & 판타지/숲 속의 주문들

<경애의 마음>과 상식, 스테고사우루스 변신

OneTiger 2020. 9. 21. 19:59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테이블 게임 세션을 마련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각본을 씁니다. 테이블 게임은 각본을 요구합니다. 각본은 문학입니다.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테이블 게임 각본은 선형적이기보다 비선형적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참가하고 이야기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테이블 게임은 각본을 요구하고, 각본은 문학이고, 테이블 게임은 문학을 포함합니다. 롤플레잉 게임이 연극과 비슷하기 때문에, 연극 각본이 문학인 것처럼, 게임 각본은 문학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많은 사람들은 오직 이야기가 말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간주합니다. 만약 이야기가 뭔가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게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할 겁니다. 그들은 오직 이야기가 말하는 것만 해석 대상이 된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비록 이야기가 뭔가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짐작하고 해석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이야기가 말하는 것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에게 여러 빈틈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여러 빈틈들을 스스로 채웁니다. 작가와 함께, 사람들은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이게 등장인물에게 수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등장인물에게 수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물을 마시지 않나요? 독자가 등장인물에게 수분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등장인물에게 수분이 필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인간에게 수분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수분이 필요합니다. 이건 아주 보편적인 공통점입니다. 이게 보편적인 공통점이기 때문에, 소설은 이것을 생략했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수분이 필요합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이게 상식이기 때문에, 소설은 그저 상식을 생략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소설이 상식을 생략한다고 해도, 독자가 상식에게 근거하고 소설을 해석하기 때문에, 독자는 등장인물이 물을 마신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부재(不在)입니다. 소설에서 상식이 그저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에, 이건 '부재'입니다. 김금희 작가는 <경애의 마음>을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초반 8~14쪽은 등장인물 상수를 서술합니다. 초반 8~14쪽에서 상수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상수가 물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상수에게 수분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8~14쪽에서 상수가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8~14쪽은 그저 상식을 생략했을 뿐입니다. 상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부재'입니다. 독자는 상식에게 근거하고 상수에게 수분이 필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모든 살아있는 인간에게 수분이 필요한 것처럼, 소설 등장인물 상수에게는 수분이 필요할 겁니다. 8~14쪽에서 상수는 뭔가를 먹지 않으나, 이것 역시 부재일 겁니다. 현실에서 모든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먹고 삽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거리 없이, 인간은 굶어죽습니다. 인간은 뭔가를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인간이 먹기 때문에, 인간에게 식량은 필수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은 많고 많은 차이들을 드러내나, 생존하기 위해 모든 인간은 식량을 보편적으로 요구합니다. 인간이 녹인 야크 버터에 밥을 말아먹든, 마라탕에서 콴풘을 건져먹든, 인간은 식량을 요구합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인간은 노동합니다. 노동 없이, 식량은 없습니다. 아무리 야크가 풍성한 젖을 뿜는다고 해도, 아무리 쌀에게 높은 영양분이 있다고 해도, 만약 인간이 야크를 키우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인간은 야크 버터에 밥을 말아먹지 못합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인간이 노동하기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노동을 분석합니다.



젖을 짜기 위해 인간이 야크를 키우기 때문에, 먹거리를 얻기 위해 인간이 노동하기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노동을 중시합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필연적으로 먹고 삽니다. 소설 등장인물 상수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상수는 뭔가를 먹을 겁니다. 비록 <경애의 마음> 8~14쪽에서 상수가 뭔가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마르크스 경제학이 노동을 중시하는 것처럼, 독자는 상수에게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생물학에 익숙하다면, 독자는 상수가 신진 대사 과정을 거치고, 육체 형태를 유지하고, 엔트로피에 국소적으로 저항한다고 해석할 겁니다.

 

비록 <경애의 마음> 8~14쪽에서 상수가 뭔가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부재'입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은 그저 상수가 먹는다고 서술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소설이 뭔가를 생략한다고 해도, 독자는 빈틈을 직접 채울 수 있습니다. 김금희 작가와 함께, 독자는 빈틈을 채우고 소설을 스스로 완성합니다. 독자는 오직 소설이 언급하는 것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비록 소설이 뭔가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이것을 짐작하고 해석합니다. 독자는 '부재'를 해석합니다. 만약 독자가 부재를 해석하지 않는다면, 소설 작가는 모든 것을 서술해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모든 것을 서술할 수 있나요?



소설 작가가 모든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만약 소설 작가가 모든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해야 한다면, 작가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소설에는 부재들이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부재들을 씁니다. 독자는 부재들을 해석합니다. 독자가 부재들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독자가 상수에게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김금희 작가는 <경애의 마음> 8~14쪽을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설 독자에게 부재 해석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건 비록 소설이 뭔가를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게 필연적으로 부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소설이 뭔가를 서술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들은 부재보다 무(無)일 수 있습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은 생체 잠수정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이 생체 잠수정을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이것을 부재라고 해석하나요? "아, 그래. <경애의 마음> 속의 세계에서 해양 생태학자들은 생체 잠수정에 탑승하고 심해 환경을 연구할 거야. <경애의 마음>은 그저 생체 잠수정을 서술하지 않았을 뿐이야. 이건 부재야. 나는 <경애의 마음> 속의 세계에서 해양 생태학자들이 생체 잠수정에 탑승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이렇게 소설 독자가 해석할 수 있나요? 아니, 이건 부재가 아닙니다.



생체 잠수정은 부재가 아닙니다. 생체 잠수정은 부재보다 무에 가깝습니다. 왜 이게 무가 되나요? 현실에서 생체 잠수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잠수정을 건조하지 않고 탑승하지 않습니다. 생체 잠수정은 상식이 아닙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노동을 중시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노동하고, 이건 상식입니다. 반면, 현실에서 생체 잠수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상식이 아닙니다. 생체 잠수정이 상식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독자는 상식에게 근거하고 <경애의 마음> 8~14쪽 속의 세계에서 해양 생태학자들이 생체 잠수정에 탑승한다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은 생체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으나, 이건 부재보다 무입니다. 8~14쪽 속의 세계에서 생체 잠수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8~14쪽은 생체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생체 잠수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상식이 되지 않고, 김금희 작가는 상식으로서 생체 잠수정을 생략하지 못합니다. 김금희 작가는 상식으로서 식사 장면을 생략할 수 있으나, 식사 장면과 달리, 소설 작가는 상식으로서 생체 잠수정을 생략하지 못합니다. 이건 언제나 생체 잠수정이 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라면, 이 소설에서 생체 잠수정은 상식일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온갖 첨단 기술들을 자랑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통짜 기계 행성을 조립하거나, 초거대 고리 거주지를 설계하거나, 항성을 거대한 구로 덮습니다. 초거대 고리 거주지에게 고작 생체 잠수정 따위는 대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초거대 고리 거주지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생체 잠수정을 얼마든지 건조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생체 잠수정은 상식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 생체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경애의 마음> 8~14쪽과 달리, 소설 독자는 생체 잠수정이 부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온갖 첨단 기술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이 첨단 기술들이 생체 잠수정을 필연적으로 건조하나요? 첨단 기술들과 상관없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생체 잠수정을 건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 기계 잠수정이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생체 잠수정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생체 잠수정이 부재가 되나요, 아니면 무가 되나요? <경애의 마음> 8~14쪽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체 잠수정은 '무'입니다. 생체 잠수정이 무라고 해석하기는 쉽습니다. 현실에서 생체 잠수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非)현실을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초거대 고리 거주지는 존재하지 않으나,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것을 묘사합니다. 비록 현실에서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것을 묘사합니다.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만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에게 가장 커다란 특성은 비현실입니다. 비현실이 가장 커다란 특성이기 때문에, 소설 독자가 사이언스 픽션을 해석할 때, 소설 독자는 상식에게 근거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초거대 고리 거주지는 불가능합니다. 초거대 고리 거주지는 불가능하나, 소설 독자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SF 전형, 공식이기 때문입니다.

 

장르에게는 전형, 공식이 있습니다. 여러 소설들에게 비슷한 전형이 있기 때문에, 이 소설들은 범주를 형성하고 장르가 됩니다. 초거대 고리 거주지는 SF 전형, 공식입니다. 이게 장르 공식이기 때문에, 소설 독자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해석할 때, 소설 독자는 상식보다 장르 공식에게 근거합니다. 하지만 장르 공식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인간은 먹고 삽니다. 이건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시장 경제를 떠받들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학은 절대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수요-공급 곡선을 주절거리나, 몰상식한 자본주의 경제학과 달리, 아무도 먹고 사는 문제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달리, SF 공식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공학 3원칙을 고안했습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 해를 가하거나, 아니면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첫째 원칙이 위배되지 않는 이상,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셋째, 첫째 원칙과 둘째 원칙이 위배되지 않는 이상, 로봇은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건 로봇 공학 3원칙입니다. 로봇 3원칙은 아주 유명합니다. 이건 SF 전형입니다. 그래서 3원칙이 절대적인 법칙인가요? 로봇 소설이 3원칙을 따라야 하나요? SF 장르에서 모든 로봇이 이 원칙을 따르나요?

 

그건 아닙니다. 로봇 공학 3원칙은 의무가 아닙니다. SF 작가는 로봇 공학 3원칙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SF 작가가 로봇 3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SF 전형은 유동적입니다. SF 전형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생체 잠수정 역시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온갖 첨단 기술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생체 잠수정이 부재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미 기계 잠수정이 충분한 성능을 발휘한다면, 왜 기술자들이 생체 잠수정을 건조하나요? 생체 잠수정에게 존재하기 위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생체 잠수정은 무인지 모릅니다.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생체 잠수정만 아니라 중세 판타지에서 드루이드 역시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 3.5 판본에서 드루이드는 야생 동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신성을 숭배하기 때문에, 자연에서 드루이드는 힘을 이끌어내고 야생 동물로 변신합니다. 여기에서 야생 동물은 그저 표범 같은 생물종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 3.5 판본은 공룡들을 설명합니다. 공룡은 야생 동물입니다. 드루이드는 비단 표범만 아니라 트리케라톱스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는 세뿔 공룡으로 변신하고 아이언 골렘을 들이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드루이드가 스테고사우루스로 변신할 수 있나요? 3.5 판본 기본 규칙은 트리케라톱스를 설명합니다. 기본 규칙이 트리케라톱스를 설명하기 때문에, 만약 드루이드가 세뿔 공룡으로 변신한다면,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3.5 판본 기본 규칙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본 규칙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설명하지 않으나, 스테고사우루스는 아주 대표적이고 유명한 공룡입니다. 공룡 팬들에게 스테고사우루스는 상식입니다. 일반적인 공룡 매체들은 스테고사우루스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킹콩>부터 조이드 완구까지, 공룡 매체들에서 골판 공룡은 상식입니다.





스테고사우루스가 상식이기 때문에, 비록 3.5 판본 기본 규칙이 스테고사우루스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던전 마스터와 게임 플레이어들은 스테고사우루스가 무보다 부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는 쥐라기 공룡이고, 트리케라톱스는 백악기 공룡이나,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비현실이 가장 커다란 특성인 것처럼, 중세 판타지에서 비현실은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표범으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인간은 표범이 되지 못합니다. 이건 상식이 아니나, 던전 마스터와 게임 플레이어들은 비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던전 마스터와 게임 플레이어들이 비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아무리 현실에서 스테고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가 쥐라기와 백악기 공룡이라고 해도, 중세 판타지는 시대 구분을 지우고 골판 공룡과 세뿔 공룡을 뒤섞을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스테고사우루스들과 트리케라톱스들은 함께 서식할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스테고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가 함께 서식하기 때문에, 만약 드루이드가 트리케라톱스로 변신할 수 있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드루이드가 스테고사우루스로 변신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는 스테고사우루스가 되고 튼튼한 골판들로 육중한 헤즈루를 방어합니다.



하지만 이 해석이 옳은가요? 게임 플레이어가 스테고사우루스를 부재라고 해석할 수 있나요? 3.5 판본 기본 규칙이 그저 스테고사우루스를 서술하지 않을 뿐인가요? 아니면 던전 탐험 게임 세계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서식하지 않나요? 3.5 판본 기본 규칙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부재(不在)인가요, 아니면 무(無)인가요? 이건 어려운 물음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스테고사우루스가 부재라고 해석하나, 던전 마스터는 스테고사우루스가 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드루이드가 골판 공룡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석하나, 던전 마스터는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양쪽은 다툴지 모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비단 이것만 아니라 많은 비슷한 갈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 참가자들은 티격태격 싸우곤 합니다. (기독교 <성경> 무오설이 울고 갈 정도로, 어떤 게임 참가자들은 너무 고지식한 텍스트 근본주의자들입니다.) SF 소설 독자들 역시 티격태격 싸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상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두 장르에서 상식보다 전형, 공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SF 소설 독자들과 던전 탐험 게임 참가자들은 상식과 장르 전형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는 상식이 무엇이고 현실이 무엇인지 강조할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가 <경애의 마음> 8~14쪽을 해석하는 동안, 소설 독자는 상식이 무엇이고 현실이 무엇인지 묻지 않습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은 현실과 상식을 순순하게 따라갑니다. <경애의 마음> 8~14쪽은 현실에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반면, 생체 잠수정과 드루이드는 현실에게 저항합니다. 생체 잠수정과 드루이드는 상식이 무엇인지 비교하고 대조하고 분석합니다. 생체 잠수정과 드루이드가 현실에게 저항하기 때문에, 이건 훨씬 확장하고 현실 그 자체를 되짚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상식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이게 상식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한 사고 방식입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든 말든, 인간은 먹고 삽니다.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경제는 어려워지지 않습니다. 이미 식량은 충분합니다. 이미 식량이 충분하기 때문에, 문제는 경제보다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몰상식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먹고 사는 것보다 이윤 창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경제가 어렵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 게임 <스텔라리스> 스크린샷 출처: Milan,

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216134605

※ 게임 <사우리안> 스크린샷 출처:

twitter.com/palaeotaku/status/129932168422309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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