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만큼 경이로운 거대 생명체 본문
[현실에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는 없으나, 이미 이런 생명체들은 충분히 경이롭습니다.]
거대 괴수는 사이언스 픽션의 주된 소재입니다. 공룡은 19세기부터 SF 소설들의 주요 소재였고, 고래나 대왕 오징어 역시 문학 작품 속에서 사람들에게 거대 생명체의 경이를 느끼게 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온갖 창작가들이 다양한 거대 괴수들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발생적인 괴수도 있고, 유전 공학적인 괴수도 있고, 돌연변이 괴수도 있고, 외계인의 생체 병기도 있고, 어쨌든 거대 괴수들은 심해와 지저와 외계와 방사능 지대에서 곧잘 나타났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이웃 검마 판타지에서 드래곤이나 크라켄이 이런 역할을 맡았죠. 사이언스 픽션은 이웃집에서 드래곤과 크라켄을 빌렸고 아주 잘 써먹었습니다.
소설만 아니라 영화와 게임은 이런 괴수들을 열심히 섭외했고, 어지간한 우주 전쟁물에는 거대 괴수가 하나쯤 나와줘야 인지상정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괴수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그 크기 때문일 겁니다. 아주 단순한 도식이죠. 거대 괴수는 그 덩치만으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상징할 수 있습니다. SF 창작물에는 거대 괴수만 아니라 거대 건조물도 있지만, 거대 괴수와 거대 건조물은 서로 다른 느낌을 풍깁니다. 괴수는 생명체이고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대 괴수에게서 보다 경이로움을 느낄 겁니다. 거대 건조물도 굉장하지만, 이건 '죽은 것'입니다. 경이로움이 보다 떨어지죠.
하지만 거대 괴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았던 혹은 살아가는 거대 동물 중에서 고래나 공룡이나 오징어가 최고이지만, 아무리 거대한 공룡이나 오징어도 크기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2m조차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20m짜리 동물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바닷속에서 향유 고래나 대왕 오징어를 만난다면, 오금을 저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8m짜리 바다 악어는 어떨까요. 만약 해변에서 8m짜리 바다 악어가 어슬렁거리는 광경을 본다면, 누구나 거대 괴수를 봤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아니, 숲 속에서 3m짜리 아무르 호랑이만 만난다고 해도 사람들은 거대 괴수를 만난 것처럼 경외를 느끼겠죠. 비록 아무르 호랑이는 몇 십 m짜리 생명체가 아니지만, 아무르 호랑이는 인간보다 크고, 그 크기는 위엄을 내뿜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동물들이 경이롭다고 해도 그 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30m짜리 아르겐티노사우루스를 본다면 다들 놀라 자빠지겠으나, 소설이나 영화 속 거대 괴수들과 달리 아르겐티노사우루스 역시 100m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거대 생명체가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 없죠.
거대 동물은 100m를 넘어가지 못하지만, 거대 생명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거대 생명체는 존재합니다. 가령, 가장 커다란 생명체로는 꿀버섯 군집이 꼽히곤 합니다. 가장 커다란 꿀버섯 군집은 가히 8㎢에 이른다고 하죠. 비록 이 군집은 동물이 아니지만 분명히 놀라운 거대 생명체입니다. 버섯은 균류에 속하고, 균류는 미생물이죠. 모순적이게도 가장 작은 생명체가 가장 거대한 생명체로 꼽히는 셈입니다. 미국 사시나무 역시 엄청난 규모로 유명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나무들이 하나로 이어졌고, 따라서 하나의 유기체인 셈입니다. 몸무게가 6천 톤이 넘어간다고 하죠. 6천 톤…. 어마어마한 숫자로군요.
물론 이런 버섯 군집이나 나무들은 하나의 유기체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땅 위로 드러난 부분은 그냥 별개의 개체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명히 단일한 유기체이고, 그 엄청난 규모는 거대 괴수에 뒤쳐지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거대 괴수 따위는 비교가 안 되게 거대하죠. 게다가 거대 괴수는 상상일 뿐이지만, 버섯 군집이나 사시나무 무리는 현실 속에 존재합니다.
물론 이런 거대 생명체들은 거대 괴수만큼 파괴적이고 역동적이고 강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생명이 거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이언스 픽션만큼 경이롭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