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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만 추구하는 철학의 한계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정체성만 추구하는 철학의 한계

OneTiger 2017. 8. 14. 20:00

예전에 미국 대선 때였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떨어졌을 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굉장히 안타까워 하더군요. 아마 그 사람은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그게 여자들의 위상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 사람은 미국 남자들이 여자들을 인정하기 원했고, 힐러리 클린턴을 그런 상징으로 생각했겠죠. 하지만 저는 좀 의문이었습니다. 만약 클린턴이 당선된다고 해도 그게 여자들의 지위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미국 남자들이 '여자가 대통령이 되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건 분명히 진보이고 커다란 변화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인정했다는 뜻이고,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변화를 바라겠죠. 하지만 좀 더 따지고 본다면, (여전히 미국 대통령은 남자이지만) 이 세상에는 여자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문명국이라고 좋아하는 유럽에도 여자 지도자가 있고, 그 외에 다른 나라들에도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 대통령도 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남자들이 여자들의 위상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여자 대통령을 뽑았을까요. 여자 대통령이 여자들의 위상 상승을 상징할 수 있을까요.



물론 대통령을 뽑을 때, 후보들이 엇비슷하다면, 여자 대통령이 뽑히는 게 나을 겁니다. 지금까지 남자들은 실컷 해먹었고, 이제 그런 관습이 깨져야 합니다. 입으로만 성 평등을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현실 속에서 정책, 제도, 체계가 바뀌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남자)들이 여자들의 위상을 정말 인정한다면,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정말 여자 지도자들을 뽑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 지도자들이 뽑혔다고 해서 저는 그걸 무조건 긍정적인 현상으로 해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미 여자들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의 위상이 정말 높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자들이 남자들을 밀어내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 여자 지도자들이 정치와 경제와 문화 분야에서 남자 지도자들보다 많다고 해도, 저는 그걸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자 지도자들이 늘어난다는 현상은 분명히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여자 지도자들이 남자들만큼 폭력을 휘두른다면, 여자 지도자들이 늘어나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성별을 떠나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사상과 철학과 인성이 아니겠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가부장적 형틀을 깨려는 거대한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지도자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성 차별이나 성 폭행 문제는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말한 것처럼 여자들만의 사회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을까요. 남자들이 여자들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사회 구조나 체계가 변할까요. 물론 가부장제는 깨질 겁니다. 그건 분명히 반갑고 혁신적인 변화입니다. 하지만 부자 여자가 가난한 여자를 착취한다면? 백인 여자가 흑인 여자를 차별한다면? 미국 여자들이 원주민 여자들을 수탈한다면? 힐러리 클린턴은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는 '거대 자본의 자유'를 뜻합니다. 자유주의는 거대 자본이 자유롭게 자연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고, 자유롭게 야생 동물들을 죽일 수 있고, 자유롭게 숲을 밀어낼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여자 지도자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자유주의가 여전히 깽판을 친다면 미국 여자들은 원주민 여자들을 수탈하겠죠. 그게 페미니즘이 바라는 바일까요. 물론 아닐 겁니다. 저는 페미니즘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가 헛소리를 떠드는 중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별을 떠나 보다 평등한 사회 구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지도자로 많이 뽑아봤자 사회 구조가 폭력적이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버니 샌더스는 대통령 유세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히스패닉 여자가 버니 샌더스에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인지 물어봤다고 합니다. 샌더스는 그 사람이 히스패닉이고 여자라는 점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히스패닉 여자들이 중요한 자리를 모두 차지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지지한다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샌더스의 입장에 공감합니다. 저는 힐러리 클린턴이 떨어진 것보다 질 스타인이 떨어진 것이 훨씬 더 안타깝습니다.


질 스타인은 여자일 뿐만 아니라 보다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별을 비롯한) 차별을 없앨 수 있다면, 클린턴보다 질 스타인이 훨씬 더 적합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그 사람의 안중에 질 스타인은 없더군요. 그저 클린턴만 찾습니다. 그 놈의 자유 시장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여자들을 착취했는지 관심이 없나 봅니다. 왜 여자들이 성 노예가 되는지 관심이 없나 봅니다. 사회 구조를 외면하고 정체성만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한계죠. 아니, 정체성만 추구하는 사상은 페미니즘이 되지 못합니다. 페미니즘은 그런 단순한 철학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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