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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업루티드>, 숲 속에서 오솔길을 찾는 마법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업루티드>, 숲 속에서 오솔길을 찾는 마법

OneTiger 2019. 6. 26. 19:59

나오미 노빅이 쓴 <업루티드>는 중세 판타지 소설입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에는 국왕, 기사, 마법사가 있습니다. 국왕과 기사보다 마법사는 훨씬 중요합니다. 소설 화자, 소설 주인공 아그니에슈카가 마법사이기 때문입니다. 아그니에슈카가 강력하고 어려운 주문을 구사할 때, 소설 화자로서 아그니에슈카는 어떻게 마법사가 주문을 발현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게 추상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법사로서 아그니에슈카는 저주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건 시각적입니다. 마법사가 저주를 해제한다면, 병자는 다시 회복하고 활기를 찾을 겁니다.

 

이건 시각적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두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문이 발현하는 과정은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사고 방식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고 방식은 추상적입니다. 우리가 시냅스 전기 신호를 안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건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증법을 고민하거나, 사랑을 정의하거나, 시민 배당 원리를 설명할 때, 이것들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추상적입니다. 이것들처럼, 마법 발현은 추상적입니다. 마법 발현이 추상적이라고 해도, 소설 화자로서 아그니에슈카는 독자들에게 마법 발현을 설명해야 합니다.

 

 

마법 발현을 설명하기 위해 아그니에슈카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사실 우리가 언어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변증법을 고민하지 못하고, 사랑을 정의하지 못하고, 시민 배당 원리를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변증법과 사랑과 시민 배당 원리를 논의하기 원할 때, 우리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변증법과 사랑과 시민 배당 원리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마법 발현 역시 추상적이고, 아그니에슈카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여기에서 아그니에슈카는 마법 발현을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에 비유합니다. 아그니에슈카는 말괄량이 시골 아가씨입니다.

 

말괄량이 시골 아가씨에게 울창하고 방대한 숲은 놀이터입니다. 마법사가 주문 흐름을 쫓을 때, 이건 숲 속에서 오솔길을 찾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는 시각적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어떤 장면을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아그니에슈카가 마법 발현을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에 연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훨씬 쉽게 마법 발현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반드시 옳은가요? 아그니에슈카가 마법 발현과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를 연결한다고 해도, 정말 두 가지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있나요?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라는 설명이 마법 발현이라는 고유한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나요?

 

 

아그니에슈카는 중세 판타지 마법사입니다. 하지만 아그니에슈카는 21세기 미국 영어를 이용해 설명합니다. 작가 나오미 노빅이 21세기 미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아그니에슈카는 다른 언어(중세 판타지 언어)를 사용하는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소설을 쓰기 위해 나오미 노빅은 중세 판타지 언어를 21세기 미국 영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결국 독자는 21세기 미국 영어를 읽습니다. 미국 독자(영어 사용 독자)와 달리, 국내 독자는 21세기 남한 표준말을 읽으나, 독자가 미국 영어를 읽든 남한 표준말을 읽든, 이런 언어들은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회적인 기호는 보편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호로서 언어는 특정한 고유함보다 보편성을 반영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작위로 떠든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언어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와자카겔바슈마투리두타!" 이건 언어가 아닙니다. 이웃집 영희가 아랫집 수진에게 이걸 말한다고 해도, 21세기 남한 사람으로서 아랫집 수진은 이걸 알아듣지 못합니다. "와자카겔바슈마투리두타!"에는 오직 표시만 있고 의미가 없습니다. "와자카겔바슈마투리두타!"가 "나는 아펠슈트루델을 먹고 싶어."를 의미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이걸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훨씬 보편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후이 흘사 을업파 모규대 는리우 다니합 야해도시." 이 문구가 무엇을 가리키나요? 21세기 남한 시민들은 이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남한 시민들이 이 문구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 문구가 보편적인 문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구는 아나그램에 가깝습니다. 이 문구는 "사흘 이후 우리는 대규모 파업을 시도해야 합니다."입니다. "후이 흘사 을업파 모규대 는리우 다니합 야해도시."는 음절들을 거꾸로 늘어놓았고 어절들을 바꿔치기했습니다. '대규모 파업'은 '모규대 업파'가 되고, 이건 다시 '업파 모규대'가 됩니다. 이건 고유한 문법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이런 고유한 문법을 익힐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것을 암호라고 부릅니다.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시도할 때, 그들은 암호를 이용해야 할지 모릅니다. 대기업이 파업 노동자들을 끔찍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심지어 영리 기업들은 용역 깡패들을 부르거나 전투 경찰들을 부를지 모릅니다. 우리는 공권력이 국민들의 안전을 지킨다고 믿으나, 이건 심각한 착각입니다.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공권력은 폭력적으로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할 겁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암호를 이용해야 할지 모릅니다.

 

 

대기업 임원이 "후이 흘사 을업파 모규대 는리우 다니합 야해도시."를 읽는다고 해도, 대기업 임원은 이게 무슨 뜻인지 해석하지 못합니다.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숨길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언어에서 보편성은 중요합니다. 오직 비정규직 여자 노동 조합에서만 "후이 흘사 을업파 모규대 는리우 다니합 야해도시."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대기업 임원에게 이게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노동 조합은 대규모 파업 계획을 숨길 수 있습니다. 악랄한 대기업 때문에, 노동 조합은 대규모 파업 계획을 숨겨야 하나, 아그니에슈카는 반대입니다. 소설 화자로서 아그니에슈카는 마법 발현을 설명해야 합니다.

 

아그니에슈카는 독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그니에슈카는 언어,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기호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게 보편적이라면, 이게 마법 발현이라는 고유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나요? 보편적인 것과 고유한 것은 대립합니다. 현실 속에서 판타지 소설 독자들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마법 발현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마법사 아그니에슈카에게 마법 발현은 보편적인 경험인지 모르나, 우리에게 마법 발현은 낯섭니다. 아그니에슈카가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기호로 낯선 경험을 설명할 수 있나요? 이게 옳은 방법인가요? 보편적인 언어와 낯선 경험이 대립하지 않나요?

 

 

우리는 비욘세를 압니다. 비욘세에게는 특정하고 고유한 외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비욘세(의 실물이나 사진)를 볼 때, 우리는 비욘세의 외모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욘세의 외모를 묘사하기 원할 때, 우리는 언어로 묘사해야 합니다. 비욘세에게는 고유한 외모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흑인 여자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비욘세와 비슷하거나 닮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을 겁니다. 비욘세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고유한 외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기호 언어를 이용해 비욘세의 고유한 외모를 묘사할 수 있나요?

 

보편적인 기호와 고유한 외모가 대립하지 않나요? 언어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욘세의 외모를 볼 수 있고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언어를 이용해 비욘세의 외모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아그니에슈카와 달리, 우리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마법 발현은 낯선 경험입니다. 아무리 아그니에슈카(를 이야기하는 나오미 노빅)가 보편적인 언어로 낯선 경험을 설명한다고 해도, 이게 옳은 설명인가요? 언어가 비욘세의 고유한 외모를 묘사하지 못한다면, 언어는 마법 발현이라는 낯선 경험을 훨씬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비욘세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언어 '아름다움'은 비욘세의 고유한 외모를 직접 가리키지 못할지 모릅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표현에 빈틈이 있다고 (벌컥 화를 내면서) 지적할지 모릅니다. 보편적인 언어 아름다움이 비욘세의 고유한 외모를 직접 가리키지 못한다면, 보편적인 언어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는 마법 발현이라는 낯선 경험을 훨씬 제대로 가리키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그니에슈카는 마법 발현과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를 연결했으나, 어떤 관점에서 이런 연결은 억지일지 모릅니다.

 

콜린 윌슨이 쓴 <정신 기생체>에서 초능력자들은 사악한 정신 기생체들과 싸웁니다. 이름처럼, 정신 기생체는 정신, 사고 방식에 들러붙습니다. 정신 기생체는 추상적입니다. 사고 방식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정신 기생체 역시 추상적입니다. 초능력자가 정신 기생체와 싸운다고 해도, 이건 비가시적인 싸움입니다. 콜린 윌슨은 이런 비가시적인 싸움을 묘사하느라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비가시적인 초능력 발현이 낯설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걸 묘사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콜린 윌슨은 만족스러운 필력을 발휘했으나, 어쩌면 콜린 윌슨은 억지로 추상적이고 낯선 개념들을 언어에 연결했는지 모릅니다.

 

 

판타지 소설들과 SF 소설들에서 마법과 초능력은 주된 소재입니다. '마법 대 과학'이라는 오래된 불판 논쟁처럼, 어떤 사람들은 마법사가 과학자와 비슷하다고 말하나, 사실 마법사는 초능력자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 드루이드와 생태학 SF 식물학자는 비슷합니다. 중세 판타지 드루이드는 주문책을 펼치고, 주문을 외우고, 손을 휘젓고, 덩굴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태학 SF 소설 속에서 아무리 식물학자가 열심히 식물학 논문을 읽는다고 해도, 식물학자는 덩굴을 조종하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식물학자가 식물 도감을 읽는다고 해도, 식물학자는 잎사귀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반면, 영화 <스카이 하이>에서 나오는 라일라 윌리엄스처럼, 식물 초능력자는 덩굴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SF 식물학자와 식물 초능력자는 다릅니다. 중세 판타지 드루이드는 SF 식물학자보다 SF 식물 초능력자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법사와 초능력자는 비슷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마법사를 과학자보다 초능력자에 비교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과학은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반면, 우리에게 마법과 초능력은 모두 낯선 경험입니다. <업루티드>와 <정신 기생체>는 보편적인 언어를 이용해 낯선 경험을 묘사하기 원합니다. 이건 억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아아, 나는 그것을 형용하지 못한다!"라고 외쳤을 겁니다. 보편적인 언어는 감히 낯선 그레이트 올드 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묘사를 대충 넘어간다고 해도, 독자들은 이해해야 합니다. 보편적인 언어가 낯선 개념을 직접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처럼, 아그니에슈카는 "아아, 나는 마법 발현을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외쳐야 했을지 모릅니다. 아그니에슈카가 숲을 언급했을 때, 아그니에슈카는 방대함을 가리키기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숲'은 다른 여러 가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로버트 홀드스톡이 쓴 <미사고의 숲>에서 숲은 신비스럽고 음험합니다. 숲 속에는 사랑스럽고 신비한 아가씨가 있고, 동시에 숲 속에는 온갖 신화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다크 판타지 게임 <다키스트 던전>에서 숲(weald)은 마녀, 버섯 인간들, 늑대들이 도사리는 미궁입니다. 반다나 싱이 쓴 <델리>에서 숲은 녹색 자궁입니다. 어머니 자연처럼, 반다나 싱은 숲이 번성을 가리킨다고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녹색 자궁은 생명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숲은 도시를 뒤덮습니다. 숲은 압도적입니다. 인류 문명은 숲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생태 건설 게임 <블록후드>에서 숲은 삼림 건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연과 문명은 독립적이지 않고, 고층 건물은 숲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숲'은 여러 가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그니에슈카는 숲과 오솔길을 함께 언급했을 겁니다. '숲'과 '오솔길'은 이항 대립입니다. 이런 이항 대립 때문에, 숲은 방대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숲에는 여러 의미들이 있고, 어떤 독자들은 숲을 음험함이나 번성이나 압도적인 힘과 연결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아그니에슈카가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아그니에슈카는 숲을 언급했을 겁니다.

 

어쩌면 마법 발현은 숲 속에서 오솔길 찾기보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서 테크 트리를 올리는 느낌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그니에슈카가 중세 판타지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아그니에슈카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알지 못합니다. 아그니에슈카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걸 위해 나오미 노빅은 부조리를 감수해야 합니다. <업루티드>는 부조리 소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그니에슈카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언급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마법 발현 과정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서 테크 트리 올리기'에 훨씬 가까울지 모름에도, 아그니에슈카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언급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상 만물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나, 언어는 현실을 훌쩍 뛰어넘지 못합니다. 적어도 아그니에슈카는 중세 판타지 시골 사람입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19세기 사람이고 어느 정도 지식인입니다. 무엇보다 메리 셸리는 SF 작가입니다. 메리 셸리가 SF 작가임에도, 메리 셸리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메리 셸리는 우주 구축함을 생각한 적이 절대 없을 겁니다. 19세기 SF 소설과 20세기 후반 SF 게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근대적인 진보를 특별하게 이용하기 때문에,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20세기 중반 판타지 소설 <반지 전쟁>과 21세기 초반 판타지 소설 <업루티드>에서 기사는 검을 휘두르고 방패로 공격을 막습니다. 22세기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도 기사는 검과 방패로 무장할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사이언스 픽션, 20세기 사이언스 픽션, 21세기 사이언스 픽션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시대가 바뀌기 때문에, 언젠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처럼, 우리가 시대 변화를 상정할 때, 우리는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개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그니에슈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그니에슈카가 그렇지 못했음에도, 아그니에슈카는 언어를 동원하고 추상적인 마법 발현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건 나오미 노빅이 억지를 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당장 언어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오미 노빅은 훌륭한 필력을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독자는 판타지 소설과 SF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독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독자의 책임보다 언어의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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