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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수 전쟁>의 기후 변화와 난민 수용소 본문

생태/상호 작용으로서 사회와 환경

<식수 전쟁>의 기후 변화와 난민 수용소

OneTiger 2018. 4. 14. 19:05

소설 <식수 전쟁 2017>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난민 수용소일 겁니다.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난민 수용소는 소설 주인공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난민 수용소에 다녀온 이후,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변했다고 느끼고 악몽에 시달려요. 소설 주인공은 중산층 백인이나, 난민 수용소에서 비극적인 아프리카 아이들을 만나고,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식수 전쟁 2017>은 옥타비타 버틀러가 쓴 <킨> 같은 소설이 아닙니다.


<식수 전쟁 2017>은 환경 아포칼립스이고, 기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기후 변화는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왜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난민 수용소와 비극적인 흑인 아이들을 보여줬을까요. 왜 환경 아포칼립스가 제3세계와 인종 차별에 중요하게 끼어들까요. 작가가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제3세계를 다루는 이유는 결국 환경 오염이 계급 문제이기 때문일 겁니다. 기후 변화는 강대국들에서 비롯한 문제이나, 가난한 제3세계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온실 가스를 뿜을 능력조차 없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은 기후 변화 때문에 난민이 되고 수용소에 갇히고 온갖 굴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여러 약소국들은 기후 변화가 강대국들이 저지른 범죄라고 비판합니다. 북반부 강대국들(유럽, 캐나다와 미국, 중국이나 일본)이 남반구 약소국들(동남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게 저지른 폭력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기후 변화에게만 해당되는 발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환경 오염은 계급 문제이고,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에게 저지르는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유럽 침략자들은 유색 인종들을 노예로 부렸고, 숲을 파괴했고, 획일화된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숲을 파괴하고 획일화된 거대 농장을 운영하는 행위는 환경 오염입니다.


동시에 유색 인종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행위는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 공장들은 엄청난 매연을 뿜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그걸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저 하늘이 오염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본가 계급이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폭력이죠. 대기업이 핵 발전소를 건설할 때, 가난한 지역 주민들은 두들겨 맞고 쫓겨나야 합니다. 이것 역시 계급 차별이고 폭력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을 가르고, 자연과 문명이 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조차 이런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 옳은 의견입니다. 자연과 문명은 완전히 겹치지 않습니다. 아무르 호랑이나 백상아리 같은 동물은 문명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요. 하지만 어떻게 자연과 문명을 완전히 가를 수 있을까요. 인류가 자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풀의 죽음> 같은 소설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을 때 사람들 역시 굶어죽었습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고, 작물들을 공격했고, 결국 사람들 역시 피해를 입었어요.


<풀의 죽음>은 환경 오염을 경고하지 않으나, 이런 소설에서 독자들은 자연과 문명이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이 유전자 조작 작물을 생산한다면, 그건 자연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고, 동시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타격을 미칠 수 있어요. 이렇게 자연과 문명은 여러 공통점들을 공유합니다. 아니, 문명은 자연을 떠나지 못하고, 문명이 자연에게 피해를 미치면, 그건 다시 문명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에게 휘두르는 폭력입니다.



'자연 환경을 보존한다'는 문구는 그저 아름답고 싱그러운 녹색 숲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연 환경을 보존한다'는 문구는 평등한 공동체와 저항 운동을 가리킵니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숲과 저항 운동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피지배 계급이 용감하게 저항할 때, 아름답고 싱그러운 숲 역시 존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식수 전쟁 2017>은 기후 변화와 난민 수용소와 좌파 단체를 함께 이야기했겠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을 분리하고, 환경 오염이 계급 문제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환경 오염이 계급 문제라는 사실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학교들과 언론들과 기득권들은 서구적인 근대화가 최고라고 찬양하고, 사람들 역시 그런 찬양이 진실이라고 믿어요. 하지만 그런 찬양은 온갖 문제들을 감추고, 화려하고 요란한 측면들만 내놓죠. 과학 교과서들은 환경 오염이 다른 문제에서 비롯했다고 헛소리를 떠들고, 계급 문제를 감추죠. 하지만 환경 오염과 계급 문제는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급 차별이 터지기 때문에 환경 오염 역시 문제가 됩니다. 환경 오염이 무조건 계급 차별에서 비롯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너무 환원론적인 주장이겠죠. 하지만 계급 차별은 가장 큰 원인이고, 가장 시급한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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