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살아있는 상호 작용과 생태적인 상상력들 본문
[생태적인 상상력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것이 살아있는 상호 작용들을 과장하고 비틀고 확대하기 때문일 겁니다.]
소설 <우주의 개척자>는 외계 위성 개척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주인공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외계 위성으로 이주합니다. 외계 위성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농사를 짓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합니다. 이건 너무 어려운 과정입니다. 새로운 환경은 여러 재난들을 일으킵니다. 외계 위성에는 지구와 비슷한 생태계 순환이 없습니다. 개척자들이 먹고 살기 원한다면, 그들은 생태계 순환을 조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개척자들은 복잡한 상호 작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자연 생태계에서 꿀벌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어떻게 개척자들이 꿀벌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생태학이 너무 복잡하다고 투덜거립니다. 생태계, 살아있는 상호 작용, 스스로 순환하는 살아있는 체계는 복잡합니다. 생산자는 빛과 물과 토양으로 영양분을 만들고, 1차 소비자는 생산자를 먹고, 다른 소비자들은 하위 소비자들을 먹고, 분해자는 죽은 것들을 분해하고…. 이런 생태계 모식도는 간단합니다. 이것보다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는 훨씬 복잡합니다. 그래서 <산소 미포함> 같은 외계 개척 게임들 역시 복잡한 생태계를 구현했는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산소 미포함>을 플레이하는 동안, <우주의 개척자>에서 주인공이 투덜거린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 역시 자연 생태계가 너무 복잡하다고 투덜거릴지 모릅니다. <우주의 개척자>와 달리, <산소 미포함>은 코믹 SF 게임이나, 분명히 게임 속의 생태계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생태계 관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재미보다 피로를 느낄지 모릅니다. YouTube 같은 동영상 사이트들에서 온갖 공략 동영상들은 외계 개척 기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나, 모든 게임 플레이어는 고수가 되지 못할 겁니다. 외계 개척 기지가 망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생태계를 저주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생태학은 재미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생태학은 어느 정도 매력을 잃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이 인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자연이 우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생태학은 종교가 아니나,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가 영성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은 어머니 행성과 거대 괴수를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행성과 거대 괴수는 웅장하고 원초적이고 초월적입니다. 어머니 행성은 자연의 여신이고, 거대 괴수는 자연 신격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사람들이 거대 괴수를 숭배한다고 묘사합니다. 판타지 역시 이런 자연 신격들을 이야기합니다. 자연이 인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 묘사하기 원합니다. 어머니 행성과 거대 괴수는 자연이 초월적이라고 비유하고 상징하고 과장합니다. 자연은 신격이 되고, 인간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우러러봅니다. 이건 자연 생태계가 완전히 미지의 대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들이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생태학은 많은 지식들을 연구합니다. 19세기 이후, 이른바 근대 문명은 이런 지식들을 이용해 자연 생태계에 훨씬 제대로 적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첨단 과학 기술들은 새로운 자연을 만들지 모릅니다. 만약 우주 정거장에 아주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이 있다면, 이건 우주 속의 새로운 자연일지 모릅니다. 이런 폐쇄 인공 생태계가 제대로 순환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나, 첨단 과학 기술들은 새로운 자연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첨단 과학 기술들이 소행성 버블 월드를 만든다면, 소행성 내부가 '지구화'한다면, 이건 훨씬 놀랍고 새로운 자연이 될 겁니다.
불모지 행성이 살아있는 어머니 행성이 된다면, 이런 테라포밍 설정은 가장 거대한 생태학 SF 설정일 겁니다. 행성급 생태계 변화보다 무엇이 훨씬 거대한 설정이 되나요? 거대 괴수? 어떤 괴수들은 행성급 영향을 미칩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에서 고지라 어스는 정말 행성급입니다. 고지라 어스는 행성 생태계와 동화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거대 괴수는 행성급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거대 괴수들은 행성급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대 괴수가 난리깽판을 친다고 해도, 거대 괴수는 행성급이 아닙니다. 그래서 테라포밍 설정은 가장 거대한 생태학 SF 설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테라포밍이 놀랍다고 떠듭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테라포밍 설정이 가장 거대한 생태학 SF 설정이라면, 테라포밍 과정은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하드 SF 작가들은 테라포밍이 성공한다고 쓸 수 있으나, 현실 속에서 테라포밍이 정말 성공할 수 있나요? 지구 행성 환경이 망한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다른 행성들로 이주할 수 있나요? 우리가 이른바 'B 행성'으로 찾아갈 수 있나요? 아니, 만약 우리가 다른 행성들로 이주할 수 있다고 해도, 지구 행성 환경처럼, 어쩌면 외계 지구화 행성들 역시 망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과 달리, 우리는 이른바 B 행성으로 옮기지 못할지 모릅니다. 지구는 유일한 보금자리일지 모릅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정화 비용을 아끼기 원합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훨씬 많이 생산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잉 생산으로 이어지고, 잉여 자본을 투입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계속 자연을 상품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염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첨단 과학 기술들이 외계 행성을 지구화할 수 있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외계 행성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킬 겁니다. 만약 우리가 외계 행성으로 이주하지 못한다면, 이른바 B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질 겁니다.
우리가 영원히 지구를 떠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구를 훨씬 알뜰살뜰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절대 알뜰살뜰해지지 못하고, 그래서 인류 문명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주의 개척자> 같은 SF 소설은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주의 개척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찬양하고 비서구 지역들을 차별합니다. <우주의 개척자>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외계 개척 소설이나, 로버트 하인라인은 엉터리 경제학과 사회학을 적용합니다. 뭐,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수구 꼴통은 절대 경제학과 사회학을 제대로 서술하지 못할 겁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는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우주의 개척자>보다 <홍수>는 훨씬 나을 겁니다. <홍수>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절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홍수>에 여러 단점들이 있다고 해도, <우주의 개척자>보다 <홍수>는 훨씬 나은 경제학과 사회학을 이야기합니다. 재미있게도 소설 <홍수>에서 주인공 토비는 꿀벌들을 키웁니다. <우주의 개척자>와 달리, <홍수>는 생태학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나, <우주의 개척자>에서 주인공이 꿀벌을 운운하는 것처럼, <홍수>에서 토비는 꿀벌들을 키웁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꿀벌을 지목하는 것처럼, 생태학에서 꿀벌은 순환을 가리키기 위한 상징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꿀벌이 자연 생태계 순환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르 래퍼티가 쓴 <식스 웨이크>에서 정원 생태계는 로봇 꿀벌들을 보여줬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정원은 장거리 우주선 속의 폐쇄 인공 생태계입니다. 폐쇄 인공 생태계는 제대로 순환하지 못할지 모르고, 이런 생태계에는 훨씬 특별한 요소들이 있어야 할 겁니다. 꿀벌들이 생태계 순환 상징이 되기 때문에, <식스 웨이크>는 특별한 관리 요소들이 로봇 꿀벌이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소설 <레비아탄>과 이것 사이에는 관계가 없을지 모르나, 소설 속의 생체 비행선에도 폐쇄 인공 생태계가 있고, 생체 비행선의 내장에서 꿀벌들은 핵심 역할을 맡습니다.
우리가 꿀벌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우리는 오직 꿀벌만 떠올리지 않습니다. '꿀'벌이라는 이름처럼, 언제나 우리는 꿀벌과 꽃을 함께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단수(單數)로서 꿀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수(複數)로서 꿀벌과 꽃은 함께 존재합니다. 꿀벌은 꽃을 찾고, 꿀을 빨고, 꽃가루를 뭉치고, 다른 꽃을 찾고, 꽃가루를 전달하고, 이런 과정들을 반복합니다. 꿀벌과 꽃은 함께 진화합니다. 상호 작용은 단수가 아닙니다. 여러 생명체들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 자연 생태계는 복수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복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꿀벌이 생태계 순환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설명이 옳지 않다고 해도, 이런 설명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이런 생태계 순환이 커다란 재미이고 흥미이고 매력이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생태계 순환을 궁리해야 할 겁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이 새로운 자연을 보여준다면, 새로운 자연에는 새로운 순환 체계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이건 생태적인 상상력이 언제나 순환 체계를 강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는 새로운 자연과 기이한 해양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기이한 해양 동물들은 순환 체계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기이한 고래 상어를 비롯해 해양 동물들은 순환 체계 요소보다 신비롭고 장대한 미지와의 조우입니다.
<서브노티카>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게임 주인공은 쪽배 소녀 미쿠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미쿠는 살아남아야 하고 아픈 동생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런 게임에서 '자연'은 복잡하고 유기적인 순환 체계보다 장대하고 신비로운 미지가 되어야 할 겁니다. 만약 <서브노티카>가 정교한 생태계 순환을 강조한다면, 광대하고 묵시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옅어질 겁니다. 그래서 <서브노티카>에서 기이한 고래 상어가 생태계 순환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아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명: 비욘드 어스> 같은 게임은 아쉽습니다. 이 게임은 온갖 설정들을 들이댑니다. 이 게임이 온갖 설정들을 들이대는데도, 여기에는 게임 규칙으로서 생태계 순환이 없습니다.
드론 같은 거대 말벌들부터 크라켄 같은 거대 바다 괴수까지, 외계 행성에는 다양한 야생 동물들이 있으나, 이것들은 게임 규칙으로서 생태계 순환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외계 야생 동물들은 그저 전투 유닛들에 불과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전략 게임이고, 크고 작은 외계 야생 동물들은 전략 게임 속의 전투 유닛들입니다. 외계 야생 동물들은 생태계 구성 요소들이 되지 못합니다. 이 게임에서 핵심 주제가 거시적인 생태계 변화이기 때문에, 이건 너무 아쉽습니다. 하지만 <비욘드 어스>가 생태계 순환 규칙을 구현했다면, 이건 훨씬 많은 제작 비용을 잡아먹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략 게임에 생태계 순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게임 <프롬 더스트>처럼, 어떤 생태적인 상상력은 먹이 그물망을 미흡하게 보여줍니다. 이건 많이 아쉽습니다.]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흥미롭기 때문에, 생태학은 매력적인 과학입니다. 하지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제외하거나, 어느 정도 넘어갑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과학 논문이 아니고, 주제와 분위기를 위해 사이언스 픽션들은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바꾸거나 지우거나 강조합니다. 판타지 역시 생태계 순환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듄>과 사막 행성과 모래벌레와 멜란지 스파이스가 SF 생태학보다 판타지 생태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첫머리에서 차이나 미에빌이 쓴 소설 <상흔>은 온갖 심해 생태계들을 묘사합니다.
나중에 동물학자 요하네스와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와 각종 동물학, 생태학 서적들이 나오기 때문에, 독자가 <상흔>을 읽는 동안, 독자는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판타지 심해 생태학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오, 스팀펑크 잠수함과 심해 생태계와 둔클레오스테우스…! 이런 조합은 정말 로망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정말 로망을 압니다. 소설 <상흔>은 기본적으로 스팀펑크이나, <상흔>은 장르 경계선들을 얼마든지 왕래하고, 여기에는 여러 판타지들과 고딕 호러 설정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프롬 더스트>는 21세기 신 게임으로서 자신이 자연 현상들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다고 자랑합니다.
정말 이 게임은 자연 현상들을 실감나게 묘사하나, 아쉽게도 게임 속에서 고대 신화 생태계는 다소 미흡합니다. 커다란 녹색 꿈틀이(planter)들은 식물들을 심고, 훨씬 커다란 장갑 꿈틀이(destroyer)들은 식물들을 먹어치웁니다. 가끔 이런 꿈틀이들은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나, 많은 상황들에서 꿈틀이들은 그저 장식에 불과합니다. 식물상이 울창해질 때, 꿈틀이들은 부족민 섬으로 이주합니다. 하지만 꿈틀이들이 이주하든 말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거의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프롬 더스트>가 훨씬 복잡한 생태계를 구현하지 않았나요? 게임 제작 비용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생태학보다 신의 기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프롬 더스트>는 먹이 그물망을 너무 단순하게 다루었고, 이건 많이 아쉽습니다.
※ 게임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 출처: jtomkinson90,
https://forums.kleientertainment.com/forums/topic/91370-automated-algae-terrariums/
※ 게임 <프롬 더스트> 스크린샷 출처: https://fromdust.fandom.com/wiki/Anim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