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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비현실과 이방인, 지배적인 관념 본문

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비현실과 이방인, 지배적인 관념

OneTiger 2020. 4. 4. 20:00

[1번 그림에서 녹색 계통 다각형들은 빨간색을 강조합니다. 3번 드루이드 역시 보색 효과를 보여줍니다.]



위 그림에서 1번 직사각형 중심부와 2번 직사각형 중심부는 빨간색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2번 그림보다 1번 그림에서 중심부 빨간색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보색 효과'입니다. 1번 그림에서 녹색 계통 다각형들은 중심부 빨간색을 둘러쌌습니다. 녹색과 빨간색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녹색 계통 다각형들은 빨간색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빨간색을 강조합니다. 반면, 2번 그림에서 분홍색/빨간색 계통 다각형들은 중심부 빨간색을 둘러쌌습니다. 분홍색/빨간색 계통 다각형들과 중심부 빨간색은 비슷하고, 2번 그림은 중심부를 강조하지 못합니다.


3번 그림은 드루이드를 보여줍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는 자연 계열 성직자에 가깝습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계열 성직자이기 때문에, 많은 드루이드들은 울창한 삼림을 보호합니다. '자연'은 울창한 삼림 이외에 다양한 것들을 가리킬 수 있으나,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은 울창한 삼림을 가리킵니다. 아니, 비단 중세 유럽 판타지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우리는 '자연'이 울창한 삼림이라고 간주합니다. 울창한 삼림은 녹색이고, 그래서 드루이드들은 녹색 계통 복장을 입거나 녹색 나뭇잎들을 치장합니다. 3번 그림에서도 드루이드는 녹색 장식들을 치장했습니다.



3번 그림에서 드루이드가 녹색 장식들을 치장했기 때문에, 드루이드의 빨간 머리카락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 픽션들에서 일반적으로 빨간 머리카락은 강렬한 개성이 되나, 3번 그림에서 드루이드가 녹색 장식들을 치장했기 때문에, 빨간 머리카락은 훨씬 강렬합니다. 그래서 3번 드루이드 그림은 1번 직사각형 그림과 비슷합니다. 2번 직사각형 그림처럼, 만약 3번 드루이드가 빨간색 계통 복장을 입었다면, 빨간 계통 복장은 빨간 머리카락을 강조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단 3번 그림만 아니라 여러 드루이드 그림들은 녹색 복장과 빨간 머리카락을 대조합니다.


이런 그림(링크)처럼, 드루이드 그림은 녹색 나뭇잎들과 빨간 머리카락을 대조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화가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드루이드 그림이 녹색 자연과 빨간 머리카락을 대조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보색 효과'입니다. 1번 직사각형 그림과 3번 드루이드 그림은 '보색 효과'를 보여줍니다. 녹색빨간색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빨간색은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SF 팬들은 이 보색 효과를 SF 장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는 비일상적인 상상력, 비(非)현실을 묘사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은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비현실은 현실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존재가 되기 원하는 인간과 인간화하는 인공 지능이 공존하는 배경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과연 미래에도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로 남아있을까요." SF 평론에서 이런 문구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SF 평론가들은 인간의 본질을 떠듭니다. 주류 문학들 역시 인간의 본질을 떠들 수 있으나, SF 장르에서 인간의 본질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SF 장르가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고 인간과 비인간을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비인간 존재 없이, 우리는 인간을 파악할 수 있으나, 비인간 존재는 인간을 뚜렷하게 부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평가할 때, 흔히 우리는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고 대조합니다. 우리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동안, 우리는 유사성과 차이를 발견하고, 우리는 뭔가를 훨씬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평가할 때, 만약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비교하고 대조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훨씬 자세히 파악할 겁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들은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들은 오직 인간만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 주류 문학들은 오직 인간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반면,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대조합니다.



SF 장르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대조하기 때문에, 이 대조는 인간이 누구인지 훨씬 뚜렷하게 부각합니다. 녹색 덕분에, 빨간색이 훨씬 튀는 것처럼, 비인간 존재 덕분에, 인간은 훨씬 튑니다. 이렇게 SF 장르는 '보색 효과'를 이용합니다. SF 장르에게 '보색 효과'는 아주 커다란 장점입니다. 주류 문학들 역시 보색 효과를 이용할 수 있으나, 주류 문학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류 문학들은 비(非)현실,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들은 상급 인공 지능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상급 인공 지능과 인간을 비교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들은 오직 인간들만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들보다 SF 장르에서 보색 효과는 훨씬 커다란 장점이 됩니다. SF 장르가 비(非)현실,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SF 장르가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기술적인 특이점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술적인 특이점이 비(非)현실이기 때문에, 문학은 기술적인 특이점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현실만 말해야 합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비현실이고, 비현실은 황당무계한 공상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비현실을 말하나요?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현실만 말하고 비현실을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현실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황당무계한 공상에 빠질 겁니다. SF 장르는 비현실,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고, 그래서 SF 장르는 그저 황당무계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무시합니다. 솔직히 이건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하기 위한 전형적인 핑계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오직 현실만 말한다면, 우리는 '보색 효과'를 이용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현실과 비현실을 대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색 효과'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는 보색 효과입니다.


SF 장르에서 '보색 효과'는 오직 인간과 비인간 존재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SF 장르에서 많은 것들은 보색 효과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장거리 생체 우주선이 항해한다면, 이건 생명 현상을 훨씬 부각할 겁니다. 미래 과학자들은 개조 생명체를 만들지 모릅니다. 어쩌면 미래 과학자들은 생체 우주선을 정말 건조할지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생체 우주선은 살아있는 우주선입니다. 가혹한 우주 공간에서 우주선이 살아있을 수 있나요? 만약 우주선이 생명체이거나, 우주선에서 생명체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면, 가혹한 우주 공간에서 살아있는 우주선이 버틸 수 있나요? 이게 정말 가능한가요?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생명 현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은 물음을 유도합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은 "생명 현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유도합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 없이, 우리는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많은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묻습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 없이, 생물학자들은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장거리 생체 우주선, 비(非)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훨씬 깊게 자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실험 생물학자들은 간단한 유기물들을 조합하고 유사 생명 현상을 창조합니다.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실험 생물학자들은 유사 생명 현상을 창조합니다. 현실에서 유사 생명 현상은 존재하지 않으나, 생명 현상을 묻기 위해 실험 생물학자들은 유사 생명 현상을 의도적으로 만듭니다. 생명 현상을 묻기 위해 실험 생물학자들이 유사 생명 현상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SF 장르는 장거리 생체 우주선, 비(非)현실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비(非)현실 덕분에, 우리는 생명 현상을 깊게 자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장거리 생체 우주선은 자체적인 폐쇄 생태계를 구성할지 모릅니다. 영어에서 생체 우주선은 Bio Spaceship입니다.



Bio Spaceship에서 'Bio'는 비단 생체만 아니라 'Biosphere'가 될 수 있습니다. 생체 우주선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인지 모릅니다. 만약 생체 우주선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라면, 가혹한 우주 공간에서 우주선은 자체적인 자연 생태계가 될 겁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요? 가혹한 우주 공간에서 자체적인 자연 생태계가 순환할 수 있나요?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 생태계 순환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 비(非)현실은 "자연 생태계 순환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유도합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 없이, 우리는 자연 생태계가 무엇인지 얼마든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생태학자들은 자연 생태계 순환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것을 묻기 위해 생태학자들은 장거리 생체 우주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생태학자들은 보르네오 열대 밀림을 찾아가고 생태계 순환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 작은 동네 뒷산조차 자연 생태계 순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동네 뒷산을 관찰하고 생태계 순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생체 우주선 덕분에, 우리는 자연 생태계 순환을 훨씬 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장거리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非)현실입니다. SF 장르는 현실과 비(非)현실을 대조하고, 이건 보색 효과가 됩니다.



[외계 자연 생태계는 비(非)현실입니다. 비현실로서 외계 생태계 순환은 동네 뒷산 생태계를 강조합니다.]



SF 장르가 현실(보르네오 열대 밀림)과 비현실(장거리 생체 우주선)을 대조하고 현실을 부각하는 것처럼, SF 장르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상급 인공 지능)를 대조하고 인간을 부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인간의 본질을 훨씬 깊게 묻습니다. SF 소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대는 인간이다. 인간이여, 그대의 본질이 무엇인가?" SF 장르에서 비인간 존재는 인간에게 인간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주류 문학들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주류 문학들은 이런 상황을 절대 묘사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들이 현실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은 대조적인 것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는 비인간 존재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인간이 있다. 바로 불완전하고 결함 가득한 인간, 깨진 거울 속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SF 평론에서 이런 문구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비인간 존재가 인간을 부각하기 때문에, SF 평론들은 인간의 본질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SF 장르가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고 보색 효과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런 '보색 효과'는 심각한 오류와 착각에 빠질지 모릅니다. SF 장르가 비인간 존재와 인간을 대조할 때, 비인간 존재와 인간이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한 덩어리가 될지 모릅니다. 비인간 존재는 다양한 인간들을 한 덩어리로 묶을지 모릅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비인간 존재입니다. 보르네오 열대 밀림 원주민 여자는 인간입니다. 미국 공장 사장 남자는 인간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과 달리, 열대 밀림 원주민 여자와 백인 공장 사장 남자는 똑같이 인간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비인간 존재)은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이 똑같은 인간이라고 묶습니다. 상급 인공 지능 때문에, 비인간 존재가 인간을 부각하기 때문에,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은 똑같은 인간이 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나타납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을 똑같이 묶으나,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이 똑같은 인간인가요? 이게 사실인가요?


오랜 동안, 인류 문명은 가부장 제도였습니다. 21세기 초반 세계화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사회 현상입니다. 다른 가부장 제도들처럼, 자본주의는 최신 판본 가부장 제도입니다. 육아 노동 착취는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육아는 아주 원초적인 노동입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은 생명 현상과 자연 생태계 순환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하지만 만약 생명 현상이 후손을 낳지 않는다면, 생물 다양성은 사라질 테고, 자연 생태계는 순환하지 못할 겁니다. 생명 현상은 후손을 낳아야 합니다. 작은 꼴뚜기부터 거대한 세콰이어까지, 생명 현상은 후손들을 퍼뜨려야 합니다. 인간 역시 생명 현상입니다.



장거리 생체 우주선이 생명 현상인 것처럼, 인간은 생명 현상입니다. 생체 우주선이 살아있는 것처럼, 인간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존재 인간은 후손들을 퍼뜨립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기 때문에, 드루이드 역시 이것을 인정할 겁니다. 그래서 육아는 아주 원초적인 노동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 노동자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6살짜리 손녀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남한 정부는 할머니가 육아 노동자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댓가를 받아야 하나, 아무리 할머니가 손녀를 돌보고 골병이 든다고 해도, 육아 노동자 할머니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남한 정부가 자본주의 정부이기 때문에, 남한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남한 정부는 육아를 노동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남한 사회에서 육아는 노동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남한 사회는 육아를 개무시합니다. "집에서 여자는 애나 봐라!" 이건 여자들을 무시하기 위한 전형적인 비난입니다. 이 문구는 비단 여자만 아니라 육아 그 자체를 무시합니다. 육아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육아를 노동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지고 육아를 개무시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세계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인간인가요? 세계화 가부장 제도에서 원주민 여자와 서구 백인 남자가 똑같은 인간인가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세계화 자본주의는 비단 가부장 제도일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입니다. 서구 백인들은 열대 밀림들을 수탈했고, 막대한 부를 얻었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형성했습니다. 점차 자본주의는 발달하고 세계화합니다. 자본주의가 세계화하는 동안, 서구 백인들은 열대 밀림들을 계속 수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구 백인들은 온갖 인종 차별들을 저지릅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월한 백인에게 열등한 원주민을 착취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우월한 백인이 열등한 원주민을 착취하지 못한다면, 이건 백인의 권리를 침해할 겁니다. 백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서구 문명은 열대 밀림들을 수탈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구 문명은 열대 밀림들을 수탈했고, 이건 세계화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열대 밀림들을 수탈하기 위해 서구 문명은 1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고, 이건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2차 세계 대전은 가장 끔찍한 범죄입니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는 자신이 세계 대전을 저질렀다고 절대 반성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열대 지역들에게 사죄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입니다.



서구 제국주의에서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이 똑같은 인간인가요? 이게 사실인가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상급 인공 지능이 인간을 부각하기 때문에,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에게서 차별(여자와 남자, 열대 밀림과 서구 문명)은 사라지고,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 사장은 똑같은 인간이 될지 모릅니다. 비인간 존재가 인간을 훨씬 부각하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는 사라지고, 여자와 남자는 똑같은 인간이 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서 여자와 남자는 절대 똑같지 않으나, 상급 인공 지능(비인간 존재)은 여자와 남자가 똑같다고 묶습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착각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비(非)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비현실 없이, 많은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가 똑같다고 묶습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을 보세요.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어리석은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고 떠벌입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다릅니다.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인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똑같은 부류에 절대 속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부장 제도에서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인류에 속하나요? 하지만 자칭 페미들은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어리석은 인류라고 분류합니다. 가부장 제도는 여자들을 착취하나, 자칭 페미들은 이걸 개무시합니다.



자칭 페미들은 여자 착취를 개무시합니다. 이런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정말 페미니스트들인가요? 아니, 그들은 그저 가부장 제도 좀비들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부장 좀비들이 페미니스트랍시고 설치기 때문에, 성 해방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비(非)현실 없이, 이미 가부장 좀비들은 여자 착취를 개무시합니다. 만약 비(非)현실, 상급 인공 지능이 인간을 훨씬 부각한다면, 가부장 좀비들은 여자 착취를 훨씬 개무시하고 여자와 남자를 똑같이 묶을지 모릅니다.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고 인간을 부각할 수 있으나, 비인간 존재, 상급 인공 지능에게는 이런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SF 장르가 인간의 본질을 물을 때, SF 장르는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인간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 소유 권리를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개인 소유 권리를 중시하고,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보편적인 인간이 자유주의 인간이라고 세뇌합니다. 우리가 인간을 말할 때, 우리는 자유주의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간주합니다. 우리는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인간이라고 간주합니다. 만약 열대 밀림 원주민 여자가 사회주의 인간이라면, 원주민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할 겁니다. 사회주의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백인 남자 사장은 자유주의 인간이고, 원주민 여자는 사회주의 인간이나, 상급 인공 지능은 양쪽 차이를 무시하고 오직 자유주의만 인간 본질이라고 묶을지 모릅니다. 상급 인공 지능이 인간의 본질을 물을 때, 오직 자유주의 관점에서만 상급 인공 지능은 인간의 본질을 물을지 모릅니다. 솔직히 SF 장르에서 이런 착각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를 내세우나, 비인간 존재는 사회주의 인간을 개무시하고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인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세뇌하고, SF 작가들 역시 세뇌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SF 작가들은 비인간 존재들을 만듭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세뇌하고, SF 작가들 역시 세뇌를 받고, 이런 SF 작가들이 비인간 존재들을 만들기 때문에, 여러 SF 소설들에서 비인간 존재들은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떠듭니다. 이건 너무 웃기는 꼴불견입니다. 인간 외부에서 비인간 존재는 인간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이 세뇌를 받기 때문에, 오직 자유주의 관점에서만 비인간 존재는 인간을 바라봅니다. 이런 비인간 존재가 정말 '비인간' 존재인가요? 만약 자유주의 관점에서 비인간 존재가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런 존재를 '비인간' 존재라고 불러야 하나요? 여러 SF 소설들은 이런 웃기는 헛소리들을 열심히 지껄입니다.



[다행히 이런 이방인은 헛소리가 아닙니다. 이방인은 현실 속의 사회주의 인간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비인간 존재는 웃기는 헛소리들로 반드시 흘러가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자유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인간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외계인입니다. 외계인이 다른 행성 출신이기 때문에, 외계인은 이방인이 됩니다. SF 장르에서 외계인은 가장 흔한 소재, 가장 흔한 비인간 존재입니다. SF 장르에서 사회주의 인간은 이방인, 외계인, 비인간 존재가 됩니다. 이방인, 외계인, 비인간 존재로서 사회주의 인간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훨씬 깊게 물을 수 있습니다. 비록 사회주의 인간이 이방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인간이 이방인이 되기 때문에, 비(非)현실이 현실을 훨씬 부각하기 때문에, 비인간 존재가 인간을 훨씬 부각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인간은 비인간 존재가 되고, 자유주의 인간은 인간이 되고, 사회주의 인간은 자유주의 인간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물음을 바라보고 자유주의 인간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원주민 여자는 비인간 존재, 이방인,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원주민 여자가 이방인이 되기 때문에, SF 장르는 자유주의 인간이 누구인지 훨씬 부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SF 이방인에게 깊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이 말한 것처럼, 계급 차별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자는 너무 외롭습니다. 사회주의자는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가부장적인 수구 꼴통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는 미쳐버릴 것 같은 외로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들이 소리들을 버럭버럭 지르고 지랄 발광하는 동안, 사회주의자는 죽을 것 같은 충동을 붙듭니다. 사회주의자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낍니다. SF 장르는 이방인을 제시하고, 현실 속의 사회주의자는 SF 이방인에게 깊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매력적입니다.


이 게시글에서 셋째 그림은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의 열대 밀림 소녀를 보여줍니다. 이 소녀가 시장 경제를 지지할까요? 아니, 소녀는 계획 경제를 지지할 겁니다. 소녀는 시장 경제, 특히, 대규모 산업 시장 경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겁니다. 이건 미래 열대 밀림 소녀가 골수 빨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원시 공산주의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것처럼, 열대 밀림 소녀는 자유주의 인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기후 변화는 서구 백인 남자보다 열대 밀림 여자에게 훨씬 커다란 피해를 미칠 겁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지구 자연 환경이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후 변화가 지구 환경을 대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바꾸는 것처럼, <괴수 행성> 3부작에서 고지라 어스는 지구 환경을 대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바꿉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지고, 미래 열대 밀림 소녀는 새로운 자연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 시대에서 열대 밀림 소녀는 여러 가지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괴수 행성> 3부작은 얄팍한 관념론을 따르나, 열대 밀림 소녀에게는 커다란 함의가 있습니다. 열대 밀림 소녀가 일반적인 지구인이 아니기 때문에, 열대 밀림 소녀는 커다란 함의를 드러냅니다. 주류 문학들은 이런 등장인물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이런 등장인물은 SF의 매력입니다.


이렇게 비인간 존재는 지배 계급 관념을 편들거나 사회주의 인간을 비유합니다. 비인간 존재라는 소재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배 계급 관념, 자유주의가 비인간 존재, SF 장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인간 존재는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SF 평론들이 인간의 본질을 떠벌일 때, SF 팬들은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학 평론이 인간의 본질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평론이 오직 인간의 본질만 강조할 때, 성별, 인종, 계급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들은 인간의 본질을 좋아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문학 평론들은 인간의 본질을 떠들지 않습니다.



본문 위의 3번 그림에서 '여자' 드루이드는 허리를 크게 노출합니다. 왜 '여자' 드루이드가 허리를 노출하나요? 어떤 중세 판타지 설정 때문에, 여자 드루이드는 허리를 노출하는지 모릅니다. 드루이드가 자연, 야생에 가깝기 때문에, 원시 부족들이 육체를 노출하는 것처럼, 드루이드는 육체를 노출하는지 모릅니다.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성스러운 곡선을 강조하기 위해 드루이드는 허리를 노출하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드루이드 그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아무리 드루이드가 벌거벗고 여성스러운 곡선을 노출한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 중세 판타지 설정입니다.


사람들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 중세 판타지 설정을 지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세계화 가부장 제도이고, 세계화 가부장 제도 속에서 드루이드 그림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여자 드루이드 그림이 씹덕 상품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비단 위 그림만 아니라 열대 밀림 소녀 역시 씹덕 상품이 될지 모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때문에, 열대 밀림 소녀 그림과 씹덕 상품은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 가부장 제도를 외면하고 오직 부차적인 문제(씹덕 상품)만 지적합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칭 페미들은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제도, 자본주의가 경제 현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비판이 계급 투쟁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자칭 페미들은 경제 현상과 계급 투쟁을 외면하고 여자 착취를 개무시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떠벌입니다. 자칭 페미들은 여자 착취를 개무시하고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부르짖습니다. 문학 평론이 오직 인간의 본질만 강조할 때, 성별, 인종, 계급은 사라집니다. 아무 이유 없이, 문학 평론들은 인간의 본질을 떠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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