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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데스티니즈>와 여자 약초 치유사들 본문

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데스티니즈>와 여자 약초 치유사들

OneTiger 2024. 7. 14. 09:35

[SF/판타지에서 여자 약초 치유사는 전형(스테레오타입)인지 모릅니다.]



필라는 꿀벌에 대한 지식이 무궁무진했다. "5월의 벌 떼는 서늘한 만큼 좋은 거야. 벌통에 들어있는 벌들 모두가 한 몸이지." 필라는 토비를 축축한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버섯이 자라는 곳을 보여줬다. 필라는 벌과 버섯이 연인 관계라고 말했다. 식용 버섯들, 약용 버섯들, 통찰력에 좋은 버섯들이 있었다. 때때로, 버섯들은 어떤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마음조차 재충전시키며 요양 중인 환자들을 편안하게 했다. 필라는 세 종류의 버섯들이 있다고 말했다. 말불버섯은 독이 없으니까 괜찮았다. 사일로사이빈이라는 멕시코 버섯은 독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마가렛 앳우드는 <홍수의 해>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이 환경 아포칼립스는 두 주인공을 보여줍니다. 두 주인공 중에서 하나는 토비아스, 이른바 토비입니다. 토비는 신의 정원사에 속합니다. 신의 정원사는 생태주의 생존자 종교 단체입니다. <홍수의 해>가 환경 오염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연 단체로서, 이 소설과 신의 정원사는 어울립니다. 이 단체에서 토비는 여러 잡일들을 담당합니다. 그러는 동안, 이 주인공은 필라와 만납니다. 토비는 이른바 이브에 속합니다. 정원사에서 아담은 대표자(지도자)입니다. 이브들은 간부들에 가깝습니다. 필라는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필라는 약초 치유사입니다. 이 치유사는 꿀벌들을 치고, 여러 버섯들을 키우고, 약초들에 친숙합니다. 필라가 가르치기 때문에, 토비는 약초 치유사가 됩니다. (토비가 약초 치유사이기 때문에, 영혼을 만나기 위해 이 주인공은 환각을 겪습니다.) 필라처럼, 토비는 비단 약초 치유사만 아니라 이브(여자)이기도 합니다. <홍수의 해>는 약초 치유사가 여자(이브)라고 보여줍니다.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이야기들 역시 약초 치유사가 여자라고 묘사합니다. 아마도 이건 전형(스테레오타입)인지 모릅니다. <라드고스트의 숲>, 이 보드 게임에서 다레나 할머니는 약초 치유사입니다.

 

<홍수의 숲>의 필라, 토비처럼, <라드고스트의 숲>에서 약초 치유사는 여자(할머니)입니다. <테인티드 그레일>, 이 보드 게임은 다크 판타지입니다. 아발론 왕국은 멸망하는 중입니다. 비록 괴물들이 마을을 둘러싼다고 해도, 더 이상, 수호 조각상들은 보호막들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이 조각상들을 위해 주인공들은 머나먼 여정을 떠납니다. 이 주인공들 중에서 에일리아(아일리아)는 약초 치유사입니다. 이 치유사는 여자입니다. <라드고스트의 숲>의 다레나처럼, <테인티드 그레일>에서 약초 치유사는 여자입니다. <데스티니즈>는 비슷합니다. 이 보드 게임은 여자 약초 치유사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링크)은 세 약초 치유사들을 보여줍니다. 이 약초 치유사들 역시 여자들입니다. <홍수의 해>부터 이 그림까지, 여러 사례들은 약초 치유사들이 여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약초 치유사가 여자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 약초 치유사가 필연적인 설정, 절대적인 규칙인가요? 언제나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오직 이 치유사들만 이야기하나요? 만약 사이언스 판타지가 약초 치유사를 이야기한다면, 필연적으로, 이 등장인물이 여자가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SF/판타지에서 여자 약초 치유사는 절대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남자들은 이 치유사들이 될 수 있습니다.

 

SF/판타지는 모든 약초 치유사가 여자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필라, 토비, 다레나, 에일리아와 달리, 어떤 치유사들은 남자들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필라부터 에일리아까지, 여러 사례들이 여자 약초 치유사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건 또 다른 문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약초 치유사는 '돌봄 노동자'에 속합니다. 약초 치유사는 환자들을 돌봅니다. 필라, 토비, 다레나, 에일리아처럼, <데스티니즈>처럼, 세 약초 치유사들 그림처럼, 여러 약초 치유사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이건 여자들이 돌봄 노동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여자=돌봄 노동자'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라,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라, 왜 '여자=돌봄 노동자'가 심각한 문제인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는 공공 육아, 돌봄 노동 사회화를 부정합니다. 자본주의는 공공화, 사회화보다 개인화, 사유화(민영화)를 추구합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이념이 개인적인 소유 권리에게 가장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이 경제는 공공화, 사회화를 싫어합니다. 어휴~, 심지어 신자유주의는 사회조차 부정합니다. 자본주의가 공공화, 사회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 경제에서 공공 육아, 돌봄 노동 사회화는 주류가 되지 못합니다.

 

공공 육아, 돌봄 노동 사회화가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개인적인 노동이 됩니다. 특히, 육아, 돌봄 노동은 여자의 개인적인 노동이 됩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가장 커다란 차이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임신, 출산, 수유일 겁니다. 여자는 임신할 수 있고, 출산할 수 있고, 수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여자와 남자가 성교한다고 해도, 오직 여자만 임신합니다. 심지어 오직 여자만 월경조차 거칩니다. 남자는 월경하지 않고, 임신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고, 수유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이건 불평등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육아를 담당한다고 떠벌입니다.



여자가 육아를 담당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여자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여자가 머물기 때문에, 여자는 비단 육아만 아니라 가사 역시 담당합니다. 여자는 비단 가사만 아니라 돌봄 역시 담당합니다. 아기와 환자는 비슷합니다. 아기는 돌봄 노동을 요구합니다. 아기처럼, 환자는 돌봄 노동을 요구합니다. 육아는 돌봄 노동에 속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육아가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기 때문에, 돌봄은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 됩니다. 하지만, 육아는 이윤을 축적하지 않습니다. 육아가 이윤을 축적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육아를 너무 무시합니다. 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대답은 많은 돈들입니다. 자본주의에게 이건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육아가 이윤을 축적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 노동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본론>조차 육아, 가사, 돌봄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산당 선언>이 중산층 가족을 비판한다고 해도, 이윤 축적을 분석하기 위해 <자본론>은 육아, 가사, 돌봄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경제학 서적이 돌봄을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자본주의에게 이건 핵심 노동, 1등 노동이 아닙니다. 이건 주변 노동, 2등 노동입니다. 돌봄이 주변 노동, 2등 노동이기 때문에, 으음…, 여자는 주변 시민, 2등 시민이 됩니다.



[자본주의(가부장 제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약초 치유사를 해석합니다.]



여자가 주변 시민, 2등 시민이 되기 때문에, 이건 성 차별입니다. 자본주의는 성 차별입니다. 이 경제가 여자를 차별하기 때문에, 이 경제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끔찍한 성 폭력들을 유발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부장 제도는 인류 문명을 지배합니다. 이 제도가 인류 문명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끔찍한 성 폭력들은 발생합니다. 만약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폭력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끔찍한 성 폭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인류 문명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페미니즘과 이 경제는 공존하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페미니즘과 자본주의는 대립합니다.

 

이건 오직 자본주의만 여자들을 차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경제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가부장 편견들은 너무 기나긴 역사였습니다. 거대 문명의 역사는 가부장 편견들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는 야만적인 역사입니다.) 아무리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이 악랄한 경제처럼, 가부장 편견들에서 공산주의는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 편견들은 공산주의를 구속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가부장 편견들이 공산주의를 구속했다고 증명합니다. 심지어 공산주의조차 가부장 편견들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 사례가 증명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보다 가부장 편견들은 너무 기나긴 역사입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진다면, 페미니즘 사회가 나타날 수 있나요?



흐음, 글쎄요. 아무리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페미니즘은 또 다른 난관들에 부딪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가부장 편견들은 인류 문명을 구속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좌익들이 (가부장 편견들을 외면하고) 오직 자본주의만 비판한다면, 성 해방 사회를 이룩하기는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분명히, 이 경제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성 해방 사회는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페미니즘과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이 경제와 가부장 편견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이 경제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악랄한 편견들에서 그들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편견들을 적용하는지 모릅니다. 여자 약초 치유사는 여자가 돌봄 노동자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돌봄 노동자이기 때문에, 여자는 주변 시민, 2등 시민이 됩니다. 소설 독자들이 필라, 토비를 바라볼 때, 게임 플레이어들이 다레나, 아일리아, <데스티니즈>를 바라볼 때, 어떤 사람들이 세 약초 치유사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가부장 편견들을 적용하는지 모릅니다. 이건 여자 약초 치유사들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필라, 토비가 잘못된 등장인물인가요?



<홍수의 해>가 잘못된 소설인가요? 마가렛 앳우드가 잘못된 소설을 썼나요? 필라, 토비처럼, 다레나, 에일리아가 잘못된 등장인물인가요? 약초 치유사가 여자이기 때문에, <데스티니즈>가 잘못된 보드 게임인가요? <데스티니즈>처럼, 세 약초 치유사들이 잘못된 그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가로서, 마가렛 앳우드에게는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라드고스트의 숲>, <테인티드 그레일>은 창작(표현)의 자유입니다. <데스티니즈>, 세 치유사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여자 치유사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이 경제가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 내부에서 소설 독자들, 게임 플레이어들은 필라, 토비를 해석하고, 다레나를 해석하고, 에일리아를 해석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은 세 약초 치유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문화·예술에게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초월적인 시간, 초월적인 공간에서 문화·예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테인티드 그레일>이 다크 판타지라고 해도, 현실에서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이 <테인티드 그레일>을 좋아한다고 해도, 판타지 세계에서 이 게임 플레이어들은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이 <테인티드 그레일>을 좋아한다고 해도, 판타지 세계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게임 플레이어들은 살아갈 겁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은 이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비단 <테인티드 그레일>만 아니라 <홍수의 해>, <라드고스트의 숲>, <데스티니즈>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비단 이 SF 소설, 판타지 게임들만 아니라 세 여자 치유사들(그림)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그 어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필멸자들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필멸자는 늙습니다. 필멸자는 병듭니다.

 

필멸자들로서, 아주 많은 사람들은 늙고 병듭니다. 인류 사회에서 돌봄은 아주 중요한 노동입니다. 돌봄 노동들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재화들은 이 노동들로 흘러야 합니다. 돌봄 노동들에게는 사회적인 재화들을 요구하기 위한 명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 노동들에게 이 명분이 있다고 해도, 자본주의에서 이 노동들은 주변 노동들, 2등 노동들이 됩니다. 돌봄 노동들이 주변 노동들, 2등 노동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재화들은 이 노동들로 흐르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으로서, 자본가 계급은 이 재화들을 소유합니다. 이 재화들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여자)들은 타당한 댓가들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담당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타당한 댓가들을 받지 못합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합니다. 노골적으로, 코비드-19는 이 착취를 보여줬습니다. 이 전염병 재앙은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한다고 증명했습니다. 코비드-19 동안, 여러 언론 매체들은 돌봄 노동들이 너무 취약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가부장 제도는 비단 문화적인 성 차별만 아니라 경제적인 성 착취이기도 합니다. 가부장 제도가 경제적인 착취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에게는 비단 문화적인 대안만 아니라 경제적인 대안 역시 필요합니다. 문화적인 대안은 100%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오직 문화적인 대안만 내세운다면, 만약 이 이념이 오직 이 대안에만 집착한다면, 가부장 제도를 타파하기는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페미니즘은 비단 문화적인 대안만 아니라 경제적인 대안 역시 고민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돌봄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대안을 고민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이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가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21세기 초반, 세계화 자본주의는 너무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어휴~, 이 지배적인 경제를 비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록 이게 쉽지 않다고 해도, 페미니즘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풍요로운 자연은 약초들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여자와 자연은 비슷합니다.]



많은 제약 상품들은 자연을 언급합니다. 이 상품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자연에서 약초들은 비롯합니다. 만약 자연이 풍요롭지 않다면, 약초들을 채집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약초 치유사는 자연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관계처럼, 신의 정원사, 생태주의와 약초 치유사, 필라는 어울립니다.) 약초 치유사가 자연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필라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 치유사는 '여자+자연'입니다. 필라는 여자와 자연을 결합합니다. <라드고스트의 숲>의 다레나, <테인티드 그레일>의 에일리아, <데스티니즈>의 약초 치유사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등장인물들에게 여자+자연은 교집합입니다.

 

어머니 자연, 대지 모신, 자연의 여신은 여자와 자연을 결합합니다. 자연의 여신은 '여자+자연'입니다. 자연의 여신과 에일리아에게는 커다란 교집합(여자+자연)이 있습니다. 이 커다란 교집합에게 아무 문제가 없나요? 그건 아닙니다. 왜 자연의 여신이 여자와 자연을 결합하나요? 이 여신은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연은 번성합니다. 생명체들이 세대들을 이어가기 때문에, 자연은 번성합니다. 자연은 생명체들을 낳습니다. 자연처럼, 여자는 생명체(아기)를 낳습니다. 그래서 여자와 자연은 비슷합니다. 자연의 여신은 여자와 임신, 출산, 수유를 연결합니다.



어머니 자연이 여자와 출산을 연결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은 이 여신을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자연과 여자 약초 치유사가 커다란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이 여신처럼, 가부장 편견들은 여자 약초 치유사를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토비가 환각을 봤을 때, 이 치유사는 엄마 돼지, 새끼 돼지들을 만났습니다. 이 돼지들은 임신이 여자의 가장 커다란 특성이라고 뜻하는지 모릅니다. 초월적인 시간, 공간보다 자본주의(가부장 제도)에서 소설 독자들은 토비를 해석합니다. 이 구조에서 소설 독자들이 토비를 해석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들은 이 치유사를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여자 약초 치유사는 '여자=돌봄 노동자'를 뜻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치유사와 어머니 자연에게는 커다란 교집합이 있습니다.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와 약초 치유사가 어울린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가부장 편견들은 이 감성을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여자와 약초 치유사가 어울린다면, 이건 가부장 편견들보다 에코 페미니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풍요로운 자연은 소중한 약초들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연 환경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는 환경 파괴입니다.



자본주의는 비단 가부장 제도만 아니라 환경 파괴이기도 합니다. 이 경제에게 많은 돈들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친환경 기술들조차 상품들이 됩니다. 그린피스는 탄소 채집 기술들이 그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이 환경 운동이 비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친환경 기술들은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타락할 뿐입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이 악랄한 경제를 타파한다면, 페미니즘은 환경 운동을 도울 겁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여자, 자연을 주장하고 가부장 제도, 환경 오염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 게임 <데스티니즈> 사진 출처:
http://www.kickstarter.com/projects/destinies/time-of-legends-destinies

※ 사진 <Herbal Plants …> 출처: Melike Benli,
http://www.pexels.com/photo/herbal-plants-in-close-up-photography-844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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