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재앙 앞에서 문학 덕질이 웃는 이유 본문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 한때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떠들었습니다. 사실 전설과 레전드는 똑같은 뜻입니다. 하지만 전설은 한국어이고, 레전드는 영어입니다.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는 부정과 외국어를 이용해 똑같은 뜻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농담은 어떤 대상이 훨씬 대단하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동물 변신이나 생체 우주선이나 생체 개조를 굉장히 강렬하게 묘사해. 이 분야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야." 이 문구는 부정을 이용해 똑같은 뜻(전설과 레전드)을 두 번 반복하고, 그래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훨씬 대단하고 그뤠잇한 작가가 됩니다.
비록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는 일반적인 표현 방법이 아니나, 그것 때문에 이 문구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설이 뭔가 대단한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는 '전설'을 제목에 집어넣었을 겁니다. 소설 주인공은 최후의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의 대부분 인간들은 흡혈귀가 되었고, 소설 주인공은 최후의 인간입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전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소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소설 속에서 최후의 생존자는 별로 전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혼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설 주인공은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아주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합니다. 사무치는 고독 때문에 매일 소설 주인공은 몸부림칩니다.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매일 밤마다 소설 주인공은 지긋지긋한 흡혈귀 무리를 상대해야 합니다. 날이 밝은 이후, 소설 주인공은 사방을 돌아다니고 잠자는 흡혈귀들을 처치합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소설 주인공은 고독을 씹고 외로움에 몸부림칩니다. 소설 주인공이 좋든 싫든, 소설 주인공은 계속 이런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일상은 별로 멋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상은 별로 전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설이다'라는 문구는 다소 모순입니다. '나는 전설이다'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모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약 독자가 제목을 보고 뭔가 멋진 내용을 기대한다면, 독자는 실망할 겁니다. 제목과 달리, 소설 주인공은 별로 전설이 아닙니다.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라는 농담은 소설 주인공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나는 전설이다'는 멋진 제목이 됩니다. 소설 주인공이 최악의 상황에 빠졌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이 아주 극심한 고독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전설은 소설 주인공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전설이 될 수 있습니다. 생체 개조라는 강렬한 소재와 천재적인 필력 덕분에 옥타비아 버틀러는 전설입니다. 하지만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최후의 생존자는 전설이 아닙니다. 소설 제목은 전설을 집어넣었으나, 최후의 생존자는 전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최후의 생존자와 전설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이 괴리 때문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만약 소설 제목이 <최후의 생존자>였다면, 이 제목은 훨씬 정직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직한 제목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이 제목은 밋밋합니다.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나, 이것 때문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문학은 역설과 괴리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모든 것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사물이나 어떤 대상을 정직하게 (더 정확히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기 원하나, 사실주의는 문학 표현 방법의 전부가 아닙니다. (심지어 사실주의조차 역설과 괴리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모순이 있고, 문학은 모순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은 얼마나 자본주의 사회가 폭력인지 사실적으로 그립니다. 여기에는 농담이나 웃음이 없습니다. <정글>은 자본주의가 폭력적이라고 고발해야 하고, 폭력 앞에서 농담과 웃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필립 딕이 자본주의를 이야기한다면, 필립 딕은 온갖 역설들과 농담들과 웃음들을 집어넣을 겁니다. 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광고 로봇이 우주 끝까지 날아간다면, 이건 가장 거대한 농담일지 모릅니다. 이런 농담 덕분에, 이런 역설 덕분에, 광고 로봇이 사방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독자는 얼마나 자본주의가 심각하고 비인간적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역설, 농담, 풍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풍자보다 사실주의가 훨씬 나은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풍자를 좋아할지 모르고, 이웃집 영희는 사실주의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풍자와 사실주의 사이에서 우열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문학 표현 방법들 사이에 우월과 열등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풍자가 비극에 농담을 덧붙인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비극은 비극이어야 합니다. 비극에는 웃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학이 비극을 다르게 강조하고 싶다고 해도, 비극은 웃음과 멀어져야 합니다. 폭력, 죽음, 학살, 오염은 끔찍합니다. 공장 기계가 아동 노동자의 머리를 짓뭉갤 때, 이건 끔찍한 비극이고 폭력이고 죽음입니다. 죽은 아이 앞에서 누가 감히 농담할 수 있나요? 하지만 문학적인 풍자들은 농담합니다. 공장 기계가 아이를 짓뭉갠다고 해도,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적인 풍자들은 농담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왜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적인 풍자 방법들이 농담하는지 비판할 겁니다.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은 울어야 합니다. 소설 <정글>은 사실주의적으로 눈물을 흘릴 겁니다. 하지만 문학적인 풍자들은 웃을 겁니다. 왜 문학적인 풍자들이 웃나요? 아무리 역설과 괴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이 웃을 수 있나요? 이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닌가요? 하지만 문학적인 풍자 방법들에게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적인 풍자 방법들이 웃는 이유는 현실이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하나, 현실은 너무 괴롭습니다. 아동 노동자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아동 노동자는 공장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고 비정규직 양산을 주장합니다. 가난한 아이가 굶주린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아이보다 시장의 자유입니다. 거리에서 가난한 아이가 비참하게 얼어죽거나 병든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아이보다 시장의 자유입니다. 뒷골목에서 깡패들이 가난한 소녀를 폭행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가난한 소녀보다 시장의 자유입니다. 뒷동네 할아버지부터 대통령까지, 모두가 시장의 자유를 중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소녀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가난한 소녀는 반드시 공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가난한 소녀는 공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공장 간부가 소녀를 성 폭행하든, 공장 기계가 소녀의 머리를 짓뭉개든, 소녀는 아동 노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사람들은 노동력들을 팔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본가 계급에게 막대한 돈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노동력들을 팔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소녀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공장 사장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공장 기계가 소녀의 머리를 짓뭉개고, 두개골을 부서뜨리고, 질척거리는 뇌수를 흘리고, 붉은 피를 뿌린다고 해도, 소녀는 공장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이런 것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녀는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소녀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소녀는 자신의 작은 머리를 육중하고 강력한 금속 기계에게 내밀어야 합니다. 공장 기계가 소녀의 머리를 부서뜨린다고 해도, 소녀는 시장의 자유를 따라야 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 폭력, 폭력, 폭력이 있습니다. 가난한 소녀는 절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녀가 몸부림친다고 해도, 소녀의 머리는 박살이 나야 합니다. 소녀는 질척거리는 뇌수와 붉은 피를 공장 바닥에 뿌려야 합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이런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남긴 폐허에서 언제나 사회주의는 출발해야 합니다. 순수하고 초문명적인 시공간에서 사회주의가 출발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는 꽃길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폐허에서 언제나 사회주의는 출발해야 하고, 그래서 사회주의는 비참하게 실패합니다.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막강한 적수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세계화는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세계 대전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우주선과 테라포밍은 없었습니다. 왜 사이언티픽 로망스와 근대적인 진보가 동창생인가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는 몰아내고 싶어하나, 안타깝게도 인류 문명에서 그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막강한 적수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실패합니다. 사회주의가 비참하게 실패할 때, 자본주의는 맹렬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왜곡하고, 온갖 거짓말들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세뇌시킵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 역시 세뇌와 거짓말에 동조합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이오시프 스탈린과 박정희가 똑같이 독재자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오시프 스탈린과 박정희가 똑같은 독재자인가요? 서구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처참하게 타락해야 했습니다. 반면, 남한 자본주의는 열심히 미국 자본주의에 충성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박정희가 똑같이 독재자라고 해도, 양쪽에는 커다란 차이(흐름과 과정)가 있습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박정희가 모두 독재자이기 때문에,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오직 결과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흐름과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우리가 고생대와 신생대를 구분합니까? 흐름과 과정이 정말 중요하지 않다면, 왜 우리가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구분합니까? 머릿속에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은 흐름과 과정을 개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똑똑하신 진보 지식인들의 대가리들 속에는 제정신이 박히지 않은 것 같고, 그들은 열심히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됩니다. 이건 우리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스탈린은 강력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탈린을 비판한다고 해도, 우리는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흐름, 과정, 역사, 원인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이런 것들을 파악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이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헛소리입니다. 계급 투쟁이 장난입니까? 계급 투쟁이 반드시 깨끗하고 티 하나 없이 맑아야 하나요? 약자, 피지배 계급은 천사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폭력이고, 자본주의 반대 운동은 피투성이 저항입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절대 이걸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오직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에, 약자들은 쉽게 저항하지 못합니다. 약자들은 끊임없이 몰락하고 타락합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이걸 견디지 못합니다. 약자들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질 때,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당장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이런 진보 지식인들이 도덕과 윤리를 떠들 때, 민중들은 그걸 믿고, 약자들을 외면하고, 지배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에는 강력한 힘이 있으나, 사회주의 혁명은 당장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찾아오기 전까지, 공장 기계는 계속 소녀의 머리를 짓뭉갤 겁니다. 문학은 이런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문학은 폭력, 폭력, 폭력, 폭력, 끊임없는 폭력을 바라봐야 합니다.
만약 문학이 반드시 이 폭력을 정직하게 표현해야 한다면, 문학은 미쳐버릴지 모릅니다. 언제나 문학이 폭력을 인식할 수 있나요? 매초 매분마다 언제나 문학이 폭력을 견딜 수 있나요? 누가 그럴 수 있나요? 문학이 언제나 자본주의를 정직하게 표현해야 한다면, 문학은 끊임없이 폭력을 직접 바라봐야 할 겁니다. 문학은 미쳐버릴 겁니다. 여기에는 농담과 웃음이 필요합니다. 죽은 아이 앞에서 문학은 농담하고 웃어야 합니다. 그때 문학은 미치지 않을 겁니다. 그때 문학은 현실을 좀 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잔인하게 죽는다고 해도, 문학은 웃습니다. 어떤 시 구절처럼, 살아가기 위해 문학은 그저 웃을 뿐입니다. 이웃집 영희가 풍자와 해학과 역설적인 농담을 싫어한다고 해도,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문학은 웃어야 합니다.
문학에서 내용과 표현 방법은 대조적일 수 있습니다. 내용과 표현 방법이 대조적일 때,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역설적인 표현 방법은 내용을 훨씬 인상적으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소설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소설 화자를 괴롭히는 것처럼, 괴팍한 심통은 설레는 애정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대조적인 표현 방법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 자체로서 인생은 모순인지 모릅니다. 탄생은 죽음에 수렴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아기는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우리가 아기를 축복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비단 아기만 아니라 우주 전체는 소멸로 향해야 합니다.
우주는 엔트로피를 부정하지 못하고 궁극적인 평행 상태에 도달해야 합니다. 물론 생명 현상은 엔트로피를 늦출 수 있어요. 수많은 평행 우주들이 있다면, 심지어 생명 현상이 평행 우주들을 넘나들 수 있다면, 궁극적인 소멸은 없을지 모르죠. 누가 그걸 알 수 있나요? 궁극적인 소멸이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하지만 정말 궁극적인 소멸이 있다고 해도, 아기는 살아야 합니다. 우주 전체가 궁극적인 평행 상태에 다다른다고 해도, 인생이 죽음에 수렴한다고 해도, 죽기 전까지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우리가 오직 죽음만 인식한다면, 인생을 살아가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오직 죽음만을 인식한다고 해도, 죽음은 달아나지 않아요. 인생이 죽음에 귀결한다고 해도, 이건 우리가 반드시 오직 죽음만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명상록>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웃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명상록>에 전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죽기 전까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고 웃어야 할 겁니다. 문학은 모순적인 인생을 반영하고, 문학에서 내용과 표현 방법은 대조적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 앞에서 문학은 웃을 수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은 웃습니다. 사람들이 문학을 비평하고 문학을 덕질할 때, 사람들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문학이 어마어마한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독자는 그게 재미있다고 웃을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무자비하게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고 해도, 독자는 웃어야 할지 모릅니다. 좌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폭력적인 비극들이 있다고 해도, 좌파들은 오직 비극만을 인식해서는 안 될 겁니다. 분명히 좌파들은 폭력적인 비극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언제나 좌파들이 오직 폭력적인 비극만을 인식한다면, 좌파들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미쳐버릴 겁니다. 누가 오직 비극만으로 인생을 점철할 수 있습니까. 좌파들이 오직 비극만 인식한다면, 좌파들은 정신병에 걸리고 미쳐버릴 겁니다. 이 세상에서 좌파는 남아나지 않을 거에요. 그래서 좌파들은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웃음은 박장대소보다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웃음은 현실을 인식합니다. 쓰라린 현실에서 이 웃음은 비롯합니다. 그래서 이 웃음은 깨어있는 웃음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각성과 자각은 눈물보다 웃음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