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ura'와 생체 비행선, 거대 서사
이른바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은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고 새로운 생명체들을 만듭니다. 새로운 생명체들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은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이 관점에서 진화 시뮬레이션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적어도 진화 시뮬레이션과 사이언스 픽션은 비슷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非)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이 자연어를 구사하고 인간과 대화한다면,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일 겁니다. 현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현실에서 인공 지능은 특이점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역시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은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드나, 현실에서 이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구 생물권 진화 역사는 이 생명체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과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비현실 설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오직 비현실 설정만 SF 특성이라면, 중세 판타지가 비현실 설정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사이언스 픽션일 겁니다.
중세 판타지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아무리 SF 장르가 유동적인 흐름이라고 해도, 아무리 중세 판타지에서 불사조가 훨훨 날아다니고, 현실에서 불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사조는 SF 설정이 아닙니다. 불사조가 근대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진화 시뮬레이션은 진화 이론과 유전학에게 기반합니다. 진화 이론과 유전학은 근대 과학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기술적인 특이점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첨단 과학입니다. 19세기 근대화 이후, 근대 과학이 나타난 이후, 진화 이론과 인공 지능 공학은 나타났습니다. 반면, 불사조는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전에, 인류 문화는 진화 이론과 기술적인 특이점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전에, 이미 인류 문화는 불사조를 상상했습니다. 불사조는 신화와 전설과 민담에 속하고, 근대 과학이 나타나기 전에, 많은 인류 문화들은 신화들과 전설들과 민담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신화들과 전설들과 민담들은 비현실 설정들을 묘사하나, 이 비현실 설정들은 근대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근대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들은 진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유전자 조작 작물들이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한다면, 인류는 풍요롭게 먹을 겁니다.
인류가 풍요롭게 먹고 살기 때문에, 인구는 늘어날 테고, 많은 인구는 많은 작업들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많은 작업들을 처리하기 때문에, 문명은 부흥할 겁니다. 이건 진보입니다. 유전 공학은 진보를 촉진합니다. 만약 상급 인공 지능들과 인간형 로봇들이 대부분 노동들을 담당한다면, 인류는 노동 해방을 이룩할지 모릅니다. 노동 해방은 진보입니다. 19세기 근대 사회가 나타났을 때, 진보는 노동 해방을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유전 공학과 기술적인 특이점은 진보로 이어집니다. 반면, 불사조가 진보로 이어지나요? 아니, 고대 사람들은 진보를 신화들과 전설들과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진보는 근대 개념입니다. 근대 사회에서 진보라는 개념이 비롯했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은 진보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이 유전 공학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은 진보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상급 인공 지능이 노동 해방을 이룩할지 모르기 때문에, 상급 인공 지능은 진보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신화는 진보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사조는 진화 시뮬레이션, 상급 인공 지능과 이어지지 못합니다. 불사조보다 진화 시뮬레이션과 상급 인공 지능은 비슷합니다. 상급 인공 지능이 SF 설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진화 역사는 SF 설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SF 팬들은 이 분류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이 SF 장르에 속하지 못한다고 반대할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이 SF 장르를 분류할 때, 그들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SF 장르가 진화 시뮬레이션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은 SF 장르에 속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진화 시뮬레이션이 SF 장르에 속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진화 시뮬레이션과 사이언스 픽션은 아주 커다란 교집합, 근본적인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복제 공룡 사파리를 묘사한다면, 이건 SF 소설일 겁니다.
복제 공룡 사파리는 진화 이론과 유전 공학에게 기반합니다. 유전 공학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복제하고 복원하기 때문에, 이건 바이오펑크입니다. 복제 공룡 사파리처럼, 진화 시뮬레이션은 진화 이론과 유전학에게 기반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공룡 사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역시 비현실 설정(새로운 생명체들)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복제 공룡 사파리와 진화 시뮬레이션은 비슷합니다. 복제 공룡 사파리와 달리, 비록 진화 시뮬레이션이 SF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복제 공룡 사파리와 진화 시뮬레이션은 아주 근본적인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두 가지가 근본적인 교집합을 형성하고, 복제 공룡 사파리가 바이오펑크 설정이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은 바이오펑크에 속합니다. 적어도 진화 시뮬레이션과 바이오펑크 설정은 비슷합니다. 바이오펑크는 생체 비행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유전 공학이 거대 부유 생명체를 만든다면, 거대 부유 생명체는 선체를 매달고 비행선이 될 수 있습니다. 거대 부유 생명체는 스스로 추진하거나, 기계 엔진은 프로펠러를 돌리고 비행선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생체 비행선이 바이오펑크에 속하고, 바이오펑크와 진화 시뮬레이션이 비슷하기 때문에, 생체 비행선과 진화 시뮬레이션은 비슷합니다.
만약 SF 소설에서 기계 공중 전함과 생체 비행선이 포탄들을 날리고 싸운다면, 이 장면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강조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비행선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행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SF 장르에서조차 생체 비행선보다 기계 공중 전함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바이오펑크는 비행선이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비행선이 살아있을 수 있지?" 일반적으로 비행선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SF 팬들은 어떻게 비행선이 살아있는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 반문은 '살아있다'라는 개념을 새롭게 고찰합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비행선이 살아있을 수 있지? 이건 말이 안 돼!" 이 물음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비행선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행선이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체 비행선을 분석하기 위해 SF 팬들은 '살아있음'을 정의해야 합니다. SF 팬들이 '살아있음'을 정의한 이후, 그들은 비행선이 살아있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SF 팬들이 '살아있음'을 정의해야 하기 때문에, 생체 비행선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강조합니다. 반면, 장수 거북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은 생명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장수 거북이 살아있을 수 있지? 이건 말이 안 돼!"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은 살아있고, 이건 아주 타당한 사실입니다. 살아있는 장수 거북이 아주 타당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건 살아있는 생명체를 새롭게 고찰하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과 달리, 생체 비행선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새롭게 고찰하고, SF 팬들은 '살아있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반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체 비행선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실에서 생체 비행선은 존재하지 않으나, 생체 비행선은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관점에서 바이오펑크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바라봅니다.
SF 소설에서 생체 비행선이 기계 공중 전함과 싸우는 동안, 생체 비행선은 포탄들을 날리기보다 생체 병기들을 날릴지 모릅니다. 생체 비행선이 유전 공학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생체 비행선은 개조 동물 병기들이나 생체 병기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생체 비행선은 화약을 터뜨리고 포탄을 날리기보다 강력한 인공 근육을 움직이고 날카로운 가시를 뱉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생체 비행선은 개조 맹금들을 날릴 수 있습니다. 개조 맹금들은 공중 전함으로 날아가고 승무원들을 열심히 할퀼 겁니다. 개조 맹금들이 승무원들을 할퀴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사기를 잃고, 공중 전함은 후퇴할지 모릅니다.
생체 비행선이 인공 근육을 움직이고 날카로운 가시를 뱉든, 개조 맹금들을 날리든, 두 가지는 생체 병기에 속합니다. 현실에서 이 생체 병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생체 병기 역시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현실에서 개조 맹금 병기가 존재하지 않고, 이게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이건 '살아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살아있음'이 무엇을 가리키나요? 일반적으로 '살아있음'이 무엇인가요? 가장 흔한 대답들 중에서 하나는 '육체'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체에게는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생명체는 영양분을 섭취합니다. 생명체는 먹습니다.
생명체는 먹고 삽니다. 이른바 먹고 살기는 생명체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구 생물권에서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먹고 삽니다. 작은 새싹부터 대왕 오징어까지, 크고 작은 생명체들은 영양분들을 섭취하고 육체들을 유지합니다. 사과 나무와 장수 거북과 꿀버섯처럼, 생명체가 생산자이든, 소비자이든, 분해자이든, 생명체는 먹고 삽니다. 생명체에게 영양분 섭취, 먹고 살기는 가장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인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역시 생명체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들 때,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고 푸념합니다. "아놔, 먹고 살기는 조카 힘들어."
사람들이 먹고 살기를 운운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는 가장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이건 그저 문학적인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의식주는 필수적인 재화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의식주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의복이 중요한가요? 아니, 의복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옷을 입고 육체를 보호할 수 있으나, 비록 인간에게 옷이 없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주거지는 어떤가요? 주거지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인간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나, 비록 인간에게 보금자리가 없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반면, 먹거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쇠약해지고 굶어죽을 겁니다. 만약 기후와 환경이 나쁘지 않다면, 비록 인간에게 옷과 보금자리가 없다고 해도,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은 육체를 유지할 수 있으나, 아무리 기후와 환경이 좋다고 해도, 만약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쇠약해지고 굶어죽을 겁니다. 아무리 의식주가 필수적인 재화들을 가리킨다고 해도, 의(衣)과 주(住)보다 식(食)은 훨씬 근본적입니다. 우리 인간이 먹고, 영양분을 얻고, 육체를 유지하기 때문에, 먹거리는 우리 인간을 구성합니다. 식(食), 먹거리는 근본입니다.
SF 장르에서 공중 전함에게 육체가 없기 때문에, 공중 전함은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관실에서 승무원들이 많은 석탄들을 태운다고 해도, 공중 전함은 석탄들을 소화하지 않고 영양분을 얻지 않습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은 공중 함선이 살아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반면, 생체 비행선(링크)은 영양분을 얻고 육체를 유지합니다. 만약 생체 비행선이 동물보다 식물에 가깝다면, 생체 비행선은 영양분을 스스로 생산할 겁니다. 생체 비행선이 생산자이든 소비자이든,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생체 비행선은 영양분을 얻습니다. 사과 나무와 장수 거북과 인간처럼, 생체 비행선은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기계 공중 전함과 생체 비행선에게 먹고 살기, 육체적인 존재, '살아있음'은 가장 커다란 차이입니다. 만약 SF 팬들이 기계 공중 전함보다 생체 비행선이 매력적이라고 느낀다면, 이 차이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생체 비행선이 육체적인 존재이고, SF 팬들 역시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SF 팬들은 기계 공중 전함보다 생체 비행선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사과 나무와 장수 거북과 꿀버섯과 인간과 생체 비행선이 영양분을 필연적으로 섭취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는 아주 보편적입니다. 먹고 살기는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지구 생물권에서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영양분들을 얻습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이 영양분들을 얻기 때문에, 생명체들은 먹이 그물망, 생태계를 구성합니다. 먹고 살기는 먹이 그물망, 생태계를 구성합니다. 생태계는 거대합니다. 지구 환경 그 자체가 생태계가 되는 것처럼, 생태계는 아주 거대합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이건 절대 개별적이지 않고 절대 미시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자연 환경을 배제하고 오직 인류 문명만 고려한다고 해도, 심지어 인류 문명에서조차 먹고 살기는 개인적이지 않고 미시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문학 작가들은 우리가 타인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타인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 문학 작가들은 옳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타인들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우리가 타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억압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타인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면, 커다란 공통점은 우리를 보편적이라고 분류할 겁니다. 커다란 공통점 덕분에, 우리는 하나가 되고, 우리는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심리적인 측면,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육체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아주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굶어죽을 겁니다. 인간이 굶어죽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먹고 살고 존재하는 동안, 인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측면, 정신적인 측면보다 육체적인 측면은 우선합니다. 정신적인 측면은 육체적인 측면에게 기반합니다. 육체는 근본입니다.
정신보다 육체는 근본입니다. 정신적인 측면은 개별적인지 모르나, 육체적인 측면은 보편적입니다. 뭐라고 인간이 생각하든, 만약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마가렛 대처와 어슐라 르 귄은 다릅니다. 하지만 마가렛 대처는 먹고 삽니다. 어슐라 르 귄은 먹고 삽니다. 비록 마가렛 대처와 어슐라 르 귄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두 사람은 먹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마가렛 대처와 어슐라 르 귄은 다르나, 육체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은 똑같습니다. 이건 공통점입니다. 비단 두 사람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는 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류 전체에게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인류는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은 개별적인지 모르나, 육체적인 측면은 보편적입니다. 정신보다 육체가 근본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보다 보편적인 것은 근본입니다. 인류 전체에게 먹고 살기가 공통점이기 때문에, 이 공통점은 개인적이지 않고 미시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거대합니다. 이 공통점이 인류 전체를 묶고, 인류 전체가 거대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은 거대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구 생물권을 고려한다면, 이 보편성은 훨씬 거대해질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들이 먹고 살기 때문에, 이 보편성은 거대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그래서 진화 시뮬레이션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생명체들이 먹고 사는 것처럼, 자연 없이, 인간들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들은 자연, 지구 생물권에게 기반합니다. 지구 생물권은 개별적이지 않고 미시적이지 않습니다. 생태계는 거대하고 살아있는 체계를 가리킵니다. 생태학자들은 체계, 연결을 중시합니다. 생태학자들은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보다 총체적이고 거대한 것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는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보다 총체적이고 거대한 것입니다. 먹고 살기는 거대합니다.
먹고 살기가 거대하기 때문에, 이건 거대 담론으로 이어집니다. 정신보다 육체가 근본이기 때문에, '거대 담론은 근본적'입니다. 이건 오직 거대 담론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들 역시 중요합니다. 아무리 정신보다 육체가 근본이라고 해도, 인생에서 오직 먹고 살기만 전부인가요? 아무리 인간이 풍요롭게 먹고 산다고 해도, 인간은 다른 문제들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다른 고민들은 풍요로운 인간을 괴롭힐지 모릅니다. 인생에서 먹고 살기는 전부가 아니고, 개별적인 문제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들이 먹지 않는다면, 개별적인 문제들은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개별적인 것들보다 거대 담론은 필연적으로 우월하지 않으나, 개별적인 것들보다 거대 담론은 필연적으로 근본적입니다. 개별적인 것들보다 거대 담론이 근본이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이 오직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들에만 치중한다면, 사람들은 얄팍한 함정에 빠질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들을 진지하게 논의한다고 해도, 이 논의는 너무 얄팍합니다. 이 논의는 오직 표면적인 것들만 운운합니다. SF 팬들은 생체 비행선을 바라보고 얄팍하고 표면적인 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 사진 <Sea Turtle Is Animals> 출처: andresfho,
pixabay.com/photos/sea-turtle-is-animals-2547084/
※ 게임 <Creatura> 스크린샷 출처: Alonso Fuegato,
www.youtube.com/watch?v=N667PWDAqZA
※ 사진 <Strawberry Cake …> 출처: Fawaz_Shar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