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뜰>, 고가 도로와 우주선
이 사진(링크)은 과일 쥬스를 보여줍니다. 사진 속에서 유리컵은 과일 쥬스를 절반 담았습니다. 아니, 유리컵은 노란 쥬스를 절반 담지 않았습니다. 유리컵은 절반 비었습니다. 아니, 유리컵은 절반 비지 않았습니다. 유리컵은 노란 쥬스를 절반 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리컵이 절반 비었다고 해석하고, 어떤 사람들은 유리컵이 쥬스를 절반 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건 아주 유명한 해석 논쟁입니다. 두 관점 중에서 어떤 해석이 타당한가요? 유리컵이 절반 비었나요, 아니면 쥬스를 절반 담았나요? 이 물음은 오직 한쪽만 정답이라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두 해석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유리컵은 쥬스를 절반 담았거나 절반 비었습니다. 두 해석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유리컵이 쥬스를 절반 담았든, 절반 비었든, 어떤 사람이 쥬스를 유리컵에 따랐기 때문에, 이 상황은 존재합니다. 만약 아무도 쥬스를 따르지 않았다면, 하늘에서 쥬스가 뚝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쥬스가 번쩍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상황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유리컵이 쥬스를 절반 담았든, 절반 비었든, 하늘에서 이 상황은 뚝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이 상황은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 해석은 이것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썼습니다. 이 서정시는 도로 공사가 목가적인 풍경을 망쳤다고 아쉬워합니다. 사회가 근대화를 거친 이후,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하고, 목가적인 시골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할머니는 생명체들이 소중하다고 조언하나, 근대화에게 고작 목가적인 시골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그저 케케묵은 골동품에 불과합니다. 도로 공사는 시골 풍경을 파괴하고, 낭만적인 시골 풍경은 사라집니다. 할머니는 생명체들에게 살가운 정을 붙였으나, 근대화, 도시화, 도로 공사는 살가운 정을 파괴합니다. 이건 너무 아쉽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할머니의 뜰>은 도로 공사가 할머니의 뜰을 파괴한다고 한탄합니다. 독자는 <할머니의 뜰>을 읽고 화자가 생명체들을 그리워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할머니의 뜰>에서 김선우 시인 의도는 생명체들과 그리움입니다. 화자가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만약 독자가 그리움을 해석한다면, 이건 틀린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건 작품 내부 해석입니다. 독자가 그리움을 해석할 때, 독자는 작품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움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이 시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독자는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독자가 서정시 밖으로 멀리 나가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독자가 그리움을 해석한다고 해도, 다른 독자들은 이것을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할머니의 뜰> 밖으로 멀리 나가고 뭔가를 해석한다면, 다른 독자들은 이게 과잉 해석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본주의 도시가 시골을 파괴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도시가 시골을 파괴하기 때문에, 도시-시골 균형은 깨지고, 이건 환경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 도시는 계속 확장하고 시골을 착취합니다. 도시가 시골을 착취하기 때문에, 순환 체계는 깨집니다.
도시화, 근대화가 시골을 파괴할 때, 비단 목가적인 풍경만 아니라 순환 체계는 함께 사라집니다. 만약 도시 폐기물이 시골로 움직이고, 시골이 이것을 재활용하고 비료를 만든다면, 환경 오염들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는 폐기물을 함부로 버리고, 시골은 이것을 재활용하지 못합니다. 도시에게 시골이 착취 대상이기 때문에, 도시와 시골 관계는 순환 체계가 되지 못합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것을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산업 자동 공장에 열광했으나, 한편으로 두 사람은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을 악화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만약 도시가 시골을 착취하지 않고, 도시와 시골이 균형을 이룬다면, 환경 오염들은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오직 돈벌이만 추구하기 때문에, 도시는 비대해집니다. 비대한 도시는 시골을 계속 착취합니다. 도시와 시골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환경 오염은 심각해집니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사라질 때, 도시-시골 균형과 순환 체계는 함께 사라집니다. 만약 독자가 마르크스/엥겔스를 <할머니의 뜰>에 적용한다면, 이 해석이 타당한가요? 김선우 시인이 <할머니의 뜰>을 쓰는 동안, 김선우 시인이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의도했나요?
자본주의 도시를 비판하기 위해 김선우 시인이 <할머니의 뜰>을 썼나요? 만약 자본주의 비판이 시인 의도가 아니라면, 독자가 시인 의도를 존중하기 때문에, 독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못하나요? 오직 서정시 내부에서만 독자가 해석하나요? 아니면 독자가 서정시 밖으로 나가고, 작가 의도를 뛰어넘고, 자본주의 도시를 비판할 수 있나요? 어떤 관점에서 이 해석 논쟁은 순수 문학 대 참여 문학과 비슷합니다. 만약 독자가 서정시 밖으로 멀리 나가지 못한다면, 이건 순수 문학에 가까울 겁니다. 만약 독자가 사회 문제를 비판한다면, 이건 참여 문학에 가까울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할머니의 뜰> 내부에서 독자가 시인 의도를 존중하고 해석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독자가 서정시 밖으로 멀리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전자는 순수 문학에 가깝고, 후자는 참여 문학에 가깝습니다. 두 관점 중에서 어떤 것이 타당한가요? 이 상황에서 정답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서정시 내부에서 독자가 해석한다면, 독자는 문학의 순수함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사회 구조가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해도, 순수 문학은 이것을 지적하지 못합니다. 순수 문학과 달리, 참여 문학은 억압적인 사회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참여 문학이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때문에, 참여 문학은 문학 그 자체보다 사회 문제에 너무 매달릴지 모릅니다. 이렇게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답을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은 합의하지 못합니다. 두 관점은 계속 대립합니다. 하지만 비록 두 관점이 대립한다고 해도, 두 관점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근대 도시가 나타났기 때문에,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쓸 수 있었습니다.
김선우 시인처럼, 제프리 초서는 문학 작가입니다. 김선우 시인과 달리, 제프리 초서는 근대화, 도시화, 도로 공사가 목가적인 전원을 파괴한다고 한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제프리 초서가 뛰어난 문학 작가라고 해도, 제프리 초서는 고가 도로 공사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프리 초서는 14세기 중세 사회에 속합니다. 김선우 시인이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 사회에 속하기 때문에, 김선우 시인은 근대 도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과 달리, 제프리 초서가 14세기 중세에 속하기 때문에, 제프리 초서는 고가 도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회가 근대화를 거치기 때문에, 제프리 초서와 달리,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쓸 수 있었습니다. 14세기 중세 사회는 근대 도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시대가 흐르는 동안, 사회는 근대화를 거쳤고,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썼습니다. 만약 근대 도시 사회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엄청난 도로 공사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제프리 초서처럼,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뜰>에게 근대 도시 사회는 생산 조건입니다.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은 근대 도시 사회가 생산 조건이라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과 달리, 제프리 초서는 <할머니의 뜰>을 절대 쓰지 못합니다. 제프리 초서는 근대 도로 공사가 목가적인 전원을 파괴한다고 절대 쓰지 못합니다. 왜 제프리 초서가 <할머니의 뜰>을 쓰지 못하나요? 제프리 초서에게 문학적인 재능이 없기 때문인가요? 아니, 문제는 문학적인 재능보다 생산 조건입니다.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바뀌고, 이게 생산 조건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제프리 초서가 뛰어난 문학 작가라고 해도, 중세 문학 작가는 근대 도로 공사를 묘사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할머니의 뜰>에게 근대화는 아주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중세 문학 작가가 근대 도로 공사를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쩌면 <할머니의 뜰>에게 근대화는 가장 중요한 생산 조건인지 모릅니다. 서정시 내부에서 독자가 해석하든, 독자가 서정시 밖으로 멀리 나가든, <할머니의 뜰>에게 근대화는 아주(가장)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비록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이 대립한다고 해도, 두 이론은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순수 문학 이론이 이것을 부정하기 원한다면, 순수 문학 이론은 제프리 초서가 근대 도로 공사를 묘사한다고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순수 문학 이론은 이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순수 문학 이론은 제프리 초서가 근대 도로 공사를 묘사한다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김선우 시인과 달리, 제프리 초서는 오직 중세 도시 사회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를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이 이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은 근대화에서 <할머니의 뜰>이 비롯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순수 문학 이론이 기묘한 흑마술 주문을 외우고 기이한 마법진을 그린다고 해도, 순수 문학 이론은 제프리 초서가 근대 도시 사회에 속한다고 절대 증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제프리 초서가 중세 사회에 속하나요?
왜 14세기 사회가 중세 사회인가요? 왜 14세기 서구 사회가 근대 도시 사회가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서구 백인들(남자들)이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칭송합니다. 심지어 보수 우파 지식인들조차 훌륭한 서구 백인들(남자들)이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칭송합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왜 14세기 서구 사회가 근대 사회보다 중세 사회인가요? 왜 훌륭하고 대단한 서구 백인 남정네들께서 훌륭하고 대단한 근대 사회를 이룩하지 못했나요? 근대화에서 <할머니의 뜰>이 비롯했기 때문에, 이게 생산 조건이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은 이 물음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순수 문학 이론은 하늘에서 <할머니의 뜰>이 뚝 떨어졌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순수 문학 이론이 기묘한 흑마술 주문을 외우고 기이한 마법진을 그린다고 해도, 순수 문학 이론은 허공에서 <할머니의 뜰>이 번쩍 나타났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할머니의 뜰>에게 근대화는 (아주 중요한) 생산 조건이고, 순수 문학 이론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뭐라고 김선우 시인이 의도했든, 김선우 시인 역시 생산 조건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만약 김선우 시인이 이것을 부정하기 원한다면, 김선우 시인은 제프리 초서가 근대 도로 공사를 인식한다고 증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김선우 시인이 기묘한 흑마술 주문을 외우고 기이한 마법진을 그린다고 해도, 김선우 시인은 제프리 초서가 20세기 근대화와 근대 도로 공사를 인식한다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순수 문학 이론이 대단하다고 해도, 대단한 순수 문학 이론은 이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김선우 시인 의도와 상관없이, 근대 도시 사회에서 <할머니의 뜰>이 비롯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서정시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들은 근대 도시 사회를 배제하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가 근대 도로 공사를 배제하고 <할머니의 뜰>을 해석할 수 있다면, 이건 기묘한 흑마술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할머니의 뜰>을 해석할 때, 독자는 근대화를 인식합니다. 만약 독자가 근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할머니의 뜰>을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제프리 초서가 <할머니의 뜰>을 읽는다고 해도, 제프리 초서는 이 시를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제프리 초서는 그저 화자가 생명체들을 그리워한다고 표면적으로 해석할 뿐입니다. 왜 제프리 초서가 이 시를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나요? 왜 제프리 초서가 "토담, 사라진 기억의 덧창에 고가도로 삐뚜루 걸리는 저녁"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제프리 초서가 근대 도로 공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프리 초서보다 20세기 후반 독자는 <할머니의 뜰>을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독자는 불도저 같은 건설 차량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프리 초서는 불도저가 쿵쿵거린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 제프리 초서가 불도저 같은 건설 차량을 인식하지 못하나요? 문학적인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순수 문학 이론이 문학 그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은 문학적인 재능을 운운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핵심은 문학적인 재능보다 시대 격차입니다. 14세기와 20세기는 600년 시대 격차를 드러냅니다. 핵심은 600년 격차입니다.
시대 격차 때문에, 제프리 초서와 달리, 독자는 육중한 불도저를 인식합니다. 독자가 불도저를 인식하는 것처럼, 독자가 <할머니의 뜰>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근대화를 필연적으로 인식합니다. 김선우 시인이 <할머니의 뜰>을 쓰는 동안, 김선우 시인은 근대화를 필연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근대화 없이, 김선우 시인은 <할머니의 뜰>을 절대 쓰지 못합니다. 시인이 쓰고 독자가 읽는 동안, 근대화는 필연적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근대화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근대화를 타당하게 파악할 수 있나요? 우리가 근대화를 파악할 때, 우리가 함정에 빠지지 않나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오직 훌륭한 서구 백인 남자들만 근대 도시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근대화를 파악할 때,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지 않나요? 아무리 순수 문학 이론이 기묘한 흑마술을 부린다고 해도, 순수 문학 이론은 이 물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가 도로가 근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라는 단어를 이해한다면, 순수 문학 이론은 근대화를 간과할 수 있으나,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은 이것을 간과하지 못합니다.
비록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이 계속 대립한다고 해도, 비록 두 이론이 절대 타협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은 생산 조건(근대화)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비록 두 이론이 동의하기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 문학 이론과 참여 문학 이론은 생산 조건(근대화)에 필연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비단 <할머니의 뜰>만 아니라 다른 문화들, 다른 예술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문화들과 예술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이것들은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에게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초공간 도약 우주선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초공간 도약 우주선이 존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중세 판타지는 드루이드와 그린 드래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그린 드래곤이 울창한 삼림을 보호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중세 판타지는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초공간 도약 우주선과 드루이드, 그린 드래곤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는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할머니의 뜰>은 비현실 설정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토담과 고가 도로는 비현실 설정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토담과 고가 도로는 존재합니다. <할머니의 뜰>이 토담과 고가 도로를 묘사하는 것처럼, 주류 문학들은 비현실 설정을 상상하기보다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합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에게 비현실 설정은 결정적인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장르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비슷하다고 분류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비슷하다고 해도, 시대 격차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린 드래곤은 근대 도시를 알지 못합니다. 중세 판타지가 중세 사회에게 기반하고, 중세 사회와 근대 도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중세 판타지가 진짜 중세를 모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 요술사가 문명 지도자가 되고 울창한 삼림을 보호하는 것처럼, 중세 판타지는 근대 관념을 얼마든지 덧붙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중세 사회는 가공된 중세에 가깝습니다. 중세 판타지는 진짜 중세를 어느 정도 배제합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가 진짜 중세를 모방한다면, 많은 중세 지도자들이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에서도 여자는 지도자가 되지 못할 겁니다. 역사적인 중세 지도자들과 달리, 여자 요술사가 문명 지도자가 되고 울창한 삼림을 보호하는 것처럼, 중세 판타지는 근대 관념을 덧붙이고 중세 사회를 가공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중세와 근대는 다릅니다. '중세' 판타지는 '근대' 판타지가 아닙니다. <할머니의 뜰>과 제프리 초서처럼, 이 상황에서 근대는 관건이 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비슷하든, 비슷하지 않든, 두 관점은 근대가 관건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근대 판타지에서조차 근대는 관건입니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은 중세 판타지이나,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는 고딕 펑크입니다. <히마매>와 달리,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는 근대 환경 오염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여자 요술사가 삼림을 보호하는 것처럼,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는 어머니 자연을 묘사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근대 관념보다 고대 신화입니다. 아무리 판타지가 근대 사회를 묘사한다고 해도, 어머니 자연처럼, 판타지는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판타지와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는 신화보다 과학에게 기반합니다. 근대 사회에서 과학은 비롯했습니다.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가 근대 환경 오염을 묘사하는 것처럼, 아무리 판타지가 근대 사회를 묘사한다고 해도, 늑대인간들이 어머니 자연을 숭배하는 것처럼, 판타지는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늑대인간들과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에게 기반하고, 과학은 근대 관념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에게 '근대'는 결정적인 관건입니다. 그래서 순수 문학 이론이 제프리 초서가 고가 도로를 구경한 적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SF/판타지 팬들은 근대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 게임 <4X-갤럭시> 스크린샷 출처:
store.steampowered.com/app/922450/4XGalaxy/
※ 게임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스크린샷 출처: fizz z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