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과 메리 셸리 의도
소설가는 소설을 씁니다. 독자는 소설을 해석합니다. 소설가가 쓰기 때문에, 소설은 나타나고, 독자는 해석합니다. 이 상황에서 독자보다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쓸 때, 소설가는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기 원합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가가 독자를 고려하기 때문에, 소설가, 소설, 독자는 3각 관계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가가 독자를 고려한다고 해도, 소설가보다 독자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소설가가 소설을 출판한 이후,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설가가 쓰지 않는다면, 소설은 나타나지 않을 테고, 독자는 절대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가가 쓰기 전에, 독자가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보다 소설가는 우선하고, 이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독자보다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평론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넓은 관점에서 평론가는 독자입니다. 소설가는 소설 세계를 창조합니다. 소설가와 달리, 평론가는 소설 세계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것처럼, 평론가는 그저 해석할 뿐입니다. 소설가가 쓰기 전에, 평론가는 소설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만약 소설가가 쓰지 않는다면, 소설은 나타나지 않을 테고, 평론가는 절대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하고, 이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만약 캐럴 실즈가 <사랑의 공화국>을 쓰지 않았다면, 테리 이글턴은 <사랑의 공화국>을 해석하지 못했을 겁니다. 캐럴 실즈가 <사랑의 공화국>을 썼기 때문에, 테리 이글턴은 <사랑의 공화국>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테리 이글턴이 뛰어난 문학 평론가라고 해도, 캐럴 실즈가 <사랑의 공화국>을 쓰기 전에, 테리 이글턴은 <사랑의 공화국>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테리 이글턴보다 캐럴 실즈는 우선합니다. 이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테리 이글턴, 평론가보다 캐럴 실즈,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그래서 소설가가 지배자가 되나요?
테리 이글턴, 평론가보다 캐럴 실즈, 소설가가 우선하기 때문에, 소설가가 평론가를 지배하나요? 평론가가 소설가에게 종속되나요? 빛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평론가는 소설을 해석합니다. 이 관계에서 소설가는 빛이고, 평론가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보다 빛이 우선하는 것처럼, 평론가(그림자)보다 소설가(빛)는 우선합니다. 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소설가가 평론가를 드리우나요? 소설가가 평론가를 드리우기 때문에, 그림자가 빛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평론가가 소설가에게 종속되나요? 평론가보다 소설가가 지배자, 권력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분명히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평론가가 해석하기 전에, 소설가가 쓰기 때문에, 이 절대적인 관계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관계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일방적으로 평론가는 소설가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소설가는 평론가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소설가에게서 평론가가 벗어나기 때문에, 소설가는 절대적인 지배자, 권력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절대적으로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하나, 어떻게 소설가에게서 평론가가 벗어날 수 있나요? 초월적인 공간, 시간 속에서 소설가는 쓰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소설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 관점에서 소설가는 창조신과 비슷합니다. 문자 그대로 창조신이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은 그 자체에게 기반합니다. 하지만 창조신과 달리, 소설가는 그 자체에게 기반하지 못합니다. 소설가가 세계를 창조할 때, 초월적인 공간, 시간 속에서 소설가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소설가는 소설 세계를 창조합니다. 현실에서 소설가가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소설 세계보다 현실은 원대합니다. 현실 없이, 소설가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소설가가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에, 소설 세계 역시 나타나지 못합니다. 소설 세계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소설에게는 세계가 있습니다. 소설 세계는 현실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설 세계가 현실을 넘어선다고 해도, 현실에서 소설 세계는 현실을 넘습니다. 초월적인 시간, 공간 속에서 캐럴 실즈는 <사랑의 공화국>을 쓰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캐럴 실즈는 <사랑의 공화국>을 썼습니다. 만약 현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캐럴 실즈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캐럴 실즈 없이, <사랑의 공화국>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공화국>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사랑의 공화국>에게는 세계가 있으나, <사랑의 공화국> 세계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공화국> 세계보다 현실은 원대합니다.
아무리 <사랑의 공화국> 세계가 현실을 넘어선다고 해도, 현실에서 이 소설 세계는 현실을 넘습니다. 캐럴 실즈가 <사랑의 공화국>을 쓰기 전에, 이미 현실은 나타났습니다. 캐럴 실즈가 쓰기 전에, 이미 현실이 나타났기 때문에, 현실은 캐럴 실즈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현실 영향 속에서 캐럴 실즈는 <사랑의 공화국>을 썼습니다. <사랑의 공화국>보다 현실이 원대한 것처럼, 캐럴 실즈보다 현실은 원대합니다. <사랑의 공화국> 세계보다 원대한 현실이 우선하는 것처럼, 캐럴 실즈보다 원대한 현실은 우선합니다. 아무리 소설가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현실에서 소설가는 씁니다.
현실 영향 속에서 소설가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소설을 쓰는 것처럼, 소설가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뭐라고 소설가가 의도하든, 소설가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소설가보다 현실은 원대합니다. 소설가보다 현실이 원대하기 때문에, 만약 평론가가 원대한 현실에게 기반한다면, 평론가는 소설가를 넘어설 겁니다. 뭐라고 캐럴 실즈가 의도하든, 캐럴 실즈보다 현실이 원대하기 때문에, 만약 테리 이글턴이 원대한 현실에게 기반한다면, 테리 이글턴은 캐럴 실즈를 넘어설 겁니다. 테리 이글턴이 캐럴 실즈를 넘어서기 때문에, 소설가, 캐럴 실즈는 평론가, 테리 이글턴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테리 이글턴, 평론가가 캐럴 실즈, 소설가를 넘어서기 때문에, 소설가에게서 평론가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평론가보다 소설가는 우선하나, 평론가가 원대한 것에게 기반할 때, 평론가가 소설가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소설가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니고, 소설가에게서 평론가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단 캐럴 실즈와 <사랑의 공화국>만 아니라 다른 소설가들, 다른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SF,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분명히 이 소설은 SF,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메리 셸리가 SF 장르를 의도했나요?
"아하, 그래! 나는 SF 소설을 쓸 거야. 나는 SF 소설을 쓰기 원해. <프랑켄슈타인>은 SF 장르에 속할 거야. <프랑켄슈타인>은 사이언스 픽션이야." 메리 셸리가 이것들을 의도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이 <어둠의 왼손>을 썼을 때, 어슐라 르 귄은 SF 장르를 의도했을 겁니다. 조 홀드먼이 <영원한 전쟁>을 썼을 때, 조 홀드먼은 SF 장르를 의도했을 겁니다. 심지어 게임즈 워크샵이 <스페이스 헐크>를 구상했을 때조차, 게임즈 워크샵은 SF 장르를 의도했을 겁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소설보다 보드 게임입니다. 게임즈 워크샵은 <스페이스 헐크>가 스페이스 오페라, SF 게임이라고 의도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 조 홀드먼, 게임즈 워크샵은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 조 홀드먼, 게임즈 워크샵과 달리,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왜 메리 셸리가 이 장르를 의도하지 않았나요? 어슐라 르 귄은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했으나, 어슐라 르 귄과 달리, 왜 메리 셸리가 의도하지 않았나요? 심지어 게임즈 워크샵조차 스페이스 오페라를 의도했으나, 왜 메리 셸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지 않았나요? 메리 셸리가 이 장르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아직 사이언스 픽션은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메리 셸리는 장르 시초입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후, 20세기 이후, 사이언스 픽션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메리 셸리 이후, 사이언스 픽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메리 셸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기 원했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했습니다. 메리 셸리가 이 블로그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을 SF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왼손>이 SF 소설이고, <영원한 전쟁>이 SF 소설이고, <스페이스 헐크>가 SF 게임인 것처럼, <프랑켄슈타인>은 이 장르에 속합니다.
비록 메리 셸리가 SF 소설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을 SF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SF, 사이언스 픽션은 비(非)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초능력자(사서)가 터미네이터 갑옷을 입고, 우주 유령선에 진입하고, 외계 괴물을 처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초능력자는 강화복을 입지 않고, 우주 유령선에 진입하지 않고, 외계 괴물을 처치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초능력자, 강화복, 우주 유령선, 외계 괴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스페이스 헐크> 세계는 다릅니다. 초능력자처럼, <스페이스 헐크>는 비현실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초능력 강화복 사서와 우주 유령선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비현실 세계는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하지만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비현실 세계를 상상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비현실 세계들을 상상했습니다. 비현실 세계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19세기 문화에서도 비현실 세계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습니다. 19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과학과 비현실 세계는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언스, 과학과 비현실 세계가 만났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기 때문에, 어슐라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을 SF 소설이라고 의도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타났고, 게임즈 워크샵은 <스페이스 헐크>를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의도했습니다. '사이언스(과학)+비현실 세계'는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적어도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사이언스(과학)+비현실 세계를 증명합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과학)+비현실 세계를 의도했습니다. 비현실 세계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19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과학)+비현실 세계를 의도했습니다.
메리 셸리가 사이언스(과학)+비현실 세계를 의도했기 때문에, 비록 메리 셸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비록 메리 셸리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인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둠의 왼손>, <영원한 전쟁>, <스페이스 헐크>처럼, <프랑켄슈타인>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메리 셸리는 비현실 세계 역사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전에, 이미 인류 문화는 신화, 전설, 민담을 이야기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근대 과학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전에, 근대 과학은 발달하는 중이었습니다.
메리 셸리보다 신화, 전설, 민담은 원대합니다. 메리 셸리보다 근대 과학은 원대합니다. SF 평론가는 원대한 신화, 과학에게 기반하고 메리 셸리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가 메리 셸리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비록 메리 셸리가 SF 소설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스페이스 헐크>처럼, SF 평론가는 메리 셸리를 사이언스 픽션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평론가가 소설가(메리 셸리) 의도를 넘어서는 것처럼, 독자는 소설가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넓은 관점에서 평론가가 독자에 속하기 때문에, 평론가가 메리 셸리 의도를 넘어서는 것처럼, 독자는 원대한 것에게 기반하고 소설가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건 독자가 소설가 의도를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캐럴 실즈가 썼기 때문에, <사랑의 공화국>이 나타났던 것처럼, 소설가가 쓰기 때문에, 소설은 나타납니다. 어슐라 르 귄이 썼기 때문에, 조 홀드먼이 썼기 때문에, <어둠의 왼손>, <영원한 전쟁>은 나타났습니다. 메리 셸리가 썼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스페이스 헐크>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소설보다 보드 게임이나, 만약 게임즈 워크샵이 의도하지 않았다면, <스페이스 헐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게임즈 워크샵에게서 <스페이스 헐크>가 비롯하는 것처럼, 소설가에게서 소설은 비롯합니다.
게임즈 워크샵에게서 <스페이스 헐크>가 비롯했기 때문에, <스페이스 헐크>는 게임즈 워크샵에게 종속됩니다. 캐럴 실즈에게서 <사랑의 공화국>이 비롯했기 때문에, <사랑의 공화국>은 캐럴 실즈에게 종속됩니다. <어둠의 왼손>은 어슐라 르 귄에게 종속되고, <영원한 전쟁>은 조 홀드먼에게 종속되고,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에게 종속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셸리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메리 셸리 의도는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모범적인 독자가 소설을 해석할 때, 독자는 소설가 의도를 중시합니다. 모범적인 독자는 메리 셸리 의도를 중시합니다.
모범적인 독자가 소설가 의도를 존중하고 소설을 해석하는 것처럼, 모범적인 해석은 다른 무엇보다 소설가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가 의도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해도, 소설가 의도는 독자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만약 소설가 의도가 독자를 지배한다면, 만약 의도가 전능하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겁니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성 차별, 성 추행을 묘사합니다. 타치바나 타키는 미야미즈 미츠하의 가슴을 주물럭거립니다. 타치바나 타키와 미야미즈 미츠하는 연인 관계가 아닙니다. 미야미즈 미츠하는 타치바나 타키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야미즈 미츠하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타치바나 타키는 미야미즈 미츠하의 가슴을 주물럭거립니다. 분명히 이건 성 추행입니다. 비록 육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타치바나 타키는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노골적입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성 추행을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그저 두근두근 청춘을 의도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타치바나 타키는 미야미즈 미츠하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이 장면을 두근두근 청춘이라고 의도했는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성 추행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장 관객들이 이 의도를 따라야 하나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성 차별, 성 추행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장 관객들이 이 장면을 비판해서는 안 되나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극장 관객들을 구속하나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서 극장 관객들이 벗어나지 못하나요? 백인 주인에게서 흑인 노예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서 극장 관객들이 벗어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랑의 공화국>이 캐럴 실즈에게 종속되고, <스페이스 헐크>가 게임즈 워크샵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비록 <너의 이름>이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 종속된다고 해도, 극장 관객들은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 역사는 계급 투쟁 역사입니다. 계급 투쟁 역사는 가부장 제도 역사입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 제도를 타파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 역사가 가부장 제도 역사이기 때문에, 가부장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인류 문명 역사를 전복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이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아주 유구한 역사와 대면해야 합니다. 이 대면, 이 전복 역시 유구합니다. 이 유구한 현실 속에서 <너의 이름>은 나타났습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보다 이 현실, 전복은 유구합니다. 극장 관객들은 유구한 것, 현실, 대면, 전복, 투쟁에게 기반하고 이 애니메이션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극장 관객들이 <너의 이름>을 비판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극장 관객들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독자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극장 관객들이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을 넘어서는 것처럼, 독자는 소설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가를 넘어설 수 있고, 평론가가 독자에 속하기 때문에, 평론가는 메리 셸리 의도를 넘어설 수 있고 SF 소설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가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할 때, 아무리 메리 셸리 '의도'가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해도, 해석은 원대하고 유구한 것에게 기반하고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출동! 지구 특공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어머니 여신 가이아를 묘사합니다. 가이아는 대지 모신, 어머니 여신입니다. 그저께 1월 3일 게시글이 설명했던 것처럼, 어머니 여신은 공유지 경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만약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했다면,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때, 의도와 해석은 일치할 겁니다. 만약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때, 의도와 해석은 어긋날 겁니다. 의도와 해석이 어긋나기 때문에, 공유지 경제가 잘못된 해석인가요?
하지만 해석은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비록 메리 셸리가 SF 소설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이 SF 소설인 것처럼, 비록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자연 생태계, 먹이 그물망은 어머니 여신이 공유지 경제를 가리킨다고 증명합니다. <출동! 지구 특공대>가 방영하기 전에, 이미 원대한 자연 생태계, 먹이 그물망은 나타났습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출동! 지구 특공대>를 구상하기 전에, 원대한 자연 생태계, 먹이 그물망은 나타났습니다.
<출동! 지구 특공대>(땅! 불! 바람! 물! 마음!)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보다 자연 생태계, 먹이 그물망이 원대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원대한 것에게 기반하고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만약 의도가 해석을 지배한다면, 만약 해석이 의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메리 셸리가 SF 소설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을 SF 소설이라고 분류하지 못할 겁니다. 의도가 해석을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이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비록 메리 셸리가 SF 소설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을 SF 소설이라고 분류합니다.
SF 평론가가 <프랑켄슈타인>을 SF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것처럼,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심지어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출동! 지구 특공대>를 비판조차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여신이 공유지 경제를 가리키기 때문에, 만약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이 의도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해석이 의도를 비판할 수 있는 것처럼, 의도는 전능한 지배자가 아닙니다. 의도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전능한 의도주의는 위험한 고정 관념, 착각입니다.
<출동! 지구 특공대>처럼, 비디오 게임 <테라제네시스>는 가이아의 딸들을 이야기합니다. <출동! 지구 특공대>와 달리, <테라제네시스>에서 핵심 소재는 외계 행성 테라포밍입니다. 환경 보호와 우주 테라포밍이 가이아를 내세우는 것처럼, 어머니 여신은 유명한 소재입니다. <출동! 지구 특공대>처럼, <테라제네시스>가 어머니 여신(의 딸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가이아의 딸들이 공유지 경제보다 사유 재산 제도를 중시한다면,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가이아의 딸들이 잘못된 어머니 여신을 내세운다고 비판조차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헐크>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특히, 골수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헐크>가 황당무계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헐크>가 초능력자(사서)를 묘사하기 때문에, 골수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헐크>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깝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비단 <스페이스 헐크>만 아니라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들, 사이언스 판타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르 내부에서 '엄중하고 진지한 과학 vs. 황당무계한 마법'은 커다란 갈등입니다. 하지만 오직 사이언스 판타지만 황당무계한가요? 이재창 작가는 <기시감>을 썼습니다.
<기시감>은 하드 SF 소설입니다. 이재창 작가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했을 겁니다. <기시감>, 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타키온 드라이브 항해를 묘사합니다. <기시감>이 엄중하고 진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키온 드라이브가 가능한가요? <기시감>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언젠가 필연적으로 타키온 드라이브 우주선이 항해하나요? <기시감>이 사이언스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에, 타키온 드라이브 우주선이 필연적인 규칙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 역시 황당무계합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 대 사이언스 판타지는 도토리 키 재기인지 모릅니다.
※ 게임 <스페이스 헐크 택틱스>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92230/Space_Hulk_Tac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