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사회 공학

표범 상어와 바이오 돔, 문화 해석과 공유 사회

OneTiger 2020. 11. 10. 20:00



다소 무섭고 놀라운 이 사진(링크)이 보여주는 것처럼, 호랑이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호랑이를 좋아합니다. 호랑이는 육중하나, 한편으로 호랑이는 날렵합니다. 호랑이는 대형 동물이나, 동시에 호랑이는 은밀합니다. 육중함과 날렵함은 대조적이고, 커다란 규모와 은밀함 역시 대조적이나, 호랑이는 대조적인 두 속성을 함께 갖췄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복잡한 줄무늬들입니다. 줄무늬들은 화려한 야성을 강조합니다. 육중함과 날렵함, 커다란 규모와 은밀함, 무엇보다 화려한 줄무늬들 덕분에, 다양한 야생 동물들 중에서 호랑이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건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랑이가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호랑이가 아름답다고 해도 호랑이보다 다른 동물이 훨씬 아름답다고 느낄 겁니다. 아무리 호랑이에게 화려한 줄무늬들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호랑이가 독보적으로 아름답다고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개성들을 드러냅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성들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호랑이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호랑이는 독보적으로 아름다우나, 어떤 관점에서 호랑이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두 해석은 대립하나, 두 해석은 공존합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합니다. 수풀 속에서 위장하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습니다. 복잡한 줄무늬들 덕분에, 수풀 속에서 호랑이는 은밀하게 매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슴이 색깔들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복잡한 줄무늬들 때문에, 사슴은 수풀과 호랑이를 구분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사슴에게 몰래 다가가고 사슴을 기습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줄무늬들 때문에, 호랑이가 사슴을 사냥하는 것처럼, 수풀 속에서 위장하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습니다.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호랑이는 매복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는 사슴을 사냥합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습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호랑이 줄무늬들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움은 그저 주관적인 감정에 불과하나, 주관적인 감정과 과학은 다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랑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사람들은 과학을 인정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개성들을 드러내고,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느낀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과학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개성들이 다르다고 해도,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고, 수많은 개성들은 이 과학을 똑같이 인정해야 합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호랑이 줄무늬들이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나, 수많은 개성들이 과학을 똑같이 인정하는 것처럼,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차이들이 있다고 해도, 수많은 차이들은 합의할 수 있습니다. 합의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차이들과 상관없이, 합의는 가능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개인적인 것, 개별성은 가장 커다란 화두입니다. 개별성은 공통점보다 차이를 드러냅니다. 개별성은 공통점보다 차이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개별성이라는 저울에서 무게 추는 공통점보다 차이를 향해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공통점보다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단편 소설 <인지 공간>이 공통점보다 차이를 강조하고 개인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과 개별성과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성과 차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합의는 너무 어렵습니다. 합의는 차이보다 공통점을 중시합니다.



공통점이 존재할 때, 합의는 가능합니다. 차이와 공통점은 대립합니다. 차이와 공통점이 대립하고, 사람들이 차이를 중시하고, 합의가 공통점을 요구하기 때문에, 합의는 너무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개인적인 것, 개별성이 두드러질 때, 합의는 너무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합니다. 개인의 자유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건 개별성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개별성을 중시합니다. 개별성이라는 저울에서 무게 추는 차이를 향해 기울어집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공통점보다 차이를 중시합니다. 합의는 너무 어렵습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차이를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너무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합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개별성을 강조하고, 강조하고, 강조하고, 다시 강조합니다. 합의보다 중요한 것은 개성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자유 민주주의는 개별성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가 개성을 강요한다고 해도, 수많은 개성들은 과학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호랑이 줄무늬들이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나, 수많은 개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이 진화했다고 인정합니다.



사슴과 표범 상어 중에서 무엇이 훨씬 이질적인가요? 수많은 개성들은 다르게 대답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슴이 이질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표범 상어가 이질적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슴과 표범 상어가 똑같이 이질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사슴과 표범 상어가 똑같이 이질적이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 해석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똑같이 해석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사슴과 표범 상어 중에서 무엇이 훨씬 이질적인지 합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개성들은 과학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사슴은 포유류입니다. 인간은 포유류입니다.

 

포유류 사슴은 육상 보행 척추 동물입니다. 포유류 인간은 육상 보행 척추 동물입니다. 반면, 표범 상어는 어류입니다. 표범 상어는 척추 동물이나, 사슴과 인간과 달리, 표범 상어는 해양 동물입니다. 표범 상어에게는 네 다리들보다 여러 지느러미들이 있습니다. 계통 분류학에서 표범 상어보다 사슴과 인간은 가깝습니다. 사슴과 인간보다 표범 상어가 멀기 때문에, 사슴보다 표범 상어는 훨씬 이질적입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이 과학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표범 상어보다 사슴이 이질적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주관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과학은 유일합니다.



과학이 유일하기 때문에, 과학은 공통점이 됩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사슴과 인간과 표범 상어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나, 다양한 해석들과 상관없이, 과학은 유일하고, 유일한 것은 공통점이 되고, 수많은 개성들은 사슴보다 표범 상어가 이질적이라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가 수많은 개성들과 차이들을 강요한다고 해도, 수많은 차이들은 과학과 공통점을 찾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과학은 육체적인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표범 상어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사슴은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적인 이유 때문에, 사슴보다 표범 상어는 이질적입니다.

 

사슴보다 표범 상어에게 이질적인 육체(여러 지느러미들, 유선형, 아가미)가 있기 때문에, 사슴보다 표범 상어는 이질적입니다. 수많은 개성들이 사슴보다 표범 상어가 이질적이라고 동의할 때, 수많은 개성들은 육체를 중시합니다. 육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살기'입니다. 육체는 먹고 삽니다. 사슴은 풀들을 뜯습니다. 표범 상어는 바다 밑바닥 동물들을 삼킵니다. 사슴이 풀들을 뜯고, 표범 상어가 바다 밑바닥 동물들을 삼키는 것처럼, 육체는 먹고 삽니다. 육체는 먹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육체들은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만약 육체가 먹지 않는다면, 육체는 생존하지 못할 겁니다.





1994년 <울프>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늑대를 조종합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하나는 사냥입니다. 늑대는 사냥합니다. 늑대가 토끼를 사냥하든, 비버를 사냥하든, 사슴을 사냥하든, 늑대는 사냥합니다. 먹기 위해 늑대는 사냥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으로서 <울프>는 먹고 살기가 중요하다고 보여줍니다. 호랑이에게는 복잡한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호랑이 줄무늬들은 진화했습니다. 호랑이 줄무늬들이 진화한 것처럼, 육체에게 먹고 살기는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 역시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적인 인간은 먹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먹든,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수많은 먹거리들을 먹고, 수많은 먹거리들은 다르나, 결국 인간은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수많은 먹거리들은 공통점보다 차이에 가까우나, 먹고 살기는 근본적인 공통점입니다. 인간이 구운 바나나를 먹든, 튀김 소바를 먹든, 아이란과 최렉을 먹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구운 바나나와 튀김 소바와 아이란과 최렉처럼, 생존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먹거리입니다. 먹거리 없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수많은 개성들과 차이들은 이 과학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울프>가 먹고 살기를 강조하는 것처럼, <울프>를 비롯해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먹고 살기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는 바이오 돔을 제시합니다. 바이오 돔에서 먹이 그물망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먹이 그물망은 자연 생태계에서 생물 다양성이 먹고 산다는 뜻입니다. 생물 다양성이 먹고 살기 때문에, 바이오 돔은 '바이오' 돔입니다. 만약 자연 생태계가 망가진다면, 먹이 그물망은 무너질 테고, 생물 다양성은 사라질 테고, 더 이상 바이오 돔은 '바이오' 돔이 아닐 겁니다. 생물 다양성 없이, 황량한 바이오 돔은 바이오 돔이 아닙니다.

 

바이오 돔은 먹고 살기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강조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바이오 돔 풍경을 바라보고 감탄한다면, 먹고 살기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뭔가를 필연적으로 먹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먹고 살기가 가장 근본적이고, 바이오 돔이 먹고 살기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이오 돔 풍경을 바라보고 감탄하는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이 먹고 살기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바이오 돔 풍경은 아름다운 장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에서 장거리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한다면, 이것 역시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비단 바이오 돔만 아니라 거대 괴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괴수는 매력적입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거대 괴수를 덕질합니다. 만약 SF/판타지가 거대 괴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블로그를 개설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SF/판타지가 거대 괴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저는 SF/판타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겁니다. 비단 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를 사랑합니다. 거대 괴수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거대 괴수는 크고 파괴적입니다. 심지어 모스라조차 크고 파괴적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크고 파괴적이라면, 이것과 거대 괴수가 비슷한 위상이 되나요?

 

우주 구축함은 크고 파괴적입니다. 그래서 우주 구축함과 거대 괴수가 비슷한 위상이 되나요? 여기에서 문제는 '먹고 살기'입니다. 거대 괴수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거대 괴수와 달리, 우주 구축함은 육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 구축함보다 거대 괴수가 육체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 구축함보다 거대 괴수는 훨씬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대 괴수보다 우주 구축함이 매력적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이건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주관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수많은 개성들은 우주 구축함보다 거대 괴수가 육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육체가 이유이기 때문에, 호랑이 줄무늬들이 진화한 것처럼, 육체가 이유이기 때문에, 사슴보다 표범 상어가 이질적인 것처럼, 육체가 이유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 풍경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주 구축함보다 거대 괴수는 매력적입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인 해석은 호랑이 줄무늬들이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고, 표범 상어보다 사슴이 이질적이라고 느끼고, 바이오 돔 풍경이 시시하다고 느끼고, 거대 괴수보다 우주 구축함이 매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으나, 주관적인 해석에 상관없이, 과학은 유일합니다. 수많은 다양한 해석들은 합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먹고 살고, 그래서 우주 구축함보다 육체적인 인간은 육체적인 거대 괴수에게 가깝습니다. 수많은 해석들은 이 과학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굶주린다면, 인류는 멸종할 테고, 수많은 개성들 역시 사라질 겁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성들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먹거리 없이, 개별성이고 차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가 개인적인 것, 개별성, 차이를 강조한다고 해도,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즘이 차이에 목숨을 건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것, 개별성, 차이보다 먹거리(공통점)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건, 의료, 건강, 웰빙을 중시합니다. 웰빙에서 기초는 먹거리입니다. 풍요로운 먹거리는 건강한 인생을 뒷받침합니다. 만약 먹거리 없이, 인간이 쫄쫄 굶는다면, 보건, 의료, 웰빙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을 겁니다. 건강하게 살고 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풍요로운 먹거리는 필수적입니다. 먹거리는 보건, 의료, 건강, 웰빙을 뒷받침합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수많은 요리들을 좋아하고, 이건 공통점이 아닙니다. 튀김 소바와 아이란과 최렉은 다릅니다. 이것들은 공통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튀김 소바와 아이란과 최렉은 먹거리입니다. 이건 공통점입니다.

 

인간이 튀김 소바를 먹든, 아이란과 최렉을 먹든, 먹거리는 공통점입니다. 먹거리는 웰빙을 뒷받침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의사들이 약들을 처방한다고 해도, 이 약들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약들을 먹기 전에, 그들은 잘 먹어야 합니다. 약보다 먹거리가 건강한 인생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인 것처럼, 먹거리 없이, 보건, 의료, 건강, 웰빙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먹거리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태계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에서 바이오 돔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 속에서 생물 다양성은 먹이 그물망을 구성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처럼, 하드 SF 소설은 자연 속에서 먹거리가 비롯한다고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약 장거리 우주선에서 바이오 돔이 망가진다면, 작물들은 자라지 못할 테고, 우주선 사람들은 굶주릴 겁니다. 기나긴 우주 항해 동안, 먹고 살기 위해 우주선 사람들은 바이오 돔에게 기반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가 생태계 게임인 것처럼, 바이오 돔은 자연입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자연에게 기반합니다. 인간은 자연에게 필연적으로 기반합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개성들이 수많은 차이들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건 공통점입니다.

 

아무리 해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다양한 해석들은 인간이 자연에게 기반한다고 동의합니다. 과학이 공통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연에게 필연적으로 기반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공유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인간(갑)이 자연을 소유하고, 다른 인간(을)이 자연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갑은 먹고 살 수 있으나, 을은 먹고 살지 못할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을은 갑에게 복종합니다. 만약 인간이 자연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을은 갑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유 재산 제도는 갑과 을을 나눕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사유 재산 제도를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갑과 을을 나눕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갑과 을을 나누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공유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육체적인 이유 때문에, 호랑이 줄무늬들이 진화했고, 사슴보다 표범 상어가 이질적이고, 바이오 돔 풍경이 아름답고, 거대 괴수가 매력적인 것처럼, 공유 사회가 육체적인 존재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공유 사회는 과학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개성들이 수많은 차이들을 드러낸다고 해도, 수많은 차이들은 이 과학, 공통점(공유 사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해석들은 다양하나, 과학은 유일합니다. 호랑이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해석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비단 호랑이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돌 그룹 여자친구는 <마고>를 부릅니다. <마고>가 좋은 노래인가요? 이게 이른바 띵곡인가요?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고>가 요란하고 산만하다고 느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고>가 올해 최고의 노래라고 느낄 겁니다. 여자친구는 올해 최고의 노래 <마고>를 부릅니다. "우와아~, 아무리 유주 언니가 만능 캐릭터라고 해도, 이렇게 디스코를 멋지게 연출하다니…. 유주 언니는 정말 1004인가 봐요~" 하지만 이 탄성은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마고>가 대중 문화, 문화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마고>와 달리, 공유 사회는 문화가 아닙니다. 공유 사회는 과학입니다. <마고>가 요란하고 산만하든, <마고>가 올해 최고의 노래이든, 문화 해석들은 다양할 수 있으나, 문화 해석들과 달리, 공유 사회가 과학이기 때문에, 공유 사회는 유일합니다. 다양한 해석들은 공유 사회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여자친구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호랑이가 육체적인 존재이고, 표범 상어가 육체적인 존재이고, 거대 괴수가 육체적인 존재이고, 바이오 돔 식물상이 육체적인 것처럼, 쇠리더를 비롯해 여자친구 멤버들은 육체적인 존재들입니다. 육체적인 존재는 먹고 삽니다.

 

"여자 아이돌들 중에서 여자친구는 먹방에 가장 목숨을 거는 것 같아요." 이렇게 아이돌 팬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자친구 멤버들은 육체적인 존재들입니다. 육체적인 존재에게 먹고 살기는 근본적입니다. 호랑이 사진과 표범 상어부터 여자친구와 모스라까지, 이 사례들은 먹고 살기가 근본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은 자연에서 먹거리가 비롯한다고 비유합니다. 자연에서 먹거리가 비롯하기 때문에, 인류는 자연을 공유해야 합니다. <마고>는 문화이나, 공유 사회는 과학입니다. 수많은 개성들은 이 과학, 공유 사회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 밤은 Tic tak tic tak. Feel so high in the midnight~♬

 

※ 게임 <압주> 스크린샷 출처: BrySkye,

www.youtube.com/watch?v=C8Vur1VfJ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