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피조물들과 노동 착취, 식민지 수탈
SF 세상에서 로봇들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이른바 3대 그랜드 마스터들 중에서 하나는 아이작 아시모프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을 고안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여러 소재들을 이야기했으나,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를 대표합니다. SF 독자들이 아이작 아시모프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독자들은 다른 소설들보다 로봇 소설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아시모프는 로봇 소설 전형을 마련했고, 이런 전형은 후대 SF 소설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해 숱한 SF 작가들은 로봇 이야기들을 씁니다.
심지어 원형적인 SF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은 기계보다 생명체이나, 인조인간과 로봇은 똑같이 인간의 피조물입니다. SF 작가는 인조인간을 로봇으로 쉽게 치환할 수 있습니다.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과 영화 <A.I.>는 다릅니다. 전자에는 인조인간(생명체)이 있고, 후자에는 로봇(기계)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섬의 만능 로봇>과 <A.I.>는 똑같이 인간의 피조물을 이야기합니다. 원형적인 SF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나타났을 때, 이미 사이언스 픽션은 피조물이라는 소재를 품었습니다. SF 세상에서 로봇과 인조인간을 비롯해 인간의 피조물들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소설 <스타타이드 라이징>에는 로봇과 인조인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똑똑한 신종 돌고래들이 있습니다. 신종 돌고래들은 우주선을 조종하고, 언어를 이용하고, 이론을 고안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종 돌고래들은 인간이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신종 돌고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과 <로섬의 만능 로봇>을 비롯해 여러 로봇 이야기들과 달리,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 신종 돌고래들은 인류에게 크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종 돌고래들은 인간들에게 불만들을 터뜨리나,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이런 불만들이 부정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로섬의 만능 로봇>과 달리,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는 파탄에 이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소설 역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갈등이 부딪힌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종 돌고래는 로봇이 아니고 인조인간이 아니나, 신종 돌고래가 인간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종 돌고래와 로봇과 인조인간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아이 로봇>과 <로섬의 만능 로봇>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처럼,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이런 인간의 피조물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흐릅니다. 하나는 종속-해방 관계입니다. 사실 '지성적인 피조물'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종속-해방 관계로 이어질 겁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전제하고, 피조물이 독립하고 싶다면, 피조물은 창조주를 떠나야 합니다. 창조주는 더 이상 피조물에게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에게 비슷한 지성이 있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은 비슷한 세계를 인식할 테고, 그래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할 겁니다.
신은 생명을 만들었으나, 신은 생명에게 개입하지 않습니다. 세상 내부에서 신이 존재해야 하나요?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세상 외부에서 신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세상보다 신은 원대합니다. 그래서 신은 신입니다. 신은 스스로 존재합니다. 신이 기반하는 원리는 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건 굉장히 전능하고 동시에 모순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가 신이 되지 않는다면, 창조주는 자신과 비슷한 지성적인 존재에게서 완전히 멀어지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지성적인 피조물은 종속-해방 관계라는 주제와 쉽게 떨어지지 못합니다. SF 소설이 이런 골치가 아픈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계급 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은 종속-해방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속-해방 관계는 다시 노동 문제로 이어집니다. 인류 문명에서 계급 투쟁은 노동과 생산 수단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농업 사회에서 여자들이 공유지(농지)를 소유하고 경작할 수 있을 때,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에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고,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고, 공동체에 식량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억압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노동 통제와 공유지를 이용해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을 때, 인간은 쉽게 고개를 굽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한다고 해도, 공유지를 지키기 위해 제3세계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에코 페미니즘은 공유지 경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텃밭을 가꾸는 제3세계 여자들은 <공산당 선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을 읽거나 이른바 고등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3세계 여자들은 공유지가 중요하다고 인식합니다. 생산 수단 없이,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노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기 원한다면, 인간은 생산 수단을 소유해야 합니다. 공유지가 있을 때, 여자들은 그들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을 때,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억지로 돌봄 노동들에 밀어넣지 못하고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지 못합니다. 사실 지배 계급이 잉여 생산물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지배 계급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지배 계급은 돌연변이 초능력자가 아니고, 슈퍼맨이 아니고, 외계인이 아닙니다. 지배 계급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왜 지배 계급에게 막강한 권한이 있나요? 그들이 엄청난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지배 계급이 엄청난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할 수 있나요? 그들이 생산 수단을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노동은 재화를 생산합니다. 아무리 숲이 풍요롭고 토지가 비옥하고 바다가 건강하다고 해도, 인간이 버섯을 따지 않고 꿀벌을 기르지 않고 해초를 걷지 않는다면, 인간은 식량을 얻지 못할 겁니다. 재화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고, 결국 지배 계급이 다른 수많은 피지배 계급들의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막대한 잉여 생산물들을 축적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에서 대부분 지배 계급들은 부자들입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의 노동을 착취합니다. 지배 계급이 토지를 비롯해 생산 수단을 차지하기 때문에, 피지배 계급은 그들의 노동들을 지배 계급에게 바쳐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노동 능력이 있으나, 인간은 오직 노동 능력만으로 재화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시골 할머니에게 뛰어난 양봉 지식이 있다고 해도, 시골 할머니에게 벌집들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와 꿀벌들이 꿀을 빨 수 있는 꽃밭이 없다면, 시골 할머니는 꿀을 얻지 못할 겁니다. 생산 수단(토지, 벌집, 꽃밭)과 노동 능력(시골 할머니의 지식과 근력)이 함께 존재할 때, 인간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 계급은 이런 생산 수단을 독차지합니다. 지배 계급은 그들이 생산 수단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지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연 환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생산 수단(지구 자연 환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지구는 스스로 나타났고, 생명 현상 역시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생산 수단을 독차지하기 위한 명분이 없습니다. 고대 귀족부터 21세기 자본가들까지, 지배 계급들은 그들에게 생산 수단을 차지하기 위한 명분이 있다고 주장하나, 이건 그저 개X랄 같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생산 수단(지구 자연 환경)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산 수단을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배 계급은 이런 진실을 싫어합니다. 피지배 계급이 이런 진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지배 계급은 생산 수단을 독차지하지 못하고 피지배 계급의 노동들을 착취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만들 수 있다면? 만약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창조주가 될 수 있다면? 지배 계급이 왕권 신수설이나 성실한 자본가나 백인의 짐이나 사내 대장부 같은 개X랄 맞은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는다고 해도, 지배 계급은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지배 계급은 말할 겁니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 나와 너는 똑같지 않다. 너보다 나는 우얼하다. 따라서 나는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고,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로봇, 인조인간, 똑똑한 개조 동물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생산 수단을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속-해방 관계는 노동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노동 문제를 빼먹지 않습니다. 이런 사이언스 픽션들이 공산주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사이언스 픽션들은 '저도 모르게' 노동 문제를 언급합니다. 현실 속에서 노동 문제가 아주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들은 저도 모르게 현실을 반영하고 노동 문제를 언급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공개적으로(노골적으로) 종속-해방 관계와 노동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공산당 선언>을 이해하고 여자들의 공유지 경제를 이해한다면, 관객들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훨씬 깊게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현실에서 로봇, 인조인간, 똑똑한 개조 동물은 아직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 로봇, 인조인간, 똑똑한 개조 동물보다 기술적인 특이점과 4차 혁명은 훨씬 화제가 됩니다. 특히, 4차 혁명은 아주 뜨거운 화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4차 혁명이 인간 노동자를 밀어낸다고 말하거나 일자리들이 없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소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4차 혁명이 인간 노동자들을 밀어낼 수 있나요? 문제는 4차 혁명이 스스로 자신(4차 혁명)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이 존재하기 위한 기반 원리는 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나, 4차 혁명은 신이 아닙니다. 4차 혁명은 절대 자신에게 기반하지 못합니다. 4차 혁명은 다른 뭔가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건 인간 노동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기 때문에, 4차 혁명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21세기 오늘날을 자동화 공정 시대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자동화 기계들이 수많은 재화들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동화 기계들이 수많은 재화들을 만든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오직 자동화 공정만으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21세기 자동화 공정 시대에도 곳곳에서 이른바 3D 노동자들은 위험하게 노동하고 돌봄 노동자들은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들을 맡습니다. 이런 노동자들 없이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노동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21세기 자동화 시대는 빛날 수 있습니다. 만약 내일 당장 온갖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3D 노동자들과 돌봄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빛나는 21세기 첨단 시대는 폭싹 무너질지 모릅니다. 4차 혁명이라는 구호는 그저 때깔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막대한 생산력이 찬란하고 평등한 미래를 보장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막대한 생산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싸움 없이 사람들은 풍족한 재화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안 뱅크스가 쓴 컬쳐 시리즈는 이것과 비슷한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 이런 막대한 생산력을 찬양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막대한 생산력이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인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가 막대한 생산력을 자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지적하는 것처럼, 17세기부터 유럽 문명은 열대 밀림을 수탈했습니다. 열대 밀림 수탈은 막대한 부로 이어지고, 막대한 부는 자본주의 경제를 발달시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런 추악한 역사를 감추기 원합니다. 보수 우파 학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떼어놓기 원합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는 에코 페미니즘에게 반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잔인한 독재라고 욕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조차 식민지 수탈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자유를 부르짖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그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식민지 수탈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나, 오히려 억압적이라고 알려진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식민지 수탈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막대한 생산력은 없습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진다면, 식민지 수탈은 사라질 테고, 식민지 수탈과 함께 막대한 생산력 역시 사라질 겁니다.
이건 갑자기 첨단 기술들과 자동화 기계들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진다고 해도, 첨단 기술들과 자동화 기계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무한 경쟁 시장 경제가 열대 밀림을 비롯해 자연 환경을 수탈하지 못하고 밑바닥 계급을 착취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4차 혁명이 난리 부르스를 추고 호들갑을 떨고 자동화 기계들이 들썩인다고 해도, 막대한 생산력은 존재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자동화 기계들이 늘어난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생산력보다 노동 시간인지 모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윤이 잉여 노동에서 비롯하고 잉여 노동이 잉여 노동 시간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자동화 기계들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동화 기계들을 평등하게 공유한다면, 사람들은 막대한 생산력보다 줄어든 노동 시간을 누릴지 모릅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면, '상대적으로' 생산량은 늘어날 겁니다. 더 적은 노동 시간이 더 많은 노동 시간과 똑같이 생산한다면, '상대적으로' 생산량은 늘어날 겁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의 영역을 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 가지 문제는 남습니다. 근본적으로 자동화 기계가 근대적인 진보에 속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가 사라진다면, 자동화 기계들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을지 모릅니다. 이른바 근대성 그 자체가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식민지 수탈이 사라진다면, 근대성은 정말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겁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7세기부터 서구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서구 자본주의가 외부 식민지(아메리카 수탈)보다 내부 식민지(유럽 공유지 수탈)에 기반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초기 서구 자본주의가 외부 식민지 수탈에 기반했든 내부 식민지 수탈에 기반했든, 결국 식민지 수탈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는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이후, 외부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에게 정말 막대한 부를 제공합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확장합니다. 21세기 오늘날, 제국주의와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부 및 내부 식민지 수탈이 사라진다면, 근대성은 엄청난 변화를 겪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SF 작가들 역시 이게 무슨 변화가 될지 알지 못합니다.
로봇, 인조인간, 똑똑한 개조 동물, 엄청난 자동화 기계, 인간 노동 그 자체의 해방…. 이런 것은 모두 허망한 꿈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이 4차 혁명과 기술적인 특이점을 떠든다고 해도, 이것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대성은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고, 인류 문명은 이걸 바로잡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식민지 수탈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근대성도 감히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칭 타칭 수두룩한 지식인들은 식민지 수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식민지 수탈을 미화하고, 왜곡하고, 은폐합니다. 그들은 너무 대단한 지식인들입니다. 그들은 너무 대단한 아가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