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링 빌리지>와 거대 괴수 도시
[온부-도시는 지구 생물권-인류 문명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혁명 마렵다." 이 트위터 게시글(링크)은 '혁명이 마렵다'고 표현합니다. 어라,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혁명을 마렵다고 느낄 수 있나요? 인간은 쉬아가 마렵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혁명은 쉬아가 아닙니다. 혁명과 쉬아는 다릅니다. 혁명과 쉬아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쉬아를 마렵다고 느낀다고 해도, 인간은 혁명이 마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트위터 게시글은 혁명이 마렵다고 표현합니다. 비단 이 게시글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혁명이 마렵다고 표현합니다. 엥, 이건 불가능합니다. 혁명이 쉬아가 아니기 때문에, 혁명이 마렵다고 느끼기는 불가능합니다.
비록 혁명이 마렵다고 느끼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이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이 사람들이 불가능을 표현하나요? 왜 이 사람들이 혁명이 마렵다고 표현하나요? 이 불가능은 비유입니다. 이 사람들은 혁명을 쉬아에 비유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경제는 너무 지배적입니다. 시장 경제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윤 축적입니다. 언제나 시장 경제는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원합니다. 언제나 시장 경제는 성장 그래프가 상승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보다 이윤은 커다란 가치를 얻습니다.
이윤 축적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이윤은 커다란 가치를 얻습니다. 인간보다 이윤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장 경제는 노동자들을 억압합니다. 아무리 노동자들이 인간들이라고 해도, 이 인간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인간들보다 이윤은 훨씬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경제가 지배적이고, 시장 경제에게 이윤 축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이윤 축적을 떠받듭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이윤 축적을 떠받들기 때문에, 교육, 언론, 예술 역시 이윤 축적을 떠받듭니다. 이윤 축적을 떠받들기 위해 언론들은 거짓말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언론들조차 거짓말들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 경제는 너무 악랄합니다. 비단 노동자들만 아니라 환경 오염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류는 자연을 파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관념은 지배적입니다. 기후 변화가 위험한 수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지구 생물권을 걱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류가 지구 환경을 파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커다란 착각입니다.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은 인류입니다. 분명히 이 가난한 민중들은 인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민중들이 엄청난 온실 가스들을 배출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들은 배출하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산업 단지들, 대규모 목장들, 대규모 교통 수단들 없이, 엄청난 온실 가스들을 배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이 대규모 산업 단지들을 소유하나요?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이 대규모 목장들, 대규모 교통 수단들을 소유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가난한 민중들과 달리, (제1세계) 부유한 자본가 계급은 대규모 산업 단지들, 대규모 목장들, 대규모 교통 수단들을 소유했습니다.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보다 (제1세계) 부유한 자본가 계급은 엄청난 온실 가스들을 배출했습니다. 왜 자본가 계급이 온실 가스들을 배출했나요? 화석 연료들이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때문입니다.
환경 운동은 기후 변화가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화석 연료들이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때문에, 지구 환경보다 이윤 축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환경 운동을 무시했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이윤 축적에 집착했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위험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윤 축적,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유발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이윤 축적을 떠받듭니다. 이윤 축적을 떠받들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기후 변화 책임을 왜곡하기 원합니다. 기후 변화 책임을 왜곡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인간들이 나쁘다고 지껄입니다. 이건 악랄한 거짓말입니다.
많은 가난한 민중들은 인간들입니다. 이 많은 인간들은 엄청난 온실 가스들을 배출하지 않았습니다. 이윤 축적을 떠받들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인간들이 나쁘다고 지껄입니다. 이윤 축적, 시장 경제가 악랄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혁명은 육체적이지 않습니다. "아아, 시장 경제는 너무 악랄해. 우리는 혁명해야 해!" 아무리 혁명이 중요하다고 해도, 혁명은 추상적입니다. 인간 육체는 혁명이 아닙니다. 혁명과 달리, 쉬아는 육체적입니다. 인간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쉬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쉬아할 수 있는 것처럼, 혁명보다 쉬아는 육체적입니다. 인간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적인 것을 친숙하다고 느낍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것을 친숙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혁명보다 쉬아가 육체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혁명보다 쉬아를 친숙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혁명이 마렵다'고 표현할 겁니다. 비록 혁명이 마렵다고 느끼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혁명을 쉬아에게 비유합니다. 이 사람들이 비유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이 불가능을 표현하는 것처럼, 비유는 불가능일 수 있습니다. 이 불가능은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닙니다.
[혁명이 마렵나요? 오호~, <자본론>은 혁명하기 위한 대안일 수 있습니다.]
비록 '혁명이 마렵다'고 느끼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 표현은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표현을 황당무계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가능을 비유라고 해석할 겁니다. 혁명이 쉬아일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어떤 문화가 불가능을 표현한다고 해도, 이 문화는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문화는 비유일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 역시 비유일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도시 건설 게임입니다. <심시티 2000>부터 <시티즈: 스카이라인>까지, 이 게임들이 도시 건설 게임이기 때문에, <심시티 2000>, <시티즈: 스카이라인>, <원더링 빌리지>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원더링 빌리지>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고유한 특성 때문에, <원더링 빌리지>는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과 다릅니다. <심시티 2000>부터 <시티즈: 스카이라인>까지,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에게는 이 고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이 특성이 무엇인가요? 대답은 '온부'일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대규모 독성들이 퍼졌기 때문에, 문명은 멸망 위기에 빠졌습니다. 대규모 독성들을 피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방황합니다. 우연히 이 난민들은 전설적인 거대 괴수를 발견합니다. 거대 괴수는 아주 어마어마합니다. 오오~, 문자 그대로, 거대 괴수는 걸어다니는 산과 비슷합니다.
이 난민들은 거대 괴수, 걸어다니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거대 괴수 등에서 이 난민들은 마을을 건설합니다. 이 난민들이 마을을 건설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난민들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주민들입니다. 거대 괴수 등은 정착하기 위한 터전이 됩니다. 거대 괴수 이름은 '온부'입니다. 몇 백 년 동안, 온부는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부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처럼, 이 거대 괴수에게는 엄청난 고집이 있습니다. 이따금 온부는 해로운 오염 지대를 향합니다. 비록 오염 지대가 온부에게 피해를 미친다고 해도, 온부는 오염 지대를 향합니다. 아무리 주민들이 말린다고 해도, 어휴~, 이 고집불통 거대 괴수는 듣지 않습니다.
주민들과 온부는 한 배를 탔습니다. 주민들과 온부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아니, 문자 그대로, 주민들은 온부를 탔습니다. 온부에게서 주민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거대 괴수는 정착하기 위한 터전입니다. 이 거대 괴수에게서 주민들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주민들과 온부는 '진짜' 운명 공동체입니다. 만약 온부가 죽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패배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주민들만 아니라 온부 역시 조종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 괴수를 조종합니다. <원더링 빌리지>에게는 이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도시 건설 게임에서 도시는 거대 괴수를 가리킵니다. <심시티 2000>에서 도시가 거대 괴수를 가리키나요?
<시티즈: 스카이라인>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거대 괴수를 조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심시티 2000>에서 도시는 거대 괴수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거대 괴수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은 거대 괴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 괴수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형적인 도시 건설 게임이 거대 괴수를 묘사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도시 건설 게임들과 달리, <원더링 빌리지>는 도시가 거대 괴수라고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 이 거대 괴수를 조종합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전형적인 도시 건설 게임들과 다릅니다.
<심시티 2000>과 달리, 전형적인 도시 건설 게임들과 달리, <원더링 빌리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암울합니다. 암울한 주제는 암울한 형식을 요구합니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암울한 문장들, 암울한 그림들, 암울한 음악들을 전달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암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대규모 독성들이 퍼졌고 문명이 몰락했다고 해도, <원더링 빌리지>는 아기자기한 그림체를 선사합니다. 이 아기자기한 그림체는 명랑한 동화 같습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싫어한다고 해도, <원더링 빌리지>는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암울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부담스럽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이미 현실은 암울합니다. 코비드-19부터 기후 변화까지, 이미 현실은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이미 현실이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허구(픽션)가 명랑한 세계를 묘사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왜 심지어 허구(픽션)조차 암울해야 하나요? 왜 심지어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연극, 뮤지컬,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조차 암울해야 하나요? 현실이 암울하기 때문에, 소설부터 비디오 게임까지, 어떤 사람들은 허구적인 세계가 명랑한 세계이기 원할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명랑한 동화 같습니다.
"어휴,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야. 현실처럼, 허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해. 대안은 존재하지 않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아. 훨씬 나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해." 이 냉소는 드물지 않습니다. SF/판타지 소설가로서 엘리너 아나슨은 이 냉소가 드물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슬라보예 지젝 역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미 현실이 환경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만약 허구적인 세계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착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냉소에 빠질지 모릅니다. <원더링 빌리지>가 명랑한 그림체를 자랑하기 때문에, 이 명랑한 그림체는 냉소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에게는 세 모드들(마을, 온부, 세계 지도)이 있습니다. '마을' 모드는 표준적인 도시 건설 게임과 비슷합니다. 특히, <심시티 2000>, <시티즈: 스카이라인>보다 <원더링 빌리지>는 <드워프 포트리스>, <림월드>, <산소 미포함>에 가깝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작업들을 명령하고 우선 순위를 결정한 이후, 인공 지능 대리자는 주민들을 배정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노동자 규모, 우선 순위, 이동 경로를 계산하고 최고 생산량을 유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드워프 포트리스>, <림월드>, <산소 미포함>과 달리, <원더링 빌리지>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 괴수 온부와 상호 작용합니다.
인간처럼, 온부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만약 너무 오랜 동안 온부가 걷는다면, 온부는 피로하다고 느낄 테고 드러누울 겁니다. 인간처럼, 온부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만약 온부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온부는 굶어죽을 겁니다. '온부' 모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 괴수 상태를 확인하고 피로, 허기, 건강을 관리해야 합니다. 피로, 허기,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기술들을 연구하고 여러 시설들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러 기술들을 연구하고 여러 시설들을 건설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들을 소비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비단 온부만 아니라 마을 발전 역시 이 자원들을 요구합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암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명랑한 동화 같습니다.]
마을 발전을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기술들을 연구하고 건물들을 건설합니다. 온부 기술들, 시설들처럼, 마을 기술들, 건물들 역시 똑같은 자원들을 요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어떻게 자원들을 얻고 자원들을 배분할지 계산해야 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계산하지 못한다면, 온부와 마을은 함께 몰락할 겁니다. 게다가 온부는 육체적입니다. 육체적인 온부는 순대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 혈액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온부 혈액은 먹거리, 순대가 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많은 혈액을 채취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많은 순대들을 얻을 테고, 마을 발전 역시 훨씬 빠를 겁니다.
하지만 만약 온부가 많은 혈액을 잃는다면, 온부 건강은 좋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온부가 쓰러진다면, 마을 역시 망할 겁니다. 만약 마을이 망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패배할 겁니다. 아무리 온부 혈액이 마을 발전을 위한 자원일 수 있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너무 많은 혈액을 채취해서는 안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무리 빠른 성장을 위해 게임 플레이어가 온부 혈액에 의존할 수 있다고 해도,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온부는 쓰러질 테고, 게임 플레이어는 패배할 겁니다. 온부 혈액처럼, <원더링 빌리지>는 지속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이 지속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다고 해도,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은 거대 괴수가 움직이는 도시라고 설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괴수 혈액을 채취하지 않습니다. 온부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마을 발전을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생명체를 죽일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경제 성장과 생명 윤리는 대립합니다. 특히, 전설적인 거대 괴수에게서 이 생명 윤리는 비롯합니다. 전설적인 거대 괴수에게서 이 생명 윤리가 비롯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이 윤리를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개미보다 거대 괴수는 훨씬 특별합니다.
이규보는 <슬견설>을 썼습니다. <슬견설>은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작은 개미보다 전설적인 거대 괴수를 훨씬 특별하다고 느낄 겁니다. 전설적인 거대 괴수가 훨씬 특별하기 때문에, 생명 윤리 역시 훨씬 특별할 수 있습니다. 생명 윤리가 훨씬 특별하기 때문에, 빠른 경제 성장과 생명 윤리가 대립할 때, 이 대립은 지속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 건설 게임들보다 <원더링 빌리지>는 지속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아…,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나는 전설적인 거대 괴수를 죽였어. 내가 너무 탐욕스러웠나?"
온부는 도로를 걷습니다. '세계 지도' 모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작위로, 도로에서 좋은 환경들과 나쁜 환경들은 나타납니다. 온부가 교차로에 도착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경로를 지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지시한다고 해도, 온부는 지시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좋은 방향을 지시한다고 해도, 온부는 좋은 방향을 거부하고 나쁜 방향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온부가 독성 지대를 선택한다면, 독성 지대에서 온부는 병들 겁니다. 독성 식물들 때문에, 비단 온부만 아니라 마을 역시 위기에 빠질 겁니다.
달리기, 멈추기, 수면 참기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기술들을 연구한다면, 명령들 역시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만약 온부가 게임 플레이어를 믿지 않는다면, 온부는 나쁜 방향으로 향할 겁니다. 온부가 게임 플레이어를 거절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가 너무 밉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온부를 원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온부를 원망한다고 해도, 온부와 마을 사람들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대 괴수에게 의지합니다. 뭐라고 게임 플레이어가 느끼든, 온부와 마을 사람들은 공존해야 합니다.
<원더링 빌리지>가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지구 생물권-인류 문명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부는 육체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살아있는 거대 괴수에게 의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를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느낍니다. 인류 문명 역시 이 살아있는 행성에게 의지합니다. 만약 온부가 쓰러진다면, 마을은 망할 겁니다. 만약 지구 생물권이 커다란 위기에 빠진다면, 인류 문명 역시 커다란 위기에 빠질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 역시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온부, 이 괴수에게서 마을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구, 이 행성에서 인류 문명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젠가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들, 소행성들을 개척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인류 문명은 대규모 우주 정거장들을 건설할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행성 개척이 가능하다면, 만약 대규모 우주 정거장들이 가능하다면,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날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언제 이것들이 가능한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은 언제 이것들이 가능한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외계 행성 개척은 오랜 시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외계 행성 개척이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면, 오랜 시간 동안,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구 자연에서 인류 문명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계 시장 경제는 지속 가능성을 싫어합니다. 세계 시장 경제는 빠른 성장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대형 영리 기업들이 매출 그래프가 상승하기 원하는 것처럼, 세계 시장 경제는 탈성장, 역성장, 느린 성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빠른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빠른 성장 그래프와 물질 사용량 그래프는 비례합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빠른 성장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계 시장 경제는 엄청난 자원들을 소비합니다. 어떻게 지속 가능성과 엄청난 자원 소비들이 공존할 수 있나요? 세계 시장 경제가 엄청난 소비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세계 시장 경제와 지속 가능성은 대립합니다.
시장 경제와 지속 가능성 중에서 환경 운동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시장 경제를 선택한다면, 환경 운동은 지속 가능성을 버릴 겁니다. 지속 가능성 없이, 환경 운동은 승리하지 못할 겁니다. 지속 가능성을 선택하기 위해 환경 운동은 시장 경제를 버려야 합니다. 이미 이윤 축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시장 경제를 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비록 시장 경제를 버리기가 쉽지 않다고 해도, 시장 경제, 빠른 성장, 엄청난 소비들은 인류 문명을 환경 아포칼립스에 빠뜨릴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 운동이 시장 경제를 버린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는 환경 운동과 시장 경제가 대립한다고 암시할 수 있습니다. <원더링 빌리지>가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 도시 건설 게임은 소중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원더링 빌리지>를 황당무계한 망상이라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원더링 빌리지>와 현실은 다릅니다. <원더링 빌리지>와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원더링 빌리지>는 비(非)현실적입니다. <원더링 빌리지>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게임을 황당무계한 망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원더링 빌리지>는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비유는 불가능일 수 있습니다. 혁명이 쉬아인 것처럼, 비록 비유가 불가능을 표현한다고 해도, 비유는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원더링 빌리지>가 불가능(거대 괴수)을 표현한다고 해도, 이 도시 건설 게임은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 괴수가 지구 생물권을 비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없이, 우리는 지구가 중요하다고 인식할 수 있으나, 온부가 먹는 것처럼, 온부가 피를 흘리는 것처럼, 온부는 육체적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비유를 친숙하다고 느낍니다.
※ 게임 <The Wandering Village>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121640/The_Wandering_Village/
※ 사진 <Green Leafed …> 출처: Satria Bagaskara,
https://www.pexels.com/photo/green-leafed-tree-1336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