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포지>와 오래된 판타지, 짧은 SF
이 게임 스크린샷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아니면 판타지인가요? 이 장면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두 천체를 묘사하고, 현실에서 우리가 두 천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 스크린샷에서 두 천체는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비단 두 천체만 아니라 건물들 역시 비현실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 건물들을 볼 수 없습니다. 두 천체와 건물들은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비현실 설정이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거나 판타지 같습니다. 두 장르 중에서 이 장면이 어떤 쪽인가요? 대답하기는 애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판타지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이 게임은 <스카이포지>입니다. <스카이포지>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이 판타지 같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네, 이 느낌은 틀리지 않습니다. <스카이포지>가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스 판타지이기 때문입니다. <스카이포지>는 여러 신비로운 과학 기술들을 묘사하나, 한편으로 이 게임은 여러 판타지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만약 게임 등장인물이 갑옷을 입고, 장검과 방패를 들고, 괴물들을 때려잡는다면, 이 장면은 판타지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스카이포지>가 (중세 유럽) 판타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스카이포지>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사이언스 판타지를 구분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던전스 앤 드래곤스> 같은 중세 판타지에 가깝고, 사이언스 픽션은 <중력의 임무> 같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앨리스 브래들리 셸던)는 <별의 눈물>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카이포지>가 판타지에 가까운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별의 눈물>이 판타지에 가깝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할 클레멘트는 <중력의 임무>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반면, <별의 눈물>은 (중세)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별의 눈물>이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에, 이 단편 소설은 진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진짜 사이언스 픽션이나, <별의 눈물>은 <중력의 임무>와 다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이언스 픽션(<중력의 임무>)과 사이언스 판타지(<별의 눈물>, <스카이포지>)를 구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별의 눈물>이 사이언스 판타지라면, 어떻게 <중력의 임무>가 진짜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이 소설은 벌레 외계인을 묘사합니다.
<중력의 임무>에서 아주 작은 벌레 같은 외계인은 인간과 능숙하게 소통합니다. 외계 행성(이질적인 중력)에서 이 외계인이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지구인)과 달리, 이 외계인은 이질적인 사고 방식을 드러냅니다. 외계 행성에서 중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외계인은 뜀뛰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구에서 인간은 폴짝폴짝 뛸 수 있으나, 중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외계 행성에서 이 외계인은 폴짝폴짝 뛰지 못합니다. 이 외계인은 추락을 엄청나게 두려워합니다. 이 외계인은 추락을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이 외계인은 인간과 능숙하게 소통합니다. 이게 '진짜 SF'인가요?
만약 아주 작은 벌레 같은 외계인이 인간과 능숙하게 소통한다면, 이게 진지한 과학 고증일 수 있나요? 이게 진짜 SF 설정이 될 수 있나요? 아무리 <중력의 임무>가 어렵고 복잡한 과학 설정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아주 작은 벌레 외계인이 진지한 SF 설정인가요? 글쎄요, 어떤 사람들에게 이 외계인은 판타지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별의 눈물>에서 외계인이 판타지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중력의 임무>에서 외계인은 판타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벌레 외계인이 판타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별의 눈물>이 판타지에 가까운 것처럼, <중력의 임무>는 SF보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중력의 임무>가 복잡한 과학 설정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벌레 외계인 때문에, 이 소설은 SF보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이 하드 SF 소설은 판타지를 포함합니다. <중력의 임무>가 판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중력의 임무>는 <별의 눈물>과 <스카이포지>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별의 눈물>과 <스카이포지>가 판타지에 가깝고, <중력의 임무>가 <별의 눈물>과 <스카이포지>와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중력의 임무>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이 소설은 판타지를 포함합니다. 비단 <중력의 임무>만 아니라 다른 여러 하드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별의 눈물>과 교집합을 형성하거나 <스카이포지>에 가까운 것처럼, 적어도 SF 소설들이 <별의 눈물>과 <스카이포지> 같은 판타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SF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때, <어스시의 마법사> 같은 판타지 소설이 함께 따라오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한 지붕 두 가족입니다. 이건 언제나 두 장르가 똑같은 부류에 속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인조인간이 비행 자동차를 운전하고 초고층 건물 옥상으로 날아간다면, 아무도 이게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라고 주장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조인간이 비행 자동차를 정말 운전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무리 첨단 과학 기술들이 놀랍다고 해도, 인조인간이 필연적인가요? 첨단 과학 기술들이 인조인간을 필연적으로 만드나요? 과학자들이 이것을 100% 완벽하게 장담할 수 있나요? 아니, 과학자들은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인조인간을 완벽하게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미래 사회를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그린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 인조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린 드래곤처럼, 인조인간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이 관점에서 그린 드래곤과 인조인간은 비슷합니다.
인조인간(이라는 상상)이 미래 첨단 과학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그린 드래곤보다 인조인간에게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린 드래곤보다 인조인간에게는 훨씬 높은 개연성이 있습니다. 인조인간에게 높은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그린 드래곤(판타지)과 인조인간(SF)은 다릅니다.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은 다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개연성을 내세우고 판타지와 Adios~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연성이 훨씬 높다고 해도, 인조인간이 비현실 설정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 관점에서 그린 드래곤과 인조인간은 다르지 않습니다. 판타지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개연성을 어느 정도 놓는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판타지에 가까워질 겁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과 개연성 사이가 어느 정도 멀어진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판타지에 가까워질 겁니다. 그리고 사이언스 픽션은 개연성을 쉽게 놓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미래 첨단 과학이 개연성을 보장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개연성과 쉽게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제까지 인류 문화가 과학보다 신화에 친숙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대단하다고 찬양합니다. 분명히 과학은 아주 아주 대단합니다.
과학이 아주 아주 대단하기 때문에, 인류 문화는 사이언스 픽션을 만듭니다. 이제까지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벗어나지 못했으나, 미래 첨단 과학 덕분에,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벗어날지 모릅니다. 개척 우주선은 외계 항성계로 항해하고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할지 모릅니다. 과거 사람들은 유전자 지도를 알지 못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과학자들이 유전자 지도를 그린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 과학자들이 유전자 지도를 그리기 때문에, 홍수 방주가 많은 동물들을 싣는 것처럼, 개척 우주선은 다양한 유전자 지도들을 운송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생태계 테라포밍을 위한 밑거름입니다.
외계 행성에서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개척 우주선에게는 생물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홍수 방주처럼, 개척 우주선이 많은 동물들을 실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홍수 설화 방주와 달리, SF 개척 우주선에게는 유전 공학 기술이 있습니다. 개척 우주선은 유전자 지도를 3D 생체 복사기에 집어넣고 동물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생체 복사기에게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개척 우주선은 생체 재료들을 운송해야 하나, 야생 동물을 운송하기보다 생체 재료를 운송하기는 훨씬 편리할 겁니다. 동물보다 생체 재료들이 훨씬 단순한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척 우주선에게 열대 밀림 포식자가 필요하다면, 개척 우주선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직접 운송하기보다 호랑이 유전자 지도와 생체 재료들과 3D 생체 복사기를 운송할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 우주선은 호랑이 유전자 지도와 생체 재료들을 3D 복사기에 집어넣습니다. 3D 복사기는 유전자 지도를 해석하고 생체 재료들을 조합합니다. 첨단 기술은 살아있는 수마트라 호랑이를 복제합니다. 개척 우주선은 살아있는 열대 밀림 포식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개척 우주선은 비단 복제 호랑이만 아니라 많은 복제 생명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외계 행성은 살아있는 생태계가 됩니다.
사이언스(과학)가 발달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 행성이 살아있는 생태계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이 살아있는 생태계가 되는 것처럼, 과학은 아주 아주 대단합니다. 문제는 짧은 역사입니다. 인류 문명 역사는 수 천 년에 달합니다. 이른바 세계 4대 문명 이론은 B.C. 4000~B.C. 3000년에서 인류 문명들이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이 아메리카 문명을 빠뜨리기 때문에, 이 이론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는지 모르나, 분명히 4대 문명 이론은 인류 문명이 수 천 년 역사에 닿는다고 설명합니다. 수 천 년 문명 역사 중에서 얼마나 과학 역사가 기나긴 비중을 차지하나요?
대답은 너무 부정적입니다. 19세기 이후, 산업 혁명이 발달했기 때문에, 19세기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과학 역사는 그저 200년을 넘을 뿐입니다. 신화 시대, 종교 시대에서 19세기 사회가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19세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과학 역사는 훨씬 짧을 겁니다. 19세기 없이, 과학 역사는 그저 100년을 넘을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17세기 계몽주의를 고려한다고 해도, 과학 역사는 그저 400년을 넘을 뿐입니다. 애석하게도 과학 역사는 1,000년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면, 신화(와 종교) 역사는 수 천 년을 넘어갑니다. 신화(와 종교)는 장대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학 역사가 그저 몇 백 년에 불과하고, 신화(와 종교) 역사가 수 천 년을 넘어가기 때문에, 아주 오랜 동안, 인류 문화는 과학보다 신화와 함께 흘렀습니다. 인류 문화가 과학보다 신화와 함께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쳤기 때문에, 인류 문화는 과학보다 신화와 친숙합니다. 개척 우주선 이야기는 아주 아주 대단하나, 17세기 사람들은 3D 복사기와 복제 호랑이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우주선 바이오 돔을 좋아합니다. 저는 우주선 바이오 돔을 덕질하기 원합니다. 제가 21세기 초반 사회에 속하기 때문에, 저는 바이오 돔을 덕질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사회에서 이 덕질은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제가 17세기 사회에 속했다면, 저는 개척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한다고 덕질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우주선 바이오 돔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약 제가 이 설정을 덕질하지 못한다면, 이건 너무 허전하고 막막할 겁니다. 만약 제가 17세기 사회에 속했다면, 제가 덕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너무 허전하고 막막할 겁니다. 17세기 사회에서 저는 그저 프랜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같은 계몽주의 문학을 덕질할 뿐입니다. 이 계몽주의 문학은 인공 생태계를 묘사하나, 21세기 초반 하드 SF 설정과 달리, 17세기 계몽주의 인공 생태계는 다소 초라합니다. 아아, 이건 너무 슬픕니다.
21세기 초반 SF 설정보다 17세기 계몽주의 인공 생태계가 다소 초라한 것처럼, 과학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에, SF 역사는 짧습니다. SF 역사가 짧기 때문에, SF 덕질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21세기 초반 SF 독자가 17세기 사회로 돌아간다면, SF 독자는 우주선 바이오 돔보다 자연 정령을 훨씬 쉽게 읽을 겁니다. 17세기 사변 문학은 개척 우주선, 복제 호랑이보다 숲의 마녀, 호랑이 정령과 잘 어울립니다. 17세기 문학이 개척 우주선보다 숲의 마녀와 잘 어울리는 것처럼, SF 덕질은 제한적입니다. SF 덕질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가끔 저는 이게 허전하고 막막하다고 느낍니다. 아아….
프랜시스 베이컨이 <뉴 아틀란티스>를 썼고, 마가렛 캐번디시가 <불타는 세계>를 썼기 때문에, 17세기 사회에서 SF 독자는 원형적인 SF 문학을 덕질할 수 있으나, 문자 그대로 이건 '원형'입니다. 이건 양산형(프로덕션 타입)보다 원형(프로토 타입)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관점에서 <불타는 세계>는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인류 문화가 과학보다 신화와 훨씬 친숙하기 때문에, 원형적인 SF 문학이 나타났을 때, SF 문학은 판타지에 가까웠습니다. 19세기 이후,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훨씬 전형적인 SF 소설들을 썼으나, 심지어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조차 SF들과 판타지들을 함께 썼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 인류 문화에서 과학보다 신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들을 함께 썼습니다. 과학 역사가 짧기 때문에, 19세기부터 21세기 초반까지, SF 역사는 그저 200년을 넘을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계몽주의 문학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SF 역사는 그저 400년을 넘을 뿐입니다. 수 천 년 전에, 이미 고대 신화들은 인류 문화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나, 이 유구한 신화 역사 앞에서 200~400년짜리 SF 역사는 너무 초라합니다. SF 역사가 초라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대립한다면, 저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편들기 원합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에서 고위 드루이드가 생물 다양성을 퍼뜨리고 자연 생태계를 조성한다고 해도, 아무리 개척 우주선과 고위 드루이드에게 가상의 생태계 테라포밍이 공통점이라고 해도, 저는 고위 드루이드보다 개척 우주선을 편들기 원합니다. 비록 개척 우주선이 황당무계한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개척 우주선이 기술 진보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저는 기술 진보적인 분위기를 편들기 원합니다. 몇 십 년 이후, 몇 백 년 이후, 미래 문명은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할지 모릅니다.
미래 문명이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할지 모르고, 사이언스 픽션에서 개척 우주선이 자연 생태계를 테라포밍하기 때문에, 비록 개척 우주선이 비현실 설정이라고 해도, 저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편들기 원합니다. 적어도 고위 드루이드보다 개척 우주선은 훨씬 기술 진보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제가 기술 진보적인 분위기를 편들기 때문에, 저는 사변 문학들, 환상 문학들 중에서 하드 SF 소설들이 가장 찬란한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가장 정수이기 때문에, 저는 <별의 눈물>보다 <중력의 임무>를 편들기 원합니다. 아아, 하지만 SF 역사는 짧습니다.
몇 백 년 이후, 만약 여전히 인류 문명이 번영한다면, 미래 SF 덕후들은 SF 역사가 짧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역사가 천 년을 넘어간다면, SF 역사는 신화 역사와 어느 정도 대등할 겁니다. 몇 천 년 이후, 만약 여전히 인류 문명이 번영한다면, 미래 SF 덕후들은 SF 역사가 유구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SF 역사가 몇 천 년을 자랑하기 때문에, SF 역사와 신화 역사는 대등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저는 미래 SF 덕후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들이 유구한 SF 역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 덕후들과 달리, 21세기 초반 오늘날, 저는 SF 역사가 너무 짧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SF 역사가 그저 200년에 불과한 것처럼, 아무리 제가 <뉴 아틀란티스>와 <불타는 세계> 같은 17세기 계몽주의 문학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SF 역사가 감히 신화 역사에게 깝치지 못하는 것처럼, 인류 역사에서 신화는 아주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신화가 아주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여전히 인류 문화는 신화와 함께 흐르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인류 문화가 신화와 함께 흐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와 함께 흐르는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신화와 함께 흐르기 때문에, 여전히 <별의 눈물>과 <스카이포지>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들은 인기를 끄는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가 인기를 끌기 때문에, <별의 눈물>과 <중력의 임무>는 다르지 않은지 모릅니다. <스카이포지>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가 인기를 끄는 것처럼, <별의 눈물>과 <중력의 임무>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과학은 아주 대단하나, 여전히 신화 시대에서 인류는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몇 백 년 이후, 미래 인류는 과학 역사가 신화 역사와 어느 정도 대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학 역사가 천 년을 넘어간다면, 과학 역사는 신화 역사와 어느 정도 대등할 겁니다. 몇 천 년 이후, 만약 여전히 인류 문명이 번영한다면, 미래 인류는 과학 역사가 유구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 역사가 몇 천 년을 자랑하기 때문에, 과학 역사와 신화 역사는 대등할 수 있습니다. 반면, 21세기 초반 오늘날, 인류는 과학 역사가 그저 200~400년에 불과하다고 인정합니다. 수 천 년 동안, 과학보다 신화가 훠어어어얼씬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여전히 과학 시대보다 신화 시대에서 인류는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과학 시대와 신화 시대는 함께 흐르는지 모릅니다. 수 천 년 이후, 미래 인류는 신화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21세기 초반 인류에게 이 주장은 시기상조입니다. 만약 이 분석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건 여전히 인류가 신화적(종교적)이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믿기 원하는 것을 믿을 뿐인지 모릅니다. 뭔가가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믿나요? 아니, 우리가 뭔가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우기는지 모릅니다. 녹색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가 생물 다양성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자본주의는 생태계를 파괴하나,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녹색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해결한다고 떠듭니다. 이건 엉터리 종교, 망상입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그저 녹색 자본주의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녹색 자본주의가 엉터리 종교인 것처럼, 생태 사회주의는 엉터리 종교인지 모릅니다. 저는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합니다. 생태 사회주의가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제가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하나요? 아니, 저는 이게 그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을 뿐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저 제가 믿기 원하는 것을 믿을 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저께 6월 2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근대 철학 이론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떠듭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떠들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생물 다양성을 함께 떠들기 원한다면, 생태 사회주의는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생태 사회주의가 객관적인 사실, 합리적인 과학, 논리적인 계몽이라고 100%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녹색 빨갱이 광신도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과 생물 다양성을 가장 열심히 떠들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과학보다 이 단순한 사실 때문에, 기후 변화 시대에서 생태 사회주의는 소중합니다.
※ 게임 <스카이포지>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14530/Skyforge/
※ 사진 <Bali Indonesia Jungle Nature> 출처: Dimitri Dim,
https://www.pexels.com/photo/bali-indonesia-jungle-nature-1802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