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과 아르켈론, 무와 부재 해석
[만약 이런 환상적인 고대 바다에 프로토스테가가 없다면, 이게 '무'인가요, 아니면 '부재'인가요?]
12월 25일은 아주 특별합니다. 12월 25일이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이건 치명적인 타격입니다. 평소에 어떤 모태 솔로들은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겨울 날씨가 춥다고 해도, 이런 모태 솔로들은 주머니 속의 손난로가 그저 생체 난로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날짜가 12월 25일에 가까워진다면, 이런 모태 솔로들 역시 옆구리가 너무 허전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무리 모태 솔로에게 강철 같은 심장이 있다고 해도, 연인이 옆구리를 채우지 않는다면, 모태 솔로는 눈물에 젖은 글뤼바인을 홀짝이고 12월 24일을 보내야 할 겁니다.
12월 24일에는 이런 기대 심리가 있습니다. 만약 모태 솔로가 연인이 아니라 눈물에 젖은 글뤼바인과 함께 12월 24일을 보내야 한다면, 모태 솔로는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해 12월 26일로 건너뛰고 싶어할 겁니다. 반면, 다른 날짜들에는 기대 심리가 없습니다. 3월 8일에 심쿵심쿵한 저녁 데이트 약속이 없다고 해도, 모태 솔로는 쓸쓸한 글뤼바인을 향해 외로운 한숨을 내쉬지 않습니다. 3월 8일에 데이트 약속이 없다고 해도, 모태 솔로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3월 8일과 12월 24일에 똑같이 연인이 옆구리를 채우지 않는다고 해도, 12월 24일은 외로운 한숨이 되나, 3월 8일은 실망이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모태 솔로가 꿋꿋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12월 24일 저녁에 모태 솔로는 허전한 옆구리를 강하게 느껴야 합니다. 연인 없는 12월 24일 저녁은 '부재(不在)'입니다. 왜 이게 '부재(不在)'인가요? 뭔가가 있어야 함에도, 그게 없기 때문입니다. 12월 24일 저녁은 화기애애하고 두근거리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분위기에는 연인이 필요합니다. 모태 솔로에게 연인이 없다면, 모태 솔로는 이런 분위기를 채우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12월 24일 허전한 옆구리는 '부재(不在)'가 됩니다. 반면, 3월 8일에 데이트 약속이 없다고 해도, 모태 솔로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3월 8일에 화기애애하고 두근거리는 분위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3월 8일에 두근두근 저녁 데이트 약속이 없다고 해도, 이건 부재가 아닙니다. 이건 '무(無)'입니다. 어쩌면 모태 솔로는 거리 행진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3월 8일에는 달달한 분위기보다 급진적인 분위가 있고, 중요한 것은 데이트 약속보다 거리 행진입니다. 3월 8일에 모태 솔로는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기리고 급진적인 깃발을 휘두르기 원할지 모릅니다. 3월 8일에 거리 행진이 없다면, 모태 솔로에게 이건 부재가 됩니다. 무(無)와 부재(不在)는 모두 '뭔가가 없다'고 가리킵니다. 하지만 의미는 크게 다릅니다. 무(無)는 없음 그 자체입니다. 반면, 부재(不在)는 뭔가가 있어야 함에도 그게 없다고 가리킵니다.
평소에 모태 솔로에게 연인이 없다고 해도, 이건 부재보다 무(無)입니다. 연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인은 그저 존재하지 않을 뿐입니다. 연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평소에 모태 솔로는 연인을 사귀고 싶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3월 8일에 텅 빈 옆구리는 무입니다. 반면, 12월 24일 저녁에 텅 빈 옆구리는 부재(不在)가 됩니다. 12월 24일 분위기가 아주 달달하고 부드럽고 화기애애하기 때문에, 12월 24일에 허전한 옆구리는 부재가 됩니다. 그래서 모태 솔로는 눈물에 젖은 글뤼바인을 홀짝여야 합니다. 어쩌면 외로운 밤을 밀어내기 위해 모태 솔로는 로맨스 만화들을 독파할지 모릅니다.
나나지 나가무가 그린 <파르페틱> 같은 로맨스 만화는 허전한 옆구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無)와 부재(不在)는 다릅니다. 이런 사례는 어떻게 무와 부재가 다른지 보여줍니다. 무와 부재가 똑같이 '뭔가가 없다'고 가리킨다고 해도, 무와 부재에는 이런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부재에게는 선행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기대합니다. 그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부재를 느낍니다.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무를 느끼거나 미약한 부재를 느낄 겁니다. 상황이 비슷하다고 해도, 선행 조건 때문에, 상황은 무가 되거나 부재가 됩니다.
모태 솔로에게 연인이 없다면, 이건 무(無)가 되거나 부재(不在)가 됩니다. 여기에서 선행 조건은 12월 24일 저녁의 달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선행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모태 솔로는 "뭐, 멋진 남자와 모켈레 음벰베에게는 공통점이 있어. 양쪽 모두 그저 환상종에 불과해."라고 중얼거리고 홀가분하게 저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어떻게 상황이 무와 부재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이건 12월 24일의 허전한 옆구리가 '존재와 무'를 논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에게 '존재와 무'는 가장 원론적인 주제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12월 24일의 허전한 옆구리는 '존재와 무' 논증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존재와 무' 논증에게 12월 24일의 허전한 옆구리는 적절한 사례가 아닐 겁니다. 이게 적절한 사례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이건 어떻게 무와 부재가 다른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와 부재는 텍스트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텍스트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들은 모든 우주 만물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많은 텍스트들은 의도적으로 어떤 것들을 생략합니다. 텍스트들은 중요한 뭔가를 잊습니다. 텍스트들은 어떤 것들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텍스트들 속에는 뭔가가 없습니다. 하지만 텍스트 속에 '뭔가가 없다'고 해도, 이게 '무'인가요, 아니면 이게 '부재'인가요?
나나지 나마구가 그린 <파르페틱>에는 고대 바다 거북 아르켈론이 없습니다. 네, 당연히 이 만화에는 아르켈론이 없습니다. <파르페틱>은 하이틴 로맨스 만화입니다. 카메야마 후코는 평범한 일본 여자 고등학생입니다. 만화 시점은 카메야마 후코가 평범한 소녀라고 온 몸으로 증언합니다. 물론 언제나 로맨스 만화들이 그러는 것처럼, 평범한 소녀 카메야마 후코는 (평범하지 않게) 훈훈한 이치와 쾌활한 다이야와 만납니다. 훈훈한 이치와 쾌활한 다이야는 카메야마 후코를 좋아하고, <파르페틱>은 전형적인 고등학교 로맨스로 흘러갑니다. 이런 로맨스 만화에서 훈훈한 남주는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맨스 만화에서 이치 같은 훈훈한 남주가 빠진다면, 로맨스 만화는 화기애애함을 잃을 겁니다. 하지만 만화 독자들이 훈훈한 이치를 응원하거나 쾌활한 다이야를 선호한다고 해도, 결국 만화 독자들은 고대 바다 거북 아르켈론을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만화 <파르페틱>이 아르켈론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만화 독자들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반면, 소설 <상흔>은 다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에는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있습니다. 어쩌면 소설 속의 바닷속에는 고대 바다 거북 아르켈론이 있을지 모릅니다.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는 고대 해양 동물입니다.
비록 플레시오사우루스보다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선조라고 해도,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는 모두 고대 해양 동물입니다. 다른 두 시대에서 두 동물이 살았다고 해도, 21세기 초반 독자에게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는 고대 해양 동물입니다. <상흔>은 고생물학 고증을 뒤섞고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를 함께 언급합니다. 이 소설이 스팀펑크 판타지이기 때문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로서 <상흔>은 온갖 고생물학 고증들을 뒤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바닷속에는 아르켈론 역시 있는지 모릅니다. 수면 위에서 증기 선박들이 두 바퀴를 돌리는 동안, 바닷속에서 아르켈론은 우아하게 헤엄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 <상흔>이 아르켈론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바스-라그 바다에 정말 아르켈론이 있는지 100% 퍼펙틀리하게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바스-라그 바다에 플레시오사우루스와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있기 때문에, 독자는 바스-라그 바다에 아르켈론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건 논리적인 추측입니다. 하지만 이게 논리적인 추측이라고 해도, 추측은 추측입니다. 추측은 확신이 아닙니다. 소설 <상흔>이 아르켈론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면, 추측은 확신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가 스팀펑크 해양 생태계에 아르켈론이 있다고 추측한다고 해도, 스팀펑크 소설이 아르켈론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면, 추측은 확신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소설 <상흔>이 아르켈론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면, <파르페틱>처럼, <상흔>에도 아르켈론이 없을 겁니다. (적어도 <상흔> 전반부는 아르켈론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르페틱>과 <상흔>은 똑같이 아르켈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만화와 소설이 아르켈론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파르페틱> 독자와 <상흔> 독자에게 이건 다른 의미가 됩니다. <파르페틱> 독자는 아르켈론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만화는 하이틴 로맨스 장르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이틴 로맨스 장르는 아르켈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로맨스 장르는 고대 생태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게임들처럼, <파르페틱>에는 아르켈론이 없습니다. 카메야마 후코가 훈훈한 이치 및 쾌활한 다이야와 함께 바닷가에 놀러간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아르켈론이 나온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코가 아르켈론을 목격한다면, 이건 로맨스 분위기를 망칠 겁니다. 하이틴 로맨스 <파르페틱>과 달리, 소설 <상흔>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로서 <상흔>은 온갖 고대 해양 동물들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상흔>이 온갖 고대 해양 동물들을 집어넣을 수 있음에도, <상흔>이 아르켈론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소설 독자에게 이건 부재(不在)가 될 겁니다.
하이틴 로맨스 만화 <파르페틱>에서 아르켈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무(無)입니다. 만화 독자들이 아르켈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팀펑크 판타지 독자는 아르켈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가 유일한 아르켈론을 강조하는 것처럼, 대중적인 고생물학계에서 아르켈론은 유명세를 자랑합니다. 대중적인 고생물학 서적들은 아르켈론을 빼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 <상흔>이 아르켈론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건 부재가 될 겁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독자에게 이것은 똑같이 무가 되거나 똑같이 부재가 되지 않습니다. 스팀펑크 바닷속에 아르켈론이 없다면, 아랫집 수진에게 이건 부재가 됩니다.
반면,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에게 이건 부재가 아닙니다. 이건 무입니다. 아랫집 수진에게 이건 '부재'이나,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에게 이건 '무'입니다. 상황이 똑같다고 해도, 수진에게 이런 상황은 '부재'가 되고,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에게 이런 상황은 '무'가 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무인가요, 아니면 부재인가요? 아랫집 수진이 바스-라그 바닷속에서 아르켈론이 우아하게 헤엄친다고 해석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랫집 수진이 아르켈론을 기대한다면, 기대가 확신으로 넘어갈 수 있나요? 만약 차이나 미에빌이 바스-라그 바닷속에 아르켈론이 없다고 단언한다면, 상황이 바뀌나요? 독자로서 아랫집 수진이 작가 차이나 미에빌을 반드시 따라야 하나요?
만약 아랫집 수진이 바스-라그 바닷속에 고대 바다 거북 아르켈론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랫집 수진이 '부재'를 느끼고,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가 '무'를 느끼기 때문에, 수진이 아르켈론을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도, 다른 세 독자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비단 <상흔>만 아니라 숱한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이런 '무와 부재 해석'으로 흘러갑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에는 아르켈론을 비롯해 온갖 해양 동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흰돌고래 벨루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압주>에는 고대 바다가 있고, 아노말로카리스부터 둔클레오스테우스까지, 고대 바다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바다에 아르켈론이 있음에도, <압주>는 프로토스테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압주>가 게임 속의 바닷속에 벨루가가 없다고 단언하나요? 아니면 이 게임이 그저 벨루가를 보여주지 않을 뿐인가요? 고대 바다에 프로토스테가가 없나요, 아니면 이 게임이 그저 프로토스테가를 보여주지 않을 뿐인가요? 제작 기간이나 제작 비용 같은 특정한 이유 때문에, 게임 제작자들이 벨루가와 프로토스테가를 집어넣지 않았나요? 아니면 거대 기계가 벨루가들과 프로토스테가들을 멸종시켰나요? 아니면 게임 제작자들이 그저 잊었을 뿐인가요? 게임 제작자들이 깜빡 잊었나요? 아니면 고대 바다 거북 대표로서 아르켈론이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프로토스테가가 나오지 않았나요?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게임 <압주> 속의 고대 바다에는 프로토스테가가 없다."고 단언한다면, 아랫집 수진은 이런 설정이 미흡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게임 제작자들이 미흡하게 설정했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상흔> 속에 아르켈론이 있고 <압주> 속에 프로토스테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반박할 겁니다. 차이나 미에빌 역시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끝나지 않습니다. 무와 부재 해석은 끝나지 않습니다. 비단 이런 상황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상황들에서 무와 부재는 첨예한 갈등을 일으킵니다. (만화 <파르페틱>에 아르켈론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만화 독자는 이게 부재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쩌면 무와 부재는 가장 근본적인 해석 문제들 중에서 하나인지 모릅니다. 만약 무와 부재 갈등이 풀린다면, 상당히 많은 해석 문제들 역시 풀릴지 모르나, 무와 부재 갈등은 절대 쉽게 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재는 장르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달리, 아랫집 수진이 부재를 느끼기 때문에, 수진은 존재를 채우기 원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스팀펑크 바닷속에 아르켈론을 비롯해 다양한 고대 해양 동물들이 헤엄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어떤 작가는 이런 주장에 영감을 받고 새로운 스팀펑크 소설을 쓸지 모릅니다. 이런 소설이 인기를 끈다면, 다른 작가들 역시 비슷한 소설들을 쓸 테고, 스팀펑크 장르는 풍성해질 겁니다.
변증법 논리는 정과 반이 함께 합이 된다고 말합니다. 정은 혼자 합이 되지 못합니다. <상흔>이 정이라면, 아랫집 수진은 반이 되고, 새로운 스팀펑크 소설은 합이 될 겁니다. 이런 새로운 스팀펑크에는 또 다른 부재가 있을 테고, 누군가는 다시 부재를 채울 테고, 이건 다시 새로운 합이 될 겁니다. 이렇게 장르는 성장하고 넓어집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처럼, 독자들이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현재 상태에 만족할 테고, 장르는 성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부재는 중요합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존재와 무 중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보다 무를 언급하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를 더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랫집 수진이 부재를 느낄 수 있나요? 아랫집 수진은 어떻게 현실 속의 고생물학이 스팀펑크 판타지에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합니다. 수진은 비단 <상흔> 그 자체만 아니라 현실 속의 고생물학을 함께 고려합니다. 독자가 어떻게 현실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소설이 나타나는지 고려한다면, 독자는 '부재'를 느낄 겁니다. 12월 24일의 달달한 분위기가 선행 조건이 되는 것처럼, 현실과의 비교는 선행 조건이 됩니다. 이런 방법은 비단 부분적인 설정만 아니라 장르 전체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장르 그 자체에도 부재가 있을 겁니다.
게임 <압주>에서 가장 거대한 사건은 생물 다양성 복원입니다. 게임 속에서 거대 기계들은 해양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 같습니다. <압주>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에 '부재'가 있나요?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가장 거대한 '부재'가 무엇인가요?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중세 문학 작가들은 이런 생물 다양성 파괴를 걱정하지 않았으나, 아랫집 수진은 걱정합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걱정합니다. 뭐, 멍청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생물 다양성 파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생물 다양성 파괴가 행성급 환경 오염임에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그저 독재 국가가 나쁘다고 지랄지랄거릴 뿐입니다. 상황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심각함에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거시적인 위험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위험을 향해 지랄지랄거립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너무 천재적입니다. 이런 천재적인 지식인들이 날뛰기 때문에, 수많은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이건 '부재'입니다. 만약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한다면, 환경 아포칼립스 장르는 풍성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 게임 <압주> 스크린샷 출처: Game Genies, https://www.youtube.com/watch?v=0pUOPR9-xTw